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1)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8)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6)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예수님의 신분

요한복음 1:1-3

어느 성에서 굉장한 연회가 열렸습니다. 그 연회는 보통의 연회가 아니었습니다. 각국의 왕들이 참석했습니다. 왕이 미처 오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특사를 보냈습니다.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에 있는 온 나라들이 그 연회에 관심을 총 집중시켰습니다. 그 연회에 가장 귀하신 분이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연회를 주관하는 宴會長은 초비상이었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이래 일생에 가장 귀한 연회였기 때문입니다. 연회장은 오실 분의 사람됨을 체크했습니다. 최고였습니다. 존귀함을 체크했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훌륭해서 그분을 잘 소개하기 위하여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연회장은 그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모아서 작성하였습니다. 이윽고 그 분이 도착하자 연회장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분을 감명 깊게 소개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소개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모시고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께서 변화하실 때도 목격하였습니다.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갈보리언덕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났습니다. 승천하심도 친히 눈으로 봤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기간은 물론하고 승천하시기까지를 친히 눈으로 보았던 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jEn ajrch'/ h\n oJ lovgo",

I.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예수님(1a).

“신분”(state)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개인이 속하는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 또는 법률상 사람의 일정한 지위나 자격”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신분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유익합니다. 신분을 안다는 것은 정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안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분을 안다는 것은 죄인 된 우리로서는 최고의 정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사9:6; 요1:1).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마1:18-25/눅2:5-7) 인간이라고도 말합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를 신성(Deity)과 인성(Humanity)을 가지셨음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계시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태초라는 말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약간씩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요한복음 태초보다 훨씬 오랜 후의 태초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창세기의 태초가 요한복음의 태초보다 훨씬 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태초는 만물을 창조할 때의 태초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의 시간을 말합니다. 창세기 1:1절의 태초(tyviarEB])는 창조의 시작점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ajrch'//아르케)는 우리의 상상을 시작하기 이전입니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입니다. 즉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전의 상태입니다. 요한복음 1:1은 시간 이전의 어떤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 내에서의 시작이 아닙니다. 절대적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결부시켜서만이 언급될 수 있는 시작입니다.

그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말씀이 만물의 창조 전부터 계셨습니다. 말씀(lovgo")은 세상 이전에 선재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함께 시작한 시간보다 먼저 존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우주만물의 시작이 전혀 없는 태초부터 계신분입니다. 아직 시간이 시작되지 않은 태초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이 태초는 어떤 새로운 일이 조만간 시작되는 긴장된 태초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lovgo")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선재적인 신분이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왜 말씀으로 계셨습니까? ‘로고스’라는 말을 헬라적으로 성경에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계신 이유는 그 본질과 직무를 표현하고자 함입니다. 말은 드러내는(reveal) 것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듣는 자가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조상 아담은 그의 후손들에게 치명적인 것을 남겨주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파멸의 곳인 지옥으로 들어가야 할 입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었습니다. 점점 패괴해져 갔습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모두 가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이 세상은 어둠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이 세상은 폭발하여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동산에서 과일 몇 개 먹은 것 치고 너무나 가중처벌 된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지금도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 몇 개 먹는 것은 주인의 마음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加重處罰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명령을 준수하는데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황금 10,000톤을 놓으나 선악과를 놓으나 어기는 수치는 똑같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선거법 위반혐의로 재판에서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을 받거나 배우자·직계존속 및 선거사무장·회계책임자 등이 300만 원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당선이 무효화됩니다. 100억원 받은 사람이나 100만원 받은 사람이나 모두 당선무효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인간은 불순종에 이르렀습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예견한대로 인간의 눈이 “열림”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다른 길을 보았습니다. 연약함을 경험했습니다.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질병이 인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이 세상에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는 창조이전부터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Incarnation)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사람으로 불리어지지 않았습니다. 태초에는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의사소통인 말씀(communication)으로 계셨습니다. 우리와 친밀한 관계성을 갖고자 요한을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다바르/로고스)은 인간에게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히11:3).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멸망하시기도 합니다(벧후3:5-7).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 받아야 할 사람을 살리십니다(약1:18).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의 머리를 밟으시고 깨버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기 이전에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두 번째로)

II.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예수님(1b2).

1b와 2절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kai; oJ lovgo" h\n pro;" to;n qeovn, kai; qeo;" h\n oJ lovgo".

2. ou+'to" h\n ejn ajrch'/ pro;" to;n qeovn.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함께(pro;")는 “~ 에서부터, ~을 향하여”입니다. 어떤 장소에서부터 출발하는 동작입니다. 또한 어떤 장소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다”는 것입니다. 향한다는 것은 의지하기 위한 것이며 합동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서 계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계획되어 있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예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창세전에 그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구원이기에 현세에서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의 최소한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혜롭고 능력 있는 구원입니다. 은총과 사랑이 있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최대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시려고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때가 차매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한 말씀이신 예수님은 그 신분이 존귀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1절 중간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했습니다. 곧 ‘하나님은 말씀이라’가 아닙니다.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님의 존귀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나 편재하여 계십니다. 카나리아 제도에도 계시고, 전주에도 계십니다. 천국에도 계시고 이 땅에도 계십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언약하심을 끊임없이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신성에 속한 것을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의 통치는 우주 및 전 세계의 유일하신 통치자이십니다.

말씀이신 통치자가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항상 동적(dynamic)인 존재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동적(dynamic)으로 계십니다. 따라서 로고스를 가진 사람들은 항상 동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향해 동적인 존재로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로고스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상태로 계십니다. 성부와 성령하나님과 대등한 위치로 신비하게 존재하십니다.(pro;" to;n qeovn)

그래서 우리가 로고스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교통하십니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하신 것처럼,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위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와 곡식을 가리지 않은 추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천국의 백성과 지옥의 백성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으스스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울면서 생활하는 통곡의 계곡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첩첩산중에서 헤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항상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의 눈동자가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듣기 위해 항상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그분의 능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의 우리에 대한 긍휼은 아직까지 측정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오직 관심은 그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으며 지금도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오늘 세 번째로)

III.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3).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pavnta di! aujtou' ejgevneto, kai; cwri;" aujtou' ejgevneto oujde; e{n. o{ gevgonen.

우리의 우주는 광대합니다. 한 줄기의 빛은 시간당 11억km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하수라 하는 은하계를 지나가는데 빛의 속도로 10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은하계는 수십억 개의 은하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계산하기 바랍니다.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가 약 1억 4000km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종이 한 장이라고 가정합시다. 가장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20m높이의 종이더미가 필요합니다. 은하계의 직경을 나타내는 데는 496km 높이의 종이더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시속 1600km로 自轉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110,000km로 태양을 공전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216만km로 공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24시간마다 우리는 9,000만km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336억km의 공간을 여행합니다. 20세 된 사람은 6,720억km를 여행하였습니다. 지구둘레를 1,680만 바퀴를 돌았다는 말입니다.

우주에서 인체로 돌아옵시다. 발길이와 팔 길이가 일치합니다. 우리의 핏줄을 전부 잇는다면 지구를 3바퀴 돌 수 있는 거리입니다(120,000km). 피가 몸을 완전히 도는 시간은 46초입니다. 눈을 한번 깜빡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1/40 초입니다. 혀에 침이 묻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맛을 알 수 없고 코에 물기가 없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갓난아기는 305개의 뼈를 갖고 태어나는데 커가면서, 여러 개가 합쳐져서 206개 정도로 줄어듭니다. 사람의 허파는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무겁습니다. 모든 인간은 코에 극소량의 철(Fe)을 가지고 있어서 커다란 자장이 있는 지구에서 방향을 잡기 쉽도록 해줍니다. 빛이 없을 때 이것을 이용해서 방향을 잡습니다. 눈의 근육은 24시간 동안 약 100,000번 움직입니다. 다리가 이 정도의 운동을 하려면 적어도 80Km는 걸어야 합니다. 두개의 콧구멍은 3~4시간마다 그 활동을 교대합니다. 즉 한쪽 콧구멍이 냄새를 맡는 동안 다른 하나는 쉰다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재채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재채기는 시속 160Km의 속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만물의 극히 일부인 지구와 인체를 잠깐 상고했습니다. 만물을 모두 나열한다면 평생을 그 연구만 하다가 일생을 마쳐야 합니다. 그래도 다 못하고 극히 일부만 건드렸다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우주의 기원에 관해서 모든 시대는 인간들의 정신을 지배해 왔습니다. 창조에 대한 억측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사람들이 모두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 하셨습니다. 하면 될 것을, 아니다 라고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간단합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박하려고 여러 가지 거짓말을 붙이고 붙였습니다. Big-Bang이니 우연이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붙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도 안 되는 군더더기가 지금도 계속 붙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先在(선재)하신 로고스를 통해서 존재하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창조 되어질 때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없었는데 제멋대로 우연히 나온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대충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세밀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영혼)까지 만드셨습니다. 종류대로 아름답고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에는 로고스이신 예수님의 의지와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심오함과 신비함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인간을 창조하심에는 기이하고 기이한 창조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기쁨을 누리시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1:3).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시19:1).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대신 다스리라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친히 교제를 나누시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15세기에 보헤미야[Bohemia]의 종교개혁자 쟌 후스(1372-1415)가 어느 날 거리에 나갔다가 두 그림이 나란히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개탄했습니다. 한 그림은 나사렛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청빈하고 초라하였습니다. 소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곁에 붙어 있는 그림은 로마교황의 그림이었습니다. 교황은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썼습니다. 사람들이 어깨에 멘 호화찬란한 가마를 타고 있었습니다. 시종이 옆에서 양산을 받쳐주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청연감에 따르면 교황이란 “로마의 주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합니다. 사도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의 후계자라합니다.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守長입니다. 서(西)유럽의 總大主敎입니다. 이탈리아의 首席大主敎입니다. 로마 管區大主敎입니다. 로마首都大主敎입니다. 바티칸의 주권자입니다. 교황의 모습은 나사렛 예수님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교황의 종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서민의 신분이었습니다. 평신도의 신분으로 있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행어사였습니다. 그의 신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 창조주이신 예수님과 항상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  (1) 2023.09.03
세례요한 자신에 대한 증언  (0) 2022.03.02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