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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17-3:4 

 

지난 6일 현지시각으로 새벽417분에 시리아에 인접한 튀르키예 동남부에서 규모7.8 지진이 발생하여 현재 2,4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NYT, BBC 방송, AP 통신이 전했습니다.지질조사국은 실제로는 10,0000여명 이상이 훨씬 웃도는 사망자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지진피해지역엔시리아난민이 다수 거주 중이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지진피해로는 엄청난 피해입니다.

populism이란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슈테펜 헤르초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연구원과 로런수킨 런던 정경대 교수가 윤대통령을 우리나라의 첫 번째 포퓰리스트 대통령(Yoon-the country’s first populist president)”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습니까? 윤대통령이 우리나라가 핵을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데도 소유할 것처럼 국민을 기만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사람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통치 기간 내내 이들은 기존 정치과정을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혐오와 차별을 확산했고, 대선 이후에는 지지자들이 선거결과에 불복하며 국가가 내전을 걱정할 만큼 분열되었습니다. 두 나라는 민주주의가 무너질 뻔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 이웃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육기관에서 악한 짓들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텐데 악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선과 좋음은 사람들을 좋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쁨과 악은 사람들을 나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선과 좋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선과 좋음은 나에게도 유익을 줍니다. 악과 나쁨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됩니다. 악과 나쁨은 가정을 해치고, 사회를 해치며, 국가 전체를 해치게 됩니다. 이러한 악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사실 각종 교육기관이 악과 나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불법집단이 아니고서는 악과 나쁨을 전수하지 않습니다. 좋음과 선을 가르치는데도 악과 나쁨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쁨과 악이 정의의 탈을 쓰고, 즉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온 국가에 팽배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수사하고, 정의의 탈을 쓰고 재판을 합니다. 선과 좋음은 실종되어가는 것 같고 악과 나쁨은 계속 발전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하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땅의 흙으로부터의 호흡 곧 숨의 효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적인 개성에 존재하거나 사람의 의식적인 자유로운 자아(Ego)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1:6,9,27-28,2:2-3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27-28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인간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1:6,9,27-28,2:2-3). 우리의 이웃에 대한 도덕적 정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내재해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시되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이웃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했을 때 형식상으로는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웃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언약적 신실함을 통해서 반영했어야 하는 실질적 형상은 그와 그의 후손 모두에게서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이 실질적 형상은 하나님 형상의 원형이자 이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을 통해서만 회복됩니다.

창조주이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본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2:1-6을 보면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창조주이십니다. 우주를 관할하시고 그 만든 우주를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동등 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욕심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욕심내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창조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욕망은 피조물의 지위를 절대로 높여주지 못합니다. 욕망은 창세기 3장 이후에서 계속 보지만 욕망은 죽음을 초래합니다. 욕망 있다고 해서 그 욕망대로 살았던 사람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총살당하거니 암살당하거나 독살당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도 죽이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 최고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들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보살피고 보호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개역)가 아니라 경작하고 지킨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정원지기나 목자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선한 것입니다. 일은 동산을 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은 동산을 특별한 피조물인 사람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16절과 17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살 때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허용된 것과 금지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산의 나무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금지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나무의 정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지된 사실입니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명령하심의 권위만 있습니다. 사람은 조건 없는 순종에 대한 기대만 있습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은 부르심, 허용, 금지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차적인 과제는 하나님의 목적이 갖는 세 가지 차원을 한데 묶는 일입니다. 어느 두 가지도 다른 한 가지가 없이는 삶을 왜곡시킵니다.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ironical 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소명에 담겨 있는 명령이나 허용에 담겨 있는 선물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명과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채로 있습니다. 동산의 하나님은 주로 금지하는 분으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지는 다른 두 가지를 통해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세 가지의 병렬과 그들 사이의 균형은 이 본문에 인간의 운명에 관한 미묘한 통찰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정녕 죽으리라(2:17)/tWmT; t/m WNM,mi/mimhenhū(그것으로부터) môt thâmūt 그것으로부터 죽고 죽으리라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봅니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죽음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죽는 즉시 거기에서 끝나버립니다. 죽음은 해체되는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해체됩니다. 영혼은 천국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육신은 죽는 즉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육신은 애초에 사람이 왔던 곳,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들과 이별입니다. 사랑의 온도가 최고도였던 로미오와 줄리엣 같아도 헤어져야 합니다. 죽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약으로 약간의 생명은 연장하지만, 결국은 죽어야 하고 죽습니다. 왜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이 죽음은 성경 말고 다른 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아담은 말씀대로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 나무의 실과에 유해 한 독소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범죄에 수반되는 죽음은 열매에 있지 않았습니다.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에 있습니다. 죄가 되는 행동에 범죄구성요건이 있습니다(pulpit;225p).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증적인 법을 어겼습니다.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긴 것입니다(Matthew Henry;79.80).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를 어긴 것입니다(Calvin). 선악의 지식은 단순한 선악의 경험이 아닙니다. 영적인 발전에 있어서 도덕적 요소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후손들을 죽음에 빠트렸습니다(Keil and Delitzsch;90,91).

 

마귀에게 특강을 받은 아담과 하와(3:4)/@WtmuT] t/mAaOl/lō môt thĕmutūn 결코 너희가 죽고 죽지 않는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에서 아니하리라 부정어는 완강하게 부정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부정어에서 가장 완강한 부정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희가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고 죽으리라라고 하셨는데, 마귀는 아담에게 아냐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으면 죽지 않았는데, 마귀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하신 대로 죽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Mussolini(1883.7.29.-1945.4.28.)는 전혀 일관성이라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기호학 교수 움베르토 에코는 “Mussolini에게 철학 따위는 없었다. 단지 그럴듯한 말뿐이라고 말했습니다. Mussolini는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했고, 코스모폴리탄(범세계주의자)이었다가 국가주의자가 되었으며, 왕년의 무신론자로서 집권 중에는 자신을 신이 이탈리아에 내리신 선물이라 말했습니다. 왕정을 기필코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가, 국왕의 보호자를 자처했습니다. 다시 왕정반대론자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많은 자가 그를 따랐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사람이 악한 자인가? 선한 자인가를 구별해서 따라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따르면 결과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죄입니다. 아담이 사단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에게 특강을 받은 것입니다.

아담이 시험(probation)과 유혹(temptation) 사이에서 설왕설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가 악용하여 그것에 유혹의 요소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시험의 배후에는 선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혹의 배후에는 악한 계획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뱀은 사단이 한 소리입니다. 뱀을 통하여 사단이 복화술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단은 일단 하와의 하나님께 대한 認知度참으로라는 말로 혼란하게 합니다. 참으로#a"'/’āp라는 단어는 앞에 말한 것에 덧붙여진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한, 뿐만 아니라, 실로, 긍정문 뒤에서 얼마나 많이’, 부정문 뒤에서 얼마나 적게’, 반의적 의미로 그러나’” 등입니다. 하와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으실텐데,” “하와 니가 잘못 들었겠지, 하나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셔”. “참으로라는 말은 사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인용한 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하와로 하여금 고려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하와는 사단이 말하는 이례적인 일을 깨닫지 못한 채 사단과의 대화에 말려들었습니다.

 

창세기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사실에 반대되는 조건문에 대해 말을 더하고 뺐습니다.

 

창세기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와는 하나님보다 더한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에 더하고 뺌으로서 뱀보다 더 나은 자신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뱀에 대한 지적 우월감에 빠졌습니다. 뱀에 대하여 느꼈어야 할 두려움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사단은 간교하게도 과장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나무를 사용함으로써 하와로하여금 하나님께 속박당하고 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뱀은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하와로하여금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마음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에 의하여 엄청나게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했습니다. 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하게 속박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와의 덧붙여진 말, “만지지도 말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의 이 같은 부정적인 말에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 심하게 속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인용했습니다.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와는 만지는권리를 거부당했다고 터무니없이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지나치게 가혹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뱀이 의심을 심어주는 말로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하와는 뱀의 접근을 사전에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뱀하고 계속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금지 명령의 정확한 내용을 비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언된 형벌 죽고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너희가 죽을까하노라로 해석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안녕에 관심이 있으시기에 먹지 말라고 권하셨다.” 그렇게 미혹된 하와에게 뱀은 내가 fact를 말해 줄까?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경고로 해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명령으로 주어졌다. 네가 순종한 대상인 그분은 너에 대하여 별다른 정당한 이유 없이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려 하고 있다. 네가 또 죽음을 단순히 자애로운 관심으로 해석하는 것도 역시 잘못되었다. 그것은 사실상 협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허울뿐이요 형벌도 시시한 위협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진정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인바, 이는 너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그가 너희의 잠재 능력 곧 하나님과의 동등 됨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과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어 선악의 비밀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고 이로써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아는 자가 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동기가 거짓되기에 그의 금지 명령 또한 부당하며 불순종에 대한 그의 위협적인 형벌도 말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뱀이 사악하게도 거짓과 악한 동기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을 때 하와는 침묵했습니다. 사단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이름을 방어하는데 실패했습니다. 하와는 마귀에게 완전히 미혹 당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충성심마저 흔들렸습니다. 이쯤 되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하와의 눈에 그 나무가 먹기도 좋고 눈을 즐겁게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이미 결론이 나 있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이란 말은 여자가 그 나무에 대하여 결론을 지은즉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말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다음에 뒤따라 취해진 그들의 행동들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 같은 행동은 그들의 마음에서 그들이 언약을 지키는 자이기를 이미 포기하고 대신 언약을 파괴하는 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6절에서 자기와 함께 한이라는 문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와는 실과를 먹었으되 아담이 그 여자로부터 받아먹기를 거절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그러나, 하와는 죄가 있으나 아담은 죄가 없는 경우가 결코 있지 아니했고, 또 아담이 그 실과를 거절했을 만한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그 같은 질문은 헛된 말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과 대화하고 그 실과를 따먹는 전 과정을 통해서 그 여자와 줄곧 함께 있었습니다. 그도 똑같이 범죄 한 것입니다. 아담은 그 여자에 대한 머리 됨을 포기하고 그 여자가 범죄 하던 때 줄곧 함께 있으면서도 그 여자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허용한 까닭에 그 자신도 사실상 범죄한 것입니다. 하와가 타락하던 때에 아담도 타락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미 먼저 타락해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마찬가지로 뱀이 하나님의 순전함을 공격하던 때에 그의 명예를 방어하는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가르쳐 뱀의 속임수를 저항하도록 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기 아내로 하여금 자기를 가르쳐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무시하게끔 허용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여자가 완전하게 속임을 당하고 있던 때,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의식적으로, 고의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범하였다고 했습니다(딤전2:14).

 

성도 여러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사단에게 선악과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했습니다. 말씀을 비틀어서 해석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사단의 거짓말을 듣고서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거절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말씀대로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사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假設로 만들었습니다. 거짓말로 깎아내리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에 대한 권위의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 자신에게로 옮겼음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권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참과 거짓을 실험을 통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들이 실험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실과를 먹는 순간에 선악과에 관한 사단의 가설을 참된 것으로 이미 믿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실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진실로 믿었다고 하면 그들은 결코 실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이 말하는 대로, 사람들은 결코 자율적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행하게 되어있습니다(2:2).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생각하기를, 자기들의 인생길을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진선미를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자율적 권리를 단지 행사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소위 말해서 인간승리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가 되었고, 그날 이후로 그들의 타락한 후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유사한 자율권을 계속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단순히 사과 한 조각 먹은 정도의 사소한 행동을 한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욱하여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형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 범죄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피조물의 의도적인 거부와 창조주를 대항하는 고의적인 반항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율권과 자유를 요구한 것입니다. 사람이 형이상학적으로 그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경험론적으로 그가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리라그리고 윤리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그의 남편도 먹은지라를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섬기라고 하는 사단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되 자기 좋을대로 결정하였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Closing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이 너희를 위하여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주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은 부르심, 허용, 금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이 세 가지 부르심, 허용, 금지하심은 한데 묶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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