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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17-3:4 

 

지난 6일 현지시각으로 새벽417분에 시리아에 인접한 튀르키예 동남부에서 규모7.8 지진이 발생하여 현재 2,4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NYT, BBC 방송, AP 통신이 전했습니다.지질조사국은 실제로는 10,0000여명 이상이 훨씬 웃도는 사망자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지진피해지역엔시리아난민이 다수 거주 중이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지진피해로는 엄청난 피해입니다.

populism이란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슈테펜 헤르초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연구원과 로런수킨 런던 정경대 교수가 윤대통령을 우리나라의 첫 번째 포퓰리스트 대통령(Yoon-the country’s first populist president)”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습니까? 윤대통령이 우리나라가 핵을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데도 소유할 것처럼 국민을 기만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사람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통치 기간 내내 이들은 기존 정치과정을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혐오와 차별을 확산했고, 대선 이후에는 지지자들이 선거결과에 불복하며 국가가 내전을 걱정할 만큼 분열되었습니다. 두 나라는 민주주의가 무너질 뻔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 이웃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육기관에서 악한 짓들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텐데 악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선과 좋음은 사람들을 좋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쁨과 악은 사람들을 나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선과 좋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선과 좋음은 나에게도 유익을 줍니다. 악과 나쁨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됩니다. 악과 나쁨은 가정을 해치고, 사회를 해치며, 국가 전체를 해치게 됩니다. 이러한 악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사실 각종 교육기관이 악과 나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불법집단이 아니고서는 악과 나쁨을 전수하지 않습니다. 좋음과 선을 가르치는데도 악과 나쁨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쁨과 악이 정의의 탈을 쓰고, 즉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온 국가에 팽배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수사하고, 정의의 탈을 쓰고 재판을 합니다. 선과 좋음은 실종되어가는 것 같고 악과 나쁨은 계속 발전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하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땅의 흙으로부터의 호흡 곧 숨의 효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적인 개성에 존재하거나 사람의 의식적인 자유로운 자아(Ego)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1:6,9,27-28,2:2-3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27-28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인간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1:6,9,27-28,2:2-3). 우리의 이웃에 대한 도덕적 정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내재해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시되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이웃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했을 때 형식상으로는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웃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언약적 신실함을 통해서 반영했어야 하는 실질적 형상은 그와 그의 후손 모두에게서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이 실질적 형상은 하나님 형상의 원형이자 이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을 통해서만 회복됩니다.

창조주이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본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2:1-6을 보면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창조주이십니다. 우주를 관할하시고 그 만든 우주를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동등 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욕심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욕심내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창조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욕망은 피조물의 지위를 절대로 높여주지 못합니다. 욕망은 창세기 3장 이후에서 계속 보지만 욕망은 죽음을 초래합니다. 욕망 있다고 해서 그 욕망대로 살았던 사람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총살당하거니 암살당하거나 독살당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도 죽이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 최고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들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보살피고 보호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개역)가 아니라 경작하고 지킨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정원지기나 목자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선한 것입니다. 일은 동산을 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은 동산을 특별한 피조물인 사람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16절과 17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살 때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허용된 것과 금지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산의 나무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금지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나무의 정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지된 사실입니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명령하심의 권위만 있습니다. 사람은 조건 없는 순종에 대한 기대만 있습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은 부르심, 허용, 금지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차적인 과제는 하나님의 목적이 갖는 세 가지 차원을 한데 묶는 일입니다. 어느 두 가지도 다른 한 가지가 없이는 삶을 왜곡시킵니다.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ironical 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소명에 담겨 있는 명령이나 허용에 담겨 있는 선물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명과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채로 있습니다. 동산의 하나님은 주로 금지하는 분으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지는 다른 두 가지를 통해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세 가지의 병렬과 그들 사이의 균형은 이 본문에 인간의 운명에 관한 미묘한 통찰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정녕 죽으리라(2:17)/tWmT; t/m WNM,mi/mimhenhū(그것으로부터) môt thâmūt 그것으로부터 죽고 죽으리라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봅니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죽음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죽는 즉시 거기에서 끝나버립니다. 죽음은 해체되는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해체됩니다. 영혼은 천국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육신은 죽는 즉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육신은 애초에 사람이 왔던 곳,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들과 이별입니다. 사랑의 온도가 최고도였던 로미오와 줄리엣 같아도 헤어져야 합니다. 죽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약으로 약간의 생명은 연장하지만, 결국은 죽어야 하고 죽습니다. 왜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이 죽음은 성경 말고 다른 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아담은 말씀대로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 나무의 실과에 유해 한 독소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범죄에 수반되는 죽음은 열매에 있지 않았습니다.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에 있습니다. 죄가 되는 행동에 범죄구성요건이 있습니다(pulpit;225p).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증적인 법을 어겼습니다.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긴 것입니다(Matthew Henry;79.80).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를 어긴 것입니다(Calvin). 선악의 지식은 단순한 선악의 경험이 아닙니다. 영적인 발전에 있어서 도덕적 요소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후손들을 죽음에 빠트렸습니다(Keil and Delitzsch;90,91).

 

마귀에게 특강을 받은 아담과 하와(3:4)/@WtmuT] t/mAaOl/lō môt thĕmutūn 결코 너희가 죽고 죽지 않는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에서 아니하리라 부정어는 완강하게 부정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부정어에서 가장 완강한 부정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희가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고 죽으리라라고 하셨는데, 마귀는 아담에게 아냐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으면 죽지 않았는데, 마귀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하신 대로 죽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Mussolini(1883.7.29.-1945.4.28.)는 전혀 일관성이라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기호학 교수 움베르토 에코는 “Mussolini에게 철학 따위는 없었다. 단지 그럴듯한 말뿐이라고 말했습니다. Mussolini는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했고, 코스모폴리탄(범세계주의자)이었다가 국가주의자가 되었으며, 왕년의 무신론자로서 집권 중에는 자신을 신이 이탈리아에 내리신 선물이라 말했습니다. 왕정을 기필코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가, 국왕의 보호자를 자처했습니다. 다시 왕정반대론자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많은 자가 그를 따랐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사람이 악한 자인가? 선한 자인가를 구별해서 따라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따르면 결과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죄입니다. 아담이 사단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에게 특강을 받은 것입니다.

아담이 시험(probation)과 유혹(temptation) 사이에서 설왕설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가 악용하여 그것에 유혹의 요소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시험의 배후에는 선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혹의 배후에는 악한 계획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뱀은 사단이 한 소리입니다. 뱀을 통하여 사단이 복화술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단은 일단 하와의 하나님께 대한 認知度참으로라는 말로 혼란하게 합니다. 참으로#a"'/’āp라는 단어는 앞에 말한 것에 덧붙여진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한, 뿐만 아니라, 실로, 긍정문 뒤에서 얼마나 많이’, 부정문 뒤에서 얼마나 적게’, 반의적 의미로 그러나’” 등입니다. 하와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으실텐데,” “하와 니가 잘못 들었겠지, 하나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셔”. “참으로라는 말은 사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인용한 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하와로 하여금 고려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하와는 사단이 말하는 이례적인 일을 깨닫지 못한 채 사단과의 대화에 말려들었습니다.

 

창세기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사실에 반대되는 조건문에 대해 말을 더하고 뺐습니다.

 

창세기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와는 하나님보다 더한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에 더하고 뺌으로서 뱀보다 더 나은 자신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뱀에 대한 지적 우월감에 빠졌습니다. 뱀에 대하여 느꼈어야 할 두려움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사단은 간교하게도 과장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나무를 사용함으로써 하와로하여금 하나님께 속박당하고 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뱀은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하와로하여금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마음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에 의하여 엄청나게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했습니다. 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하게 속박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와의 덧붙여진 말, “만지지도 말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의 이 같은 부정적인 말에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 심하게 속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인용했습니다.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와는 만지는권리를 거부당했다고 터무니없이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지나치게 가혹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뱀이 의심을 심어주는 말로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하와는 뱀의 접근을 사전에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뱀하고 계속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금지 명령의 정확한 내용을 비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언된 형벌 죽고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너희가 죽을까하노라로 해석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안녕에 관심이 있으시기에 먹지 말라고 권하셨다.” 그렇게 미혹된 하와에게 뱀은 내가 fact를 말해 줄까?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경고로 해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명령으로 주어졌다. 네가 순종한 대상인 그분은 너에 대하여 별다른 정당한 이유 없이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려 하고 있다. 네가 또 죽음을 단순히 자애로운 관심으로 해석하는 것도 역시 잘못되었다. 그것은 사실상 협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허울뿐이요 형벌도 시시한 위협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진정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인바, 이는 너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그가 너희의 잠재 능력 곧 하나님과의 동등 됨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과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어 선악의 비밀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고 이로써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아는 자가 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동기가 거짓되기에 그의 금지 명령 또한 부당하며 불순종에 대한 그의 위협적인 형벌도 말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뱀이 사악하게도 거짓과 악한 동기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을 때 하와는 침묵했습니다. 사단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이름을 방어하는데 실패했습니다. 하와는 마귀에게 완전히 미혹 당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충성심마저 흔들렸습니다. 이쯤 되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하와의 눈에 그 나무가 먹기도 좋고 눈을 즐겁게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이미 결론이 나 있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이란 말은 여자가 그 나무에 대하여 결론을 지은즉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말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다음에 뒤따라 취해진 그들의 행동들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 같은 행동은 그들의 마음에서 그들이 언약을 지키는 자이기를 이미 포기하고 대신 언약을 파괴하는 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6절에서 자기와 함께 한이라는 문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와는 실과를 먹었으되 아담이 그 여자로부터 받아먹기를 거절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그러나, 하와는 죄가 있으나 아담은 죄가 없는 경우가 결코 있지 아니했고, 또 아담이 그 실과를 거절했을 만한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그 같은 질문은 헛된 말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과 대화하고 그 실과를 따먹는 전 과정을 통해서 그 여자와 줄곧 함께 있었습니다. 그도 똑같이 범죄 한 것입니다. 아담은 그 여자에 대한 머리 됨을 포기하고 그 여자가 범죄 하던 때 줄곧 함께 있으면서도 그 여자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허용한 까닭에 그 자신도 사실상 범죄한 것입니다. 하와가 타락하던 때에 아담도 타락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미 먼저 타락해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마찬가지로 뱀이 하나님의 순전함을 공격하던 때에 그의 명예를 방어하는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가르쳐 뱀의 속임수를 저항하도록 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기 아내로 하여금 자기를 가르쳐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무시하게끔 허용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여자가 완전하게 속임을 당하고 있던 때,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의식적으로, 고의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범하였다고 했습니다(딤전2:14).

 

성도 여러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사단에게 선악과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했습니다. 말씀을 비틀어서 해석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사단의 거짓말을 듣고서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거절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말씀대로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사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假設로 만들었습니다. 거짓말로 깎아내리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에 대한 권위의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 자신에게로 옮겼음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권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참과 거짓을 실험을 통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들이 실험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실과를 먹는 순간에 선악과에 관한 사단의 가설을 참된 것으로 이미 믿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실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진실로 믿었다고 하면 그들은 결코 실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이 말하는 대로, 사람들은 결코 자율적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행하게 되어있습니다(2:2).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생각하기를, 자기들의 인생길을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진선미를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자율적 권리를 단지 행사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소위 말해서 인간승리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가 되었고, 그날 이후로 그들의 타락한 후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유사한 자율권을 계속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단순히 사과 한 조각 먹은 정도의 사소한 행동을 한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욱하여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형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 범죄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피조물의 의도적인 거부와 창조주를 대항하는 고의적인 반항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율권과 자유를 요구한 것입니다. 사람이 형이상학적으로 그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경험론적으로 그가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리라그리고 윤리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그의 남편도 먹은지라를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섬기라고 하는 사단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되 자기 좋을대로 결정하였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Closing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이 너희를 위하여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주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은 부르심, 허용, 금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이 세 가지 부르심, 허용, 금지하심은 한데 묶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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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영웅은 없다

창세기12:1-3 

 

英雄이란 남다른 용기와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로 보통 사람들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비범한 사람을 뜻합니다. 영미권에서는 Hero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영웅은 거품이 많습니다. 남다른 용기와 재능을 어디에 썼느냐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과 같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영웅이라고 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거의 나쁜 사람들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죄인을 잡으라고 권력을 주었더니, 죄인은 잡지 않고, 의인들을 잡아들이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위인이라는 말을 과거에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나 부흥회 때에 이런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다윗 같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세 같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니엘이나 엘리야 같아야 하며, 솔로몬 같아야 하고 사무엘 같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런 비판 없이 아멘, 아멘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이상합니다. 그리고 내리는 결론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사람들 같지는 못할 거야.”라곤 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어림도 없어.라고 모든 것을 포기한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은 압도적입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5대족장중 첫 번째로 이스라엘의 토대가 되는 인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과 믿음에 관한 말을 할 때면 언제나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복음의 message를 가장 집약적으로 설명하는 로마서에서도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대표적 인물로 아브라함이 소개됩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아브라함, 서신서에서도 아브라함은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3장에서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해될까봐 덧붙여서 로마서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무능함에 대한 재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성경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단 한 사람의 信仰行路로만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의 비밀, 구원의 비밀인 믿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생애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성경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사람을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하면 우리는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믿음의 사람, 믿음의 족장으로 본토를 떠난 사람, 아니면 이삭을 바친 사건도 떠오릅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이삭을 바친 사건갈대아 우르를 떠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다는 사건을 연결할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 아브라함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도 믿음이 좋기에 바쳤을 것이라고 우리는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만 생각하면 우리는 기가 죽습니다. 아브라함과 비교를 하면 우리는 늘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정도나 되니까 그렇지, 우리는 어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family에 명함도 못 내밀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히브리서11:8절부터 보시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따라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12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생애는 그렇게 안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믿음으로 갈대아 땅을 떠났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을 위함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신앙의 위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11:26-32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브라함의 가족 즉 데라와 롯과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출발해서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 중간에 있었던 곳이 하란입니다. 하란까지는 누가 가족들을 인도합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입니다. 아브라함의 주도권이 아니라 데라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7:2절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 중에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갈대아 우르란 메소보다미아의 비옥한 문명도시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의하면 어디서 나타난 것부터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란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디서 이미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갈대아 우르에서 이미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여호수아24:1-3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오기 전 갈대아 우르에 살 때 누가 이방신을 섬겼습니까? 데라가 섬겼습니다. 데라는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에 이방신을 섬겼습니까? 하나님을 섬겼습니까?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방신을 섬겼다면 믿음으로 그가 갈대아 우르를 넘어왔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자마자 믿음으로 순종하였다고 하면 이야기가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근본이 되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하려고 하는 것은 그 부분이 과연 그런가 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첫 번부터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있고 가나안에 들어오는 아브라함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으로 알고 있어서 결론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걸로 봅니다. 사람이 괜찮다고 한번 인정하면 거기에 맞추어서 생각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니까 당연히 순종했을 것이고 당연히 믿음 속에서 그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지레짐작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렇지 못한 인물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심판하는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아브라함을 꺼내놓고 아브라함은 했는데 너희는 왜 못하느냐?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아브라함을 성경이 그런 차원에서 쓰지를 않습니다. 여호수아24:2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절만 보면 데라 혼자서만 이방신을 섬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희 조상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까? 데라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최초의 조상은 아브라함부터이지 데라부터가 아닙니다. 너희 조상들이라고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인 데라를 지적하는 것은, 너희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말이 이렇게 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고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신을 섬기던 본토 친척에서부터 너희조상 아브라함을 꺼냈다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추측입니다. 그런데 다시 2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우리말에 했으나'라는 것은 앞에 있는 내용과 뒤에 있는 내용이 반대라는 의미입니다. 앞에 있는 조건과 전혀 다른 결과가 뒤에 쫓아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방신을 섬겼으나 그 속에서 아브라함을 꺼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가면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은 나를 믿고 데라와 그 위의 선조들은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내가 꺼냈다 그러면 말이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혹은 아브라함이 나를 섬겼기 때문에 꺼내 왔다고 해야 되는데, 전체적인 앞에 있는 조건은 꺼내 온 것에 합당할 조건이 아닌 조건이 있었다는 nuance입니다. 이방신을 섬겼는데도 불구하고 꺼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겼고 데라는 이방신을 섬겼으니까 이방신을 섬기는 속에서, 이방신을 조상들이 섬겼지만 그 속에서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꺼내 오신 것 아닌가? 어떤 해 어린이주일학교 설교집에 아브라함이 어느 날 데라가 섬기는 우상을 다 깨버렸다는 것입니다. 데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어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24:2을 보면 그렇지 않은떼, 참으로 황당한 설교였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은데, 마치 그런 것처럼 아브라함을 美化 또는 信仰化한 잘못된 설교집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창세기11:31을 보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만일 여호수아24장의 이방신을 섬긴 문제가 데라와 아브라함과의 차이라면, 데라는 이방신을 섬겼고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갈등이 있었다면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최초의 싸움은 누구와 누구의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데라와 아브라함의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의 주도권이 누구입니까? 데라입니다.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는 일에 주도권을 잡고 여행을 출발시킵니다. 누구와 누가 최소한 같은 편입니까? 데라와 아브라함이 같은 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향해서 가는 이 여행이 아브라함이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출발된 여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7장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있기 전,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서

 

무슨 하나님이라고 여기서 기록하고 있습니까?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7:3). 그러면 그것이 여호와를 믿는 아브라함과 여호와를 믿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자기 친척 집을 떠나는 싸움이라면, 그 집과 혈연을 깨고서라도 믿음을 지켜야 되는 싸움이라면, 아브라함은 일단 데라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브라함과 데라가 한 마음이었다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도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여호와를 까맣게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동일한 우리 수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꿈속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비몽사몽간에 금빛 찬란한 광채 속에 어떤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감히 형상을 이룰 수가 없고 감히 뭐라고 말대꾸를 할 수 없는 영광의 어떤 신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창조주요, 너를 지목한 신이다. 내가 네게 복을 주려고 하니까 너는 네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고는 잠이 깼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 여호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 환상을 보았으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창세기22장에 나오는 이삭을 바치는 사건 같이 이야기가 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생전 처음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그가 그 일을 처리하겠습니까? 목사님을 찾아간다, 교수를 찾아 간다. 친구를 찾아간다? 그런데 그때 의논할 최소의 대상은 아버지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에게 여쭈어 보았을 것입니다. “아버님, 간밤에 저는 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광채와 빛난 영광 속에 어떤 신이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복을 주려고 하니까 너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아버님,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데라가 가만히 그 말을 들어보니까 그 말을 하는데 아들이 땀을 뚝뚝 흘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너무 진지하고, 너무 두려워하며, 너무 굉장한 표정의 자세입니다. 데라는 아! 내 아들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생기긴 생겼구나. 무슨 이상한 환상을 보긴 보았구나. 최소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방 신이라도 섬기는 종교심이 있는 자니까 그렇게까지 찾아오고 나타난 신에 대하여 거부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에 대해서는 아니까 그의 말을 일단 듣자. 그래서 아버지가 주동이 되어서 아버지의 명령권이 해당되는 혈연들만 모아서 길을 떠나게 되지 않았나? 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갈대아란 그 시대의 문명권이고 나라이름입니다. 하란은 갈대아문명의 최 변방입니다. 우리나라로 이야기하자면 만주로 가라그래서 어디까지 간 셈인가 하면 신의주까지 간 것입니다. 거기서 차마 못 넘어 갑니다. 왜 못 넘어가느냐 이유가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사회에서는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국가도 아니고 법도 아닙니다. 자기방어를 자기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을 데라와 롯과 아브라함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발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자기목숨과 재산을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데라도 아브라함도 넘어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정도의 환상을 가지고 자기 문명권을 벗어나서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재산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곳에 발을 디딜 수 없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일 단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억지로 떠밀려서 하란까지 온 것입니다. 안 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최소한의 종교적인 겁을 먹은 이유로 하란까지 겨우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된 상황을 성경은 우리에게 설명을 합니다. 하란까지 아브라함 일행을 인도한 jr'T,/데라의 이름은 지연시킨다는 뜻입니다. 내일내일 하는 사람입니다. 데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도움을 받기보다는 더 많이 방해를 받았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데라와 아브라함 간에 신앙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똑같습니다. 결국 데라는 하란에서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데라가 145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좋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가 칠십오세였더라

 

아브라함이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길게 이야기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이제 우리가 갖고 있던 편견과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복과 한 사람의 결과를 그 사람에게 원인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습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보다는 아브람은 그렇게 될 이유가 그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꼭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놈의 그릇론 그 사람은 큰 그릇이야? 그러니까 저렇게 큰 교회를 하지. 그릇이 커서 큰 교회를 하는 사람들이 비리와 불의의 큰 그릇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갈등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있는가? 내가 이 꼴인데도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인가? 내가 이 꼴로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남에게 해도 좋단 말인가? 이 질문의 뒤에 있는 가장 큰 불신앙이 무엇입니까? 복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법이다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도를 하루에 12시간하고, 금식기도를 40일해야 복받는다 하는 것은 세상종교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심을 내시는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을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신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우리로서는 mistery입니다.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같이 이야기 하신 것을 고집하신다면 구원문제가 일단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앉아 있을만한 조건이 여러분에게 있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 있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여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서는 더더욱 깊이 더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왜곡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에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성경의 메시지가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얻는가?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아브라함의 생애를 놓고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일 수밖에 없다고 조건을 달고 싶어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매우 좌절시키는데도.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믿으셔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은 이것입니다. 좌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좌절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과 절망하는 것과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구원자체가 내가 요구하거나 내가 무엇을 내거나 내가 협의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내가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는 말은 왜 하는지 아십니까?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만이 저가 구원을 얻었다는 표시를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구원 얻었기 때문에 말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제가 예수를 믿거든요이렇게 말을 하면 그것이 조건으로 쓰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들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는 이렇게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무언지 몰라서 이집 저집 찾아다니면서 이런 꿈꾸어 보신 분 있습니까? 이런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몹시 당황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을 듣고 보니까 가야 할 것 같네. 안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 원인도 조건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란까지 밀어내셨고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또 밀어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비 집을 떠나 하란에 들어왔고, 가나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강 저편에 거할 때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리로 가라고 했을 때 어리둥절해 하며 어쩔 줄 모르는 그를 계속 등을 밀어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란에 왔습니다. 데라는 더는 가지 않겠다고 해서 아브라함만 또 등을 밀어내셔서 가나안에 들어옵니다. 12:5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 마침내는 하나님께 씨야 할 마침내입니까, 아브라함 쪽에서 써야 할 마침내입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마침내 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토 친척 집을 떠난 여행이라면 그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따라 드디어 가라는 곳까지 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마침내는 하나님이 쓰서야 됩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모르니까 끌고 밀고 해서 드디어 힘들게 가나안까지 끌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의 마침내 라는 가장 대표적인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하란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라면 하란에서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란에서 특별히 쉬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란에서 생각건대 상당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하란에 거하기 전이라고 해서 그 기간을 특별히 한 기간으로 설정하고 그 여행을 설명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이 땅에 있기 전 그리고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라고 지적을 함으로써 하란에서 상당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하란에 있었던 것이 아브라함이 그의 신앙으로 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던 방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순종치 않은 결과라는 것을 또 하나 확인하기 위해서 하란에서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야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시고 하란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나셔서 다시 권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비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 맨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가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12:1-3에서 아브라함이 신앙으로 출발했습니까? 아니면 불신앙으로 출발했습니까?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길게 논증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불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이어야만 여러분과 제가 믿는 이 구원이 복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영웅 아브라함, 신앙의 위인 아브라함만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없는 신앙의 영웅을 만들어서 고생하는 꼴이 됩니다. 이에서 우리가 벗어나십시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대가로 구원을 받는다면 바리새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세리와 같이 성전에 올라가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저 세리같이 만들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저 세리와 다른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내고 구제하고 기도합니다.”(18:9-14). 이것이 아브라함처럼 복 받는 근본이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기준이라면, 우린 아직도 죄가 무엇이며, 죄 값으로 사망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이 인간이 구원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출발합니다. 그는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까지 인도해 오시고, 강권하시며, 그러고도 모자라서 목을 매고 끌고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쩔 수 없이 오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하나님께 끌려온 것입니다. 사각 링의 홍corner로 몰아넣으시고, 너 가나안 갈래, 안 갈래 하시면서 항복을 받아내시고는 가나안에 아브라함을 마침내 끌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괜히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내가 걸어오거나 하나님 앞에 내가졌습니다.”라고 한 번도 합의한 적이 없습니다. 뭐 하러 예수를 믿는데. 예수 믿으면 갑자기 어떻게 된대. 우리가 손과 발로만 버티지 않았습니다. 온 몸을 다하여 버티고 버텼습니다. 한 번도 합의하거나 한 번도 동조한 적이 없는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리가 한 일은 거부요, 반항이며, 미련한 짓이요, 아우성과 헛소리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수 들 뿐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신다면 아브라함의 이 인생의 시작을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출발하시는, 그래서 우리 앞에 내어 놓으시는 말씀 앞에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하나 더 풀어봅시다. 히브리서11:8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 설명을 하기 위해서 믿음이 등장합니다. 믿음은 자신이 자신을 설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란 말을 잘 씁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톤을 높이고 박자를 맞춰서 믿는다고 껑충껑충 뛴다고 해서 마음속에 믿음을 의지하는 강한 신앙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몽롱하고 혼란만 가중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자기 최면을 건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믿음이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면서 결재도장을 다 찍어서 올립니다.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작업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설득당해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이전에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손에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아브라함 생애에서 하나님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이 생각되어지죠?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작정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성령님께서 주 예수님의 구원을 개인들에게 적용하십니다. 성령님은 사람들로 주 예수님을 믿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를 구주로 믿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믿는 자들을 끝까지 믿음에 머물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느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드시느냐 하는 싸움이 아브라함 생애에서 우리가 추적해야 될 가장 중요한 message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우리의 여기가 어디쯤 될까요? 가나안에 막 들어왔을 겁니다. 가나안에 막 들어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들을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이 되는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설득입니다.

우리가 지금 와 있는 수준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당황해 하지 맙시다. 전주를 떠난 서울행열차를 타시면 그때부터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무얼 하십니까? “어디까지 왔나?”하고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시계만 보시면 됩니다. “어디쯤 왔겠구나시간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 손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기관사가 서울까지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울행열차를 타고서 이 차가 부산으로 가면 어떡하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평양으로 가는 것 아니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울행 열차를 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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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불안한 사람들

창세기50:15-21 2021.4.25

 

화해(和解, conciliation)는 소송에 갈음하는 분쟁해결제도로 당사자가 상호 양보하여 그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을 그만둘 것을 약정함으로 성립되는 계약입니다. 서로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애는 것이 화해입니다. 그러나 화해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지 않고, 제3자나 언론에 화해했다고 하는 것은 화해가 아닙니다. 피해자가 납득할 만큼 충분하게 용서를 빌어야 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해야 진정한 화해입니다. 또한 왜구처럼 화해해서는 안 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와 더불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왜구는 미국에만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Asia 사람들에게는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소련과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전초병으로 왜구를 전방에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Asia의 여러 국가에게 악독하고 잔인하며 추악한 짓들을 했어도 전범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기고만장한 왜구는 Asia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지랄발광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왜구는 Asia인들에게 입힌 악독한 피해보상을 충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도 늘 잘못했다고 빌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에서 요구하는 배상액과 보상을 충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교과서를 고치고, 전범의 뼈 조각이 합사된 야스쿠니인가 개스쿠니인가를 폭파해야 합니다. 이어서 매일 총리와 천황이라는 자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나라를 향하여 잘못했다고 99번씩 엎드려 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화해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있어서 도단사건(37:18-28)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왜 그랬을까? 뼈저리게 후회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고 사랑하는 동생을 노예로 팔았다는 것이 매우 후회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된 동생의 현재 돌봄을 받고 있을수록 더욱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동생에게 엎드리게 된다는 꿈 때문에 동생을 팔았다는 것이 지금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밤마다 악몽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셉이 가만두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 납작 엎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한사람을 요셉에게 대표자로 파견합니다. 아마도 이 대표자는 베냐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명령을 상기하게 했습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형들은 형제라는 사이를 벗어나서 주종관계로 요셉을 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이 말을 들은 요셉은 기가 막혔습니다. 자신은 분명히 용서했는데, 형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한 점을 분명하게 확신시켜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요셉이 가슴아파했던 것은 자기로서는 마음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45:1-15을 보면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형들은 여전히 자기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혔을 때의 말을 되풀이합니다(45:7-8).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끄셔서 모든 악을 좋게 바꾸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제넘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판관과 복수할 자 노릇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들까지 보살피셨다고 말합니다.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함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부양하겠다고 간곡한 말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두려워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셉을 동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통치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의 주가 아니라 형들로 여기며 간곡한 말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성도여러분! 15-18절을 보면 형들의 죄책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요셉이 그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19-21절에 볼 수 있습니다. 형들은 미래가 불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을 계속돌보겠다고 했습니다. 형들은 아직 도단사건의 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15-17). 요셉이 그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보증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그 보증이 여전히 유효한지를 자신하지 못했습니다. 형들은 불안했습니다. 과거의 죄책이 이렇게 자신들을 괴롭힐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진공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전제하는 믿음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6:23을 보면 죄에 대한 대가 즉 보수가 나옵니다. 죄에 대한 보수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삯/ojywvnia이란 군인들의 급여였습니다. 죄가 봉급을 지불한다는 점입니다. 죄가 지불하고 제공하는 생계(subsistence)는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죄가, 죄를 위하여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한 자들에게 지불하는 식량입니다. 생명을 위해 지급된 식량들이 받아보니 죽음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속이는 것입니다. 죄는 생명을 약속하면서 결과는 죽음을 줍니다. 문제는 죄의 삯이 한번만 지급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죽음을 급료로 지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이 있는데 예수 우리주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입니다. 구원은 무엇보다도 죄의 더러움과 권능 그리고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심판에서 살 길입니다.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필수 불가결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상실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죄인들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메시지입니다. 믿음과 회개의 요구에 복음만이 그 유일한 대책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거절한다는 것은 알량한 지식 때문에 자신을 영원한 죽음으로 걸어가는 무모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살아 있을 때는 요셉의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자 이제 요셉의 복수가 있을 것이라는 죄책감이 엄습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그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책으로 번민합니까?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한속도 시속 90km의 카메라 앞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100km나 110km이상을 달렸다면 속도제한을 위반했으니 그에 상당한 범칙금을 내라고 통보가 올 것입니다. 돈으로 막아야 합니다. 속도제한은 돈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사람들은 복음으로 막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심판과 정죄의 사역이 없다면, 값없고 주권적인 은혜의 복음이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우리가 죄인이라고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끝이 난다면 굳이 어렵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교회설립이 필요 없고 나아가 예수그리스도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그런데 심판과 정죄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가 있기 때문에 죄를 자각해야 하고 은혜의 복음에 호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우리들을 복음은 값없는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초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면서도 안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습적으로 자신들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와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려고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들 조상을 쭉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김없이 아담의 자손인데 듣지 않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바벨탑을 쌓고 못된 것을 섬겼었던 자손들인데 듣지 않습니다.

 

교회라고 다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가 합해져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를 이야기하고 윤리구원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구원론이고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두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그들의 행동은 나무 뒤에 숨은 것입니다. 인간편의 어떤 행위도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짐승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 짐승은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어떤 action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사람들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행위의 구원이 기준은 없습니다. 내가 무릎으로 걸어서 세계 일주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나 하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구원의 기준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이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사실 인간들의 범죄로 인해서 이 세상은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인간타락의 직접적 결과들은 먼저 인간 내부적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내부적 혁명의 중심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변화된 태도였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3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정신적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된 원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최상의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합니다. 성벽과 느낌과 감정의 새로운 복합체가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수치와 두려움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범죄 한 양심과 빛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의 혁명입니다. 죄는 우리의 정신적 태도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분열을 초래하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호의로부터 분리시키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주적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의 영적 영역에서의 사건입니다. 죄는 영에서 발생하여 영에 존재합니다. 죄는 육체적 세계에서의 혼돈이 아니며, 육체적상태의 불균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의 영역에서의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이고 비영적인 것에 철저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는 우주적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3:17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땅은 계속 파괴되어 갈 것입니다.

 

죄는 인간 가족에게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죄는 아담에게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인류라는 유기체 전체에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적 부패가 존재합니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아담의 가족사의 전개에서 죄악들의 목록입니다. 시기, 악의, 증오, 살인, 일부다처제, 폭력이 가인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자신의 구성에 있어서의 분열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창세기5장에서 공시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장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경고가 성취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늘 입증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왜 미래에 대해서 불안했습니까? 아버지 야곱이 있을 때는 울타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 울타리가 없어지니까 요셉의 복수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서도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사역을 할 때 설교말미에 꼭 구원받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선교사가 물어볼 때마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상담하고 또 상담하고는 했습니다. 왜 계속 손을 듭니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미래가 불안한 것입니다.

로마서3:10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온 인류를 통틀어 과거현재미래를 막론하고,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곧 로마서3:23로 이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을 뵈워야 하는데 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의인도 아니고 죄를 범한 사람들입니다. 죄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로마서6:23을 보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사람은 한번 죽을 수 있고, 두 번 죽을 수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육신의 죽음으로 영혼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두 번 죽는 것은 영혼과 육신이 살아났다가 영원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죽음이라고 했을 때는 영원한 끝없는 죽음을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아찔합니다. 지옥은 로맨틱한 곳이 아닙니다. 불가마같이 사람이 건강을 위해서 견딜만한 곳이 아닙니다. 혹독한 추위와 쇠를 녹이는 불이 공존하면서도 죽지 못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영하100°영상1500°가 공존하고 있으면서도 죽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들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차마 보시지 못하셨습니다. 로마서5:8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3:16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저 곧 보내지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이 없고 대신 영원히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12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죄인이다. 죄인은 죽어야 한다. 죽어도 영원히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셨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롭고 간단한 것을 몰라서 지옥에 가야겠다고 하고, 어디에도 없는 극락에 가야겠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번 구원을 받으면 다시는 잃지 않는 구원입니다. 오늘 구원받았다가 내일 모레 글피에 잃어지는 구원이 아닙니다. 요한일서5:13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들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2:7).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계2:11).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2:17). 새벽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2:28). 흰옷을 입히고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으시고 천사들과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계3:5).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계3:12).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더불어 같이 먹을 것이라 하셨습니다(계3:21).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내가 어떤 종교를 믿었는데 죽었을 때 자동으로 지옥에 가게 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를 보낸 사람들은 그가 극락에 있을 줄 알았는데. 죽은 자가 말도 못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럴 리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천국에 갈 확신이 없다면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요셉이 불안해서 떨고 있는 형들에게 말합니다. 당신과 당신들의 자녀를 돌보겠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한번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영생한다고. 그러므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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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창세기1:1-5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水星입니다. 수성은 대기층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수성은 지구보다 7배나 많은 태양열을 176일 동안이나 같은 면에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태양광선이 수직으로 쬐는 지점의 온도는 347℃나 됩니다. 그러나 밤엔 영하 170도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공기층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양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별이 金星입니다. 수성은 지구보다 3배나 작은 데 비해 금성은 지구와 체적이 비슷합니다. 금성의 기온은 약 480℃도입니다. 금성 표면은 아주 뜨겁고 건조합니다.

지구에서 벗어난 火星 역시 대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교차가 매우 큽니다. 태양빛을 수직으로 받는 적도 지방에서 낮에는 25℃ 정도이지만 저녁에는 -85℃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성의 평균온도는 -60℃ 정도입니다.

따라서 수성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금성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화성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木星에서도, 土星에서도, 天王星, 海王星, 冥王星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어떤 별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춥고 더운 지역이 있지만, 그 나름대로 모두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별입니다. 그래서 외계에서 온 UFO를 봤다고 하지만, 쓸데없는 망상에 불과합니다. 외계에는 생명체가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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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I.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1).

말도 안 되는 우주의 기원설이 Big-Bang 이론입니다. 빅뱅이론은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모든 은하가 한 곳에 모이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그 순간을 ‘태초’라는 것입니다. 그 때 우주는 밀도가 엄청나게 크고 무지막지하게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주의 모든 물질이 한 점에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빅뱅 우주론은 그 상태에서 ‘큰 빵’하고 대폭발을 일으켜 팽창우주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양도 나오고 달도 나왔으며, 지구도 그리고 모든 별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지구가 고온의 가스덩어리에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고온기원설(高溫起源說)이 있고, 태양을 둘러싼 두터운 가스와 우주먼지로 형성되었다는 저온기원설이 있습니다. 상상하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론들을 들고 나와서 발표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이론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그 이론들을 사람들이 믿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죄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지식은 어리석은 지식입니다. 가장 좋은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저들의 말대로라면, 모든 별들에 생물이 살아야 합니다. 화성에서도 목성에서도 수성에서도 생물들이 살아야 합니다. 특히 지구의 위성인 달에서는 최소한 생물들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별에서도 생명체가 살 수 없습니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달에도 생명체가 없습니다. 낮에는 250℃까지 올라가고, 밤에는 -120℃까지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제외한 별들은 대기층이 없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높아지고, 밤에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공기층이 80km나 됩니다.

이 공기층과 태양과의 적당한 거리에 지구가 있기 때문에 생물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지구만 유독 태양과의 거리가 적당한 거리일까요? 이것은 천문학적으로도, 우연발생설도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더라도 터무니없는 가설이기 때문에 믿을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세계가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심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은 우연입니다. 그들의 신은 자연입니다. 그들의 신은 밝혀지지 않은 과학입니다. 그들의 신은 세상입니다. 그들의 신은 마귀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하나님을 잊으려 한 것입니다.

창세기1:1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면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 창세기 논증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쓸데없는데 마음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피조물들에게 집착합니다. 그들은 자연을 사고하면서 찬양하는 데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서,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그렇다고 시인하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다른 소리를 합니다. 우연히 이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빵”하는 폭발음과 함께 우주가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만 동물들에게 필요한 산소가 있을까요? 왜 식물들에게 필요한 이산화탄소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빅뱅이론자들은 은하가 폭발해서 우주가 형성되었다고 했는데, 그 은하계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연히 은하계가 생겼습니까? Big-Bang 理論者들은 참 편리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니 말입니다. 그래서 과학도 일종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우연히’라는 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들의 신은 ‘우연히’입니다. 매우 잘못된 신입니다.

성도여러분, 창세기 1장1절이 믿어져야 성도입니다. 믿음(hn:Wma>; pivsti")은 하나님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출애굽기17:12을 보면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아론과 훌이 바치고 있는 한 모세의 손이 내려올 리가 없습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패하기 때문에 아론과 훌이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이 때 내려오지 않았다는 말을 “에무나”라 합니다. 신명기 32:4절을 보면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하나님은 진실(에무나)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로서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신 저신 중에 골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꼭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보는 이 꽃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창조주를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을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의 삶에 날개를 달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전망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날마다 솟아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2절에서 5절을 보면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II.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2-5).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이 말은 merism입니다. 하늘과 땅은 온 우주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연히 생겨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주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처음에 만드신 땅은 혼돈하고 무형적이고 무생명적이었습니다. 어떤 형체가 없었습니다.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보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태초의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태초의 혼돈한 물덩어리 위로 성령께서 운행하셨습니다(토브성경). 성령께서 혼돈한 상태를 안정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만드신 세상에 활기를 넣으시려 하셨습니다. 성령은 혼돈한 세상을 품으셨습니다.

3절을 보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yhila> rm,aYow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천지의 덩어리를 창조하신 것처럼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1: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이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없던 것이 생겼습니다. 있던 것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태초에 세계에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피조물들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시8:1). 세계의 피조물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들은 존재하는 사물들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에 처음 창조된 것은 빛들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r/a yhiy]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왜 빛을 먼저 창조하셨습니까? 빛은 모든 생물의 필요불가결한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빛에서 나오는 에너지나 온기로 말미암아 우주가 움직이고 식물이나 동물이 생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양을 만들기 전에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넷째 날에 만드신 태양으로 하여금 그 빛을 대체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태양이 없어도 빛을 비추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는 명령이 있자 어두운 혼돈과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빛을 좋다고 인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빛(r/a)과 어두움(&v,j)을 분리하셨습니다. 빛을 낮(!/y)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움을 밤(lyIl')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때쯤 우리들 머리에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넷째 날에 되어진 일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교체는 혼돈된 흑암덩어리가 회전하기 시작하자마자 생겼습니다. 이것은 태양계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은 잠간 동안에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이 세상에 차례로 채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원동력이신 빛을 만드셨습니다. 우주 어딘가에 빛의 재료가 있어서 그것을 끌어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그 능력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는 무엇이든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의지가 있자 폭풍이 멈추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의지가 있자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불치병인 소경의 눈을 여셨습니다. 창조주인 예수님이 이미 죽은 자를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수고 없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창조주를 우리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을 하시라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을 말씀한마디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재벌중의 재벌, 왕 중의 왕이신 분을 우리는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왕의 아들인데 마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틀을 깨 버립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 문을 통과하는 즉시 듣지 않거나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아로 살아가거나, 노숙자이거나, 종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창조주를 모시고 살면서 새롭게 태어납시다. 있게 하시는 말씀대로 우리가 살도록 합시다. 하나님께 우리가 기회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께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에 심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사야7장을 보면 한심한 왕이 있습니다. 아하스왕입니다. 당시의 주변 상황이 아하스를 심히 두렵게 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했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아하스는 사시나무 떨듯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서 나만 믿으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멀리에 있는 앗수르와 동맹하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유다는 앗수르에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누가복음5:18-19절을 보면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 채 메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옥상에서 지붕을 뜯고서 예수님계시는 곳에 중풍병자를 달아내렸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이 사람의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죄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약점은 하나님께 일하실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일하실 기회를 주시기만 하면 분명히 우리들의 생애가 놀랍게 번하게 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일하실 기회를 제거하는 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적은 것부터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러스킨은 “하나님께 이등석을 주는 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고, 교회가 원하는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그것이 좀 힘들고, 고달파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는 행복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교회가 작고 보잘것없어도 우리 성도들이 사람 많은 교회보다 믿음이 크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작지만 목회자인 저를 중심해서 하나님께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작지만 누구보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께 일하실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절대로 성도 여러분의 고집대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꼭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창조주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여러분의 일들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일 때에 우리들의 교회를 지키시고, 여러분의 가정에 은혜를 내리십니다. 기억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에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일하실 기회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하실 기회를 하나님께 드려서 은혜를 계속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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