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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7.30
    예루살렘교회가 선택한 사람들
  2. 2020.01.18
    예수님의 명령

사도행전6:1-6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서 자꾸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잘될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어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남북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념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분열 현상이 뚜렷합니다. 지도를 그려놓고 색칠하라 하면 망설이지 않고 색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통일이라는 말까지 하지만, 좋은 일들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큰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힘입니다.

 

복음의 전파는 예루살렘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유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님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120명에서 시작되어 한 번에 3000명이 더해졌습니다(2:41). 이어서 5000명이 또 더해졌습니다(4:4). 숫자상으로 812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이스라엘 숫자의 헤아림법입니다. 남자 20세이상 50세 미만의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 성도의 정확한 숫자는 8120명의 두 배 일지, 다섯 배 일지, 더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토록 예루살렘교회가 갑자기 확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폭발적인 확장에는 그 배경이 성령님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성장의 배경에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먼저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루살렘교회가 폭발적으로 확장한 배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복음 전파의 기반 다지기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수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수천 명이 여기저기서 모였습니다. 12 명의 사도들로서는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鼓舞的인 현상과 함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Hellenists or Grecian Jews)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파는 대부분 팔레스타인 태생입니다.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Greece-Roma의 각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Hella어를 사용했습니다. 유대 사회 내에서 이 히브리파와 헬라파 유대인들 간에는 갑자기 어떤 긴장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긴장 관계가 예수님을 Messiah로 인정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문제는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이 헌납한 공동 재산으로 가난한 성도들에게 매일 구제금을 할당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한쪽에만 이익이 많이 돌아간다는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과부중에서, 헬라파 과부들은 히브리파에 비하여 덜 혜택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히브리파 사람들이 구제금 나누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를 불평 없이 돌보는 직책을 만들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서 교회는 앞으로 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도들이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봉사하랴, 말씀을 전하랴, 기도하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제일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말씀을 전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이 소홀해졌습니다. 이 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일들이 자기들의 일평생 전부를 분주하게 만들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제일 중요한 일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전심을 다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고, 연구해야 하며, 이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흔히 설교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왜 목사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하나님입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습니다. 목사로서 제일의 필수조건은 말씀 연구입니다. 설교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에서 소홀해지면 성도들에게 죄송해집니다.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일들을 처리하려고 사도들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사도와 제자라는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사도ajpovstolo"/apôstolos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 Hella어에서 처음에 해양언어였습니다.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것을 교회에서 차용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3:1), 교회가 보낸 사자(고후8:25), 야고보(1:19) 그리고 바나바(14:4)에게도 적용된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도란 열두 사도와 바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사도라는 호칭과 직위는 승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직은 초대교회 당시의 독특한 상황의 요청하여 생겨난 단회적이었습니다.

제자 maqhthv"/mathtês배우는 자, 생도라는 뜻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서신서에서는 형제혹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영적 사업과 물질적 구제사업 모두를 중요시했습니다. 구제 사업상의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사도들은 이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결정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란 어떤 틀(frame) 속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실제적인 필요에 대응하여 성경적인 방향으로 꾸준히 개최되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께 부름받은 성별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다른 것과 달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거룩한 신앙 공동체로서의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교회)입니다. 또한 거룩한 공동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정한 장소를 보이는 교회(유형교회)입니다. 구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 경배하고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경건하게 서 있는 구속된 공동체입니다. 신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Messiah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권위 있는 교리의 교사들로서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열두 사도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교제인 동시에 장로들의 지도 아래에 있는 지역 회중들의 전 세계적인 조직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사도들은 제자들에게 open 했습니다. 공궤 할 사람을 따로 택하자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는 집사를 세울 때 몇 가지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든든한 사람입니다. 이때는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든든한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오면 그만 주춤해 버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사나 교회의 직분을 맡을 사람은 먼저 믿음이 든든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규교육을 교회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세상 교육기관에서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과 지식이 상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지혜가 충만해야 했습니다. 미묘한 상황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했습니다. 구제를 관장할 능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혜로워야 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할 줄을 알아야 했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으려면 반드시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거짓 선지자, 거짓 스승, 사이비 지도자, 못된 장로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서 순진한 교인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혜로웠습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해야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 의도대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로 믿음과 신념을 굳이 구분한다면, 언뜻 들으면 신념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념은 너무 자신을 믿은 맹신입니다. 예를 들면 운전자가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운전 판단과 대처가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대리운전자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맹신하는 신념은 끝끝내 자신을 믿습니다. “나의 신념 괜찮다. 나의 신념 운전경력이 몇 년인데. 나의 신념 이 정도는 문제없어.”라고 음주운전을 하는 것이 신념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합니다.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공략하는데 작전회의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을 돌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기드온이 전쟁 소집 나팔을 불었을 때, 3,2000명이 모였습니다(7: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적군의 숫자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7:12)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 말씀대로 2,20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9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전부 3,1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300명입니다. 전투편제 비교를 해보니 메뚜기의 중다함+약대의 무수함+ 해변의 모래처럼 수다함 대 300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입니까?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 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법도 잘지키고, 남에게 잘하며,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고,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자들입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도들끼리 뭉쳐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전을 형성해 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성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잡음 없이 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과도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하나님하고만 잘할 거야.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하나님하고만 좋으면 되지 뭐.”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충성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것입니까? 사도들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칭찬 듣는(marturoumevnou")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으로 되었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다 잘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선택된 사람들은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봉사직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목회 일선에서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성도들로부터 좋은 평판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잡음 없이 처리해야 했습니다.

사도들은 이와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 일곱을 뽑아 안수했습니다. 사도들은 일곱 사람을 택한 후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일곱 사람을 세운 것은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에게 직무를 맡긴 것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직무를 맡긴 것은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는 손을 얹는 행위가 축복할 때였습니다(48:13).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과 대상물 사이의 동일성을 표현할 때 손을 얹었습니다(1:4;3:2;4:4:6:21). 후계자를 세울 때 손을 얹었습니다(27:23). 미쉬나(Sanhedrin iv. 4)에 의하면 안수를 통하여 산헤드린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열 두 사도가 일곱 집사에게 특수한 임무를 맡겨서 자기들에게 가담시킨다는 의미의 안수였습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일곱 사람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세워진 사람은 Stevfano" 스데반, Fivlippo" 빌립, Provcoro" 브로고로, Nikavnwr 니가노르, Tivmwn 디몬, Parmena'" 바메나, Nikovlao" 니골라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일곱을 집사”(deacons)라고 불렀습니다. 여러 교파에서 집사는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대목에서는 집사라는 말의 어원인 헬라어 명사 diakonos를 쓰지 않았습니다. diakonos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diakonia가 쓰였습니다. 2절의 일삼는diakonei'n ‘섬기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diakoniva는 매일의 구제(1)말씀 전하는 것”(4th'/ diakoniva tou' lovgou)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 명은 기능면에서 볼 때, 집사보다는 헌금 분배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날의 세계는 지도자 부족 현상이 심각합니다. 국가나 교회나 우리 사회에 지도자 부재로 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끔찍한 핵무기공장이 건설되고, 인권은 광범위하게 침해받고 있으며, 환경과 에너지의 위기,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비참한 장기적 실업, 산업 간의 마찰의 지속(노사간), 인종 분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존속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가정의 안정을 위협하는 압력들, 의 전통이나 성에 따른 역할에 도전, 그리고 인구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면으로는 만연하는 물질 지상주의와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상실이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제 세계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것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기술적인 지식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현명한 지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현대인들은 혼란에 빠지고 당혹해하며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유를 빌리자면 우리는 목자 없는 양 떼와 같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자들은 자주 장님을 데리고 다니는 장님 길잡이 같습니다.

소위 leadership에는 많은 종류와 수준이 있습니다. leadership은 세계적인 소수의 정치가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국가의 최고 관리층에 한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leadership은 어떠한 사회든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지역의 교회나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입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가정과 집에서의 지도자들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이 대학에서는 교수가 지도자입니다. 회사나 공장의 중역들, 판사들, 의사들, 정치가들, 사회사업가들, 공무원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갖습니다. 방송국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사람들-작가, 극작가, 저널리스트, 라디오, TV의 방송인들, 예술가와 프로듀서도 모두 지도자입니다. 세상은 이 모든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 더 안목 있고, 더욱 용기 있고 더 헌신적인 지도자들을 바랍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태어나기도 하고 길러지기도 합니다. 미국의 흑인 교육학자 Bennie E. Goodwin소질 있는 지도자들은 탄생하는 것이고, 효율적인 지도자들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Shakespeare의 유명한 시 구절에는 위대한 것을 두려워 말아라.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게 태어나지만, 어떤 이들은 위대함을 성취하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이 그냥 그들을 찾아오기도 한다.”라고 했습니다. 경영학 총서는 천부적인 지도자”(BNLs, bom natural leaders)에 관해 말합니다. 그들은 강한 智性과 개성, 그리고 인격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Oswald Sanders는 기독교적 leadership은 타고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 혹은 타고난 재주와 영적인 재능의 조화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와 잠재적인 leadership 모두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Closing 일반적인 leadership의 표지와 특별한 기독교적 leadership의 표지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시작하자고 부추기기 전에 우리 스스로 시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따를 만한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끈기있게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사도행전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명령  (0) 2020.01.18
And

예수님의 명령

사도행전1:1-5 

 

어느 나라든지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국정수반에 당선되면,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국정철학을 발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임이 했던 일들이 옳으면, 그것을 반드시 계승해야 합니다. 만일에 옳은데도 계승하지 않고, 무조건 헐고, 새롭게 세운다면 국가가 이상하게 되어 국민들이 힘들게 됩니다. 지난 정권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국정전반에 걸쳐서 수정을 할 시에 국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가 발전한다든지,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는 지속적으로 좋은 정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별로 알지도 못하면서 국민들의 가는 길을 막아설 때, 그 정책은 대단히 나쁜 정책입니다. 우리나라의 혹자들은 정권만 잡으면 무조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한 대화도 막아버리고, 국민 중 일부, 그것도 그러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철학도 없습니다. 따라서 국정철학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을 때 국민들이 엄청 고통을 당했습니다. 4대강공사라든지, 해외개발 사업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실익은 전혀 없으면서 마치 거대한 이익이 있는 것처럼, 과대포장을 했기 때문에 국가에 치명상을 입었음을 우리들이 아주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은 자신의 철학과 사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나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친구 데오빌로에게 그간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1절에서 3절을 보면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둘 다 데오빌로에게는 사람에게 써 보냈습니다(1:3,1:1). 과연 데오빌로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3에서 누가는 그를 데오빌로 각하”/Qeovfilo" kravtisto"라고 불렀습니다. 각하란 말을 쓰는 것을 보아 데오빌로는 로마정부의 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총독을 각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를 심히 박해했던 로마정부의 고관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런 사람에게 목적을 가지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누가는 기독교를 로마정부에 천거하고자 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여러 차례 반복하여 로마의 지방장관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3:12에서는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18:12에서 아가야 총독인 갈리오가 고린도 사건 때 철두철미하게 공평했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16:35절에서 빌립보의 관헌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후 바울에게 공개사과를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19:31절을 보면 에베소의 관현들이 바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기 전까지는 로마관헌들이 친하고 기독교에 대해 공정하고 공평한 태도를 취한 것을 여러 번 보여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누가는 기독교인들은 신령하고 충성스러운 국민이며 항상 그렇게 인정되어 왔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18:14절에서 총독 갈리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부정하거나 괴악한 일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19:37절에서 에베소의 서기장이 기독교인들에게 유리한 중언을 합니다. 23:29절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합니다. 25:25절에서 베스도는 바울이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같은 장소에서 만약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하지만 않았다면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 글을 기독교인들이 증오와 박해를 받을 때 썼으므로 로마 관헌들이 기독교에 대해 항상 공평하게 대했으며, 기독교인들을 악한 사람들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토록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바칠 수 있던 가장 고귀한 것인 예수님의 이야기라고 써서 헌정한 것입니다.

 

I.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1-3)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단어적인 차이로는 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ejn tw'/ aijw'ni touvtw//en tô aiȏni toûto)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 즉 오는 세상(ejn tw'/ mevllonti/en tô mêllonti)은 우리가 이 세상의 판단으로 죽었을 때의 세상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저 세상을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갑니다. 한번 저 세상으로 가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오지 못합니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는 절대로 올 수 없습니다. 저 세상에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은 불과 100년 안팎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육안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매우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 세상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직 이 세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는 모두 같이 있습니다. 가족과 같이 있고, 친지들과 같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 갈 때는 나누어져서 가게 됩니다. 그때는 내 마음대로 가지 못합니다. 선택사항(option)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라고 묻지 않습니다. 각각 분리되어서 automatic으로 갑니다. 저 세상에서 분리되는 기준은 사람들이 웃었겠지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안했느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기준은 없습니다. 선한 행동, 윤리적인 행동은 아예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도덕적인 행위이지 저 세상에서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저 세상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fact) 구약시대만 해도 오는 세상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해서 이 세상저 세상은 긴장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저 세상이 공존하는 세대로 변했습니다. 어떻게 공존하는 세대로 만들었습니까?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헌정(presentation) 했다고 했습니다.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누가가 먼저 쓴 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1:1-4절을 보면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써서 헌정한 복음이 누가복음인데 그 안에는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가르치심, 사도들을 택하시고 명하신 일, 그리고 승천하신 날까지를 기록했습니다. 즉 누가복음 안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부터 다시 가신 일까지가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까지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저 세상의 약속을 가져다주는 세상인데, 곧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심가르치심에서 출발합니다.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저 세상에서의 삶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지금 당장 미국을 우리에게 준다 해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한다면 물려야 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 사면령을 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화목하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이 저 세상의 능력을 체험하고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저 세상이 세상서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전체를 선물 받은 것보다 더 기뻐해야 할 사건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며,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3절에서 5절을 보면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는 조용하지만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데오빌로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II. 구원을 위해 제자들이 할 일(3-5)

 

프랑스사람들은 영어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프랑스어를 반드시 씁니다. 영국 사람들도 미국의 영어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국식 발음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미국식 영어에 죽습니다. 영어에 살고, 영어에 죽습니다. 어린쥐, 어미쥐 하면서 orange의 본토발음을 하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영어를 모른다고 해도 흉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모르면 흉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모른다고 해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습니다. 미국사람이나 영어를 잘해야지, 한국 사람이 영어를 미국사람보다 잘한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서울을 서울로 발음해야 하는데 서우-’로 발음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자국어를 왜 세계 공용어로 만들려고 합니까? 미국이 세계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식의 모든 것을 세계로 퍼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강제로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로 퍼뜨리려 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는 자발적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주전333년에 AlexanderHellas문화를 전 세계에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주전 60년에 Caesar는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그의 정치철학을 전 Roma제국에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NapoleonEurope을 제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HitlerMussolini(Benito Mussolini), 일본의 도조 같은 악한 자들이 세계제패를 하려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려고 한 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악한 발상들이었습니다. 무력적인 발상들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위험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실패해야 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패하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세계가 위험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Hitler나 일본의 흉악무도(凶惡無道)한 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전할 일이라면 우선 그 발상이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공정성이 있어야 하고, 인류를 살리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화(globalization)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것을 전한다 해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전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전할 사람들이 있다하더라도 전할 내용이 시원찮으면 전할 수가 없습니다. 전할 내용이 좋다하더라도 그것을 잘 전하지 못하면 역시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것들이 되고 세계화가 되려면 내용도 좋아야 하고, 전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상품(commodity)은 극상품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상품은 나라전체를 주고서라도 구해야 할 상품이었습니다. 현재 국제적인 최고의 상품은 석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상품은 그보다 더 좋은 상품이었습니다. 꼭 구해야 할 극상품입니다. 얼마나 좋은가? 저 세상에까지 소용되는 필요한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품은 이 세상에서 꼭 구해야 할 상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제품입니다. 누구도 이 상품을 만들지도 못하고 복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상품명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상품을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행해야 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예수님께 들었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14:26을 봅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보혜사입니다. 보혜사를 NIV성경에서는 CounselorNKJVHelper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ASV(미표준역)Darby성경은 Comforter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의 보혜사(comforter)란 단어는 Wycliffe(1320 1384)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Wycliffe시대 1300년에서 1400년경에 comforter란 단어는 Latin용감하다는 fortis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란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 넣 어 주시는 분입니다. 곧 하나님이신 성령이십니다. 제자들이 가져갈 상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만드시고 함께 하시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들은 그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어떤 사람이 물에 푹 잠기듯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지배받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은혜를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의식이었습니다.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세례는 실체였습니다.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전하는 제자들이나 전함을 받는 사람들에게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열정적(passionate)으로 전하면 되는데 왜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열정(passion)을 앞세우고 가면 되는데 왜 말리십니까? 무장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는 제자들이 나오자마자 잡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은 무력을 세워서 공격해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붙잡히지 않으면 그냥 나가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성령세례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마치 마력적인 체험을 하는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전도를 받는다든지, 우리의 사역의 대상에게 함께 하심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지, 특별한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받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의심했던 제자들에게 40일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믿도록 독려하셨습니다. 믿음을 확실히 갖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또 한분의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구원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망하지 않을 길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그는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지성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폐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들이 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첫 번째 명령을 받은 제자들도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위명령은 제2, 3, 4의 제자들이 계속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그 대위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약속하신 성령도 이미 우리는 받았습니다. 받은 그 은혜를 우리는 사장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할 일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많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과 우리 중, 우리가 주체(main body)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체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돕는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대위명령에 임해야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내가 부흥시켜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은퇴한 신자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일광욕을 즐기듯이 교회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야성(wild)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모여야 합니다.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모여야 합니다. 부지런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님께로부터 들은 성령님과 함께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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