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에 해당되는 글 2건
- 2020.03.14
- 2019.12.23
제2문: 당신이 이런 위로 가운데서 살고 죽을 수 있기 위해서 몇 가지를 알아야 합니까?
대답 : 그것은 다음의 3가집니다. 첫째,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하며, 둘째, 이런 나의 죄와 비참에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셋째,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주인(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50:14,15, 마태복음5:16,9:12,11:29-30, 에베소서5:8, 요한복음9:41,17:3,사도행전4:12,10:43, 로마서3:10,7:24,25 에베소서5:10, 요한일서1:9,10,
마태복음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사도행전4:12 다른 이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로마서3: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요한일서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며,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해설] 요리문답서 두 번째 물음은 이 책에 담고 있는 가르침의 의의와 의도와 계획을 밝혀 주었다. 유일한 위로를 받아들이고, 그러한 위로로부터 살고 죽을 수 있기 위하여 알아야 할 내용이 위의 3가지임을 밝혀주었다. 이러한 위로를 발견케 하기 위해서 이성적 차원의 인식작용으로 이해하는 일(배우는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제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의 교리를 배워야하는 필요성과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엡4:13-14). 신앙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Tertulliān의 말(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처럼 반드시 믿음 안에서 배우는 일이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인간은 원래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스스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참 주인이 아닌 다른 주인인 우상을 섬기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구속의 주요 유일한 위로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한다. 그런 뜻에서 ‘믿음’ 즉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모든 것이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확실한 인식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일에 확실한 인식과 앎이 필요 되는데 이러한 앎의 방법을 위해서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서는 3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1. 죄와 실수로 인한 고난 속에 처한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하며,
2. 인간은 자신의 공로(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구원받게 되는 것이고,
3. 인간은 그러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러한 정황을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이 유일한 위로를 발견하는 길이요, 그 위로 안에서 기쁨으로 살고 또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임을 밝혀주고 있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제1문 (0) | 2020.01.25 |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0) | 2019.12.26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저술동기와 역사 (0) | 2019.12.23 |
저술동기와 역사
이 책은 1563년 독일 중남부지역의 고도(古都)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서 출판된 책이다. 원래 이 도시는 독일 팔쯔(Pfalz)지역의 수도였으며, 그 지방 성주였던 프리드리히3세의 후원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가 만들어졌다. Friedrich III(프리드리히3세/1463.1.17.-1525.5.5)는 독일의 작센 지방의 선제후(1486-1525년)로 있던 인물이다. 선제후(選帝侯)란 신성로마제국에서 1356년에 황금문서에 의하여 독일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이다. 선제후는 백작, 공작, 대공과 같이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위계상 신성로마제국의 봉건제후들 가운데 왕 또는 황제 다음이었다. 프리드리히3세는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마르틴 루터를 적극적으로 보호한 인물이다. 마르틴 루터의 신학에는 그다지 찬성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교황과 황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를 끝까지 보호했기 때문에 후대에 der Weise(The Wise) 현자(賢子) 또는 현명공(賢明公)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적자가 없고 서자들만 있었기에 사망 후 선제후 직위는 동생 요한이 물려받는다. 후임 작센 선제후 동생 요한 1세과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적극적으로 루터주의로 돌아섰기 때문에 작센 선제후령은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세력의 중심이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Heidelberg Katechismus는 1563년 독일 Heidelberg에서 출판되었다. Friedrich III세의 후원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Friedrich III세는 Heidelberg 요리문답서 작성에 최초의 후견자였다. Friedrich III세는 당시 개신교 출신의 아내를 맞이하였다(마르크 그래핀 마리아). 그녀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로 전향하였으며, 정부의 지도자가 된 후에 종교개혁 내면에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지했다. Luther파와 Calvin파 사이의 신앙교리에 관한 논쟁이었다. 첨예하게 맞서기도 하여 신앙고백의 논쟁을 중지하고 가르침의 통일과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꾀할 목적으로 Luther파와 개혁파교회 모두에게 유효한 연합적인 성격을 띤 신앙문답서를 만들게 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교회의 연합정신이 반영된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의 저자는 하이텔베르그 대학의 교리학 교수였던 Z. Ursinus이다. 그는 Philip Melanchthon이 있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남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등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과 대화했다. 제네바에서는 John Calvin을 사귀게 되었고 성만찬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Calvin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는 1561년 선제후 Friedrich III세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수로 불림을 받게 되는데, 처음에 설교자를 위한 훈련소 책임자로 있다가 1562년 동 대학의 교리학 교수가 되었다.
1562년 Friedrich와 정부는 모든 예배상황을 위해 지역 교회에 새로운 교회질서를 세우려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교리적 논쟁의 화해와 교회의 통일을 위해 신앙교육서를 만들게 하였고,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의 가르침을 이 책을 통하여 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기로 신앙의 책 집필을 Ursinus에게 위임시켰다. Ursinus는 323개의 질문과 대답으로 된 독일어로 만들어진 것과 108개의 문답인 라틴어로 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129개의 문답을 가진 요리문답서 원본은 라틴어의 번역본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 이러한 기획을 하이델베르그 교회의 신앙교육 위원회로부터 진지한 조언과 자문을 받아 수정, 개선하게 되었는데 이 일에 Friedrich 제후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자문위원회의 구성에서 중요역할을 했던 다른 신학자는 Caspar Olevianus이다. 그는 1536년 Trier에서 출생하였고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위그노파(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를 가리킴. 스위스사람을 뜻하는 독일어 아이트게놋세(Eidgenosse)의 프랑스어 식 사투리인 에뇨(Eignot)와 제네바의 동맹당 당수 브장송 위그(Bezanson/Besançon Hugues)의 성을 합친 것) 교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Roman-Catholic의 도시에서 개혁사상에 의한 설교가로 활동했는데 대주교의 군사적 힘에 의해 추방당하였고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바로 하이델베르그 지역 개혁파교회 목사로 취임하여 신앙교육서 작성에 교회를 대표하는 자문위원이 되었다. Friedrich와 교회 자문위원회는 종교개혁 시대에 나타난 여러 신앙교육서들과 Luther파의 신앙고백서 기도문 등을 참조하였으며 Calvin의 제네바 요리문답서(신앙고백서들은, ‘제네바요리문답(Geneva Catechismus, 1536/1541)’ ‘쮜리히신조(Zurich Consensus, 1549)’ ‘제네바신조(Geneva Consensus, 1552)’ 등이 있다)는 하이텔베르그 요리문답서가 탄생하는 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앙교육서의 내용(교리)과 교수 방법적으로 크게 힘입었다. 이러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1563년 1월 중에 여러 날 계속된 회의를 통하여 읽혀지고 의논되었으며 큰 수정 없이 승인되었다. 1563년 1월 19일에는 Friedrich의 머리말이 실린 책이 인쇄되었는데 ‘Friedrich 성주의 땅 팔즈 지역의 교회와 모든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요리문답서 또는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란 제목이었다. 그 아래에 성주의 글이 실렸다. 그 후 1563년 3월에 첫 견본들이 교회의 실제적 사용을 위하여 제공되었다.
요리문답서의 초판은 성만찬과 Roman-Catholic의 미사와 구별에 대한 가르침이 제80문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Olevianus의 권유로 Friedrich성주는 1563년 책의 새 출판에서 이 질문을 첨가하도록 권고했다. 이미 출간된 첫 해 동안에 요리문답서는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어 두 개의 라틴어로, 두 개의 화란어와 독일어로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약 2세기 안에 세계 각국의 모든 언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첫 판은 예배와 가정예배에서의 사용을 위한 ‘기도문’이란 부록을 달고 나왔는데 옛날 취리히와 제네바의 교회법 중 일부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요리문답서와 주기도문은 1563-1564년 겨울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인쇄되었으며 1563년 여름에 수정되고, 1564년 전국 지방교회의 예배에서 사용하도록 팔즈의 새 교회법에 명시하였다. 문답서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반복되는 주일예배 시에 낭독하게 하였고 또한 주일 오후예배에 매주 이 책이 몇 문항씩 신앙교리를 해설하는 설교내용으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학교공부와 유아세례자 입교반공부에서 사용함으로 재빨리 교회와 그의 구성원이 애독하는 신앙의 책으로 알려졌다.
반세기 후 30년 동안 진행된 종교전쟁으로 당시 팔쯔 지역이 다시 Roman-Catholic의 소유로 넘어 갔을 때 개혁파교회 목사들이 그 곳에서 쫓겨났고 여러 교회는 10년, 어떤 곳에서는 20년 이상 개혁교회가 지향했던 예배를 더 이상 행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팔즈의 많은 지역 주민들이 개신교 특히 개혁교회의 신앙을 존속하려고 가족예배에 이 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루드비히 14세가 새로 팔쯔지역을 점령했을 때와 그 후에 연이어 개신교지역교회에 온갖 압력이 가하여졌으나 개혁교회들은 이 책을 진귀한 보물처럼 귀히 여기고 보존했다. 요리문답서는 팔쯔를 넘어 재빠르고 비밀리에 다른 개혁파 교회에 전달되었다. 이미 1568년과 1571년에 그 신앙교육서는 화란의 개혁파 교회와 니더라인(Niederrhein)에 있는 독일교회에 전해졌고 얼마 후에는 헝가리와 현재 루마니아 북부 지방인 지벤뷔르겐과 폴란드 지역의 개혁교회까지 전수되었다. 이 밖에도 몇몇의 독일, 스위스교회에도 전해졌으며 베른(Bern)지역 교회들에서도 교회들이 자신들의 옛 신앙교육서들을 대신하여 이 책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화란 사람들이 이주해 갔거나 선교사로 갔던 북미와 남아프리카 등에서도 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가 신앙의 책으로 채택되어 사용되었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제2문 (0) | 2020.03.14 |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제1문 (0) | 2020.01.25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0) | 2019.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