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에서 해방됨(로마서8:3-16)
3 육신으로 말미암아…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6 육신의 생각은…영의 생각은…
7 육신의 생각은…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9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영에 있나니…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10 영은 의를 인하여…
11 살리신 이의 영이…그의 영으로…
12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15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8장에서는 육신과 영이 반복되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육신과 영은 무엇인가? 육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몸인가? 몸이라면 왜 몸을 따로 말했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10절). 이에 대하여 William Barclay는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바울사도가 두 단어 육(savrx/sârx/사르크스)과 영(pneu'ma/pneȗma/프뉴마)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록했는지를 알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savrx/sârx/사르크스)은 문자적으로는 육(肉)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단어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로마서2:28에서는 문자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육의 할례에 관하여 언급했는데 단순한 육체적 할례를 의미합니다. 또한 여러 번 반복하여 그는 카타 싸르카(kata; savrka)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는 ‘육을 따라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귀절은 사물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로써 바울은 아브라함이 ‘카타 싸르카’ 즉 육을 따라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카타 싸르카’ 즉 ‘육을 따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습니다(롬1:3). 곧 예수님은 그의 족보상 인간적인 면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카타 싸르카’의 친척이라고 말합니다(롬9:3). 그것은 인간적인 친척관계나 인간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유대인은 바울사도의 친척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카타 싸르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그가 인간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육(savrx/sârx/사르크스)의 독자적인 용법이 있습니다. 그가 크리스천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육 안에(ejn sarkiv/엔 사르키) 있었던 때에 관해 말합니다(롬7:5). 크리스천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반(反)하여 육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 관해 언급했습니다(롬8:4-5).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롬8:8). 그는 육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롬8:6,8). 사도바울은 육을 따라 삶에 관해 언급했습니다(롬8:12). 그의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다.”(롬 8:9)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육이라는 용어를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살과 피라고 할 때 쓰는 육이라는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육이라는 단어를 인간성의 모든 弱點(약점)과 無能(무능)과 無力(무력)을 의미하여 사용했습니다. 죄와 시험에 유약한 인간본성을 육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인간본성 중 죄 에게 기회와 교두보를 허락하는 부분을 육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동떨어진 죄악스러운 인간본성을 육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에 애착을 갖게 하는 모든 것을 육이라고 말합니다. 육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사랑으로 지배되는 생활을 하는 대신에 죄 많은 인간본성의 명령과 욕망으로 지배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육’ 즉 ‘싸르크’에 의해 지배되는 생을 사는 사람의 삶을 생각할 때 순전히 성적이고 육적인 죄악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적인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만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갈라디아서5:19-21에서 육체의 일을 나열했을 때 그는 육적이고 성적인 죄악을 포함하였습니다. 우상숭배, 증오, 분노, 분쟁, 이단, 시기, 살인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육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육이란 죄와 약함과 무력과 좌절감의 인간본성입니다. 육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없이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영(pneu'ma/pneȗma)이란 구약적배경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단어는 루아흐(j"Wr/rūah)입니다. 루아흐는 영이란 뜻만이 아닙니다. 바람이란 뜻도 있습니다. 루아흐는 항상 능력, 즉 강한 바람의 능력 같은 능력의 개념이 있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루아흐는 항상 인간적인 것 이상의 무엇과 인간에게서 유래되지 않은 것과 인간 권한 내에 속하지 아니한 그 무엇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에게는 영이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의 죄악스러운 인간본성의 손에 매달려 있었을 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율법은 오직 그가 죄를 짓게끔 감동시킨 것밖에 안 되고, 그런 상태에서 더욱 더 나빠졌고 패배하고 절망한 사람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는 그의 생활 속으로 하나님의 영의 불길 같은 능력이 들어왔습니다. 이럼으로 해서 그의 생애에는 자기의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이 있고,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삶으로 돌입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連帶意識(연대의식)입니다. 유대인의 연대의식이 거의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 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그 죄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사망이 왔다는 것이 연대의식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완전히 그리고 진실로 인간본성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가 인간으로 살았을 때 죄 없이 사셨습니다. 그는 죄를 물리치셨습니다. 그가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죄는 정복당하고 패배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한 완성의 삶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담과 하나였던 것과 꼭 같이 이제 우리는 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죄에 관련된 것 같이 우리는 이제 예수의 완전성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 같이 그의 안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법을 완성하였습니다.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치명적인 불순종을 했듯이 그 안에서는 인류는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했습니다. 인간은 전에 아담의 죄에 가담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안의 선에 참여하였으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에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에게 있어서 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은 아주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 때문에 크리스천에게는 더 이상 육과, 죄악스러움과, 무능한 인간 본성으로 지배되지 않는 삶의 걸길 열린 것입니다. 그 삶이란 그 능력의 영과 인간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능력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말합니다. 과거에 대한 형별은 사라지고 미래를 위한 힘이 약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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