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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45 

 

월버 체프맨이란 사람이 대학생 때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도 구원에 대해서 말씀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체프맨이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무디 목사님, 저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무디는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저는 믿기는 믿는데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디는 요한복음 5:24절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디가 체프맨에게 믿느냐고 묻자,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니 글쎄요.”라고 했습니다. 무디가 한 번 더 읽으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당신은 믿습니까?” “제가 믿는다고 여러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제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이때 무디가 큰 소리로 나무랐습니다. “당신이 무엇인데 하나님을 무시합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 그의 고함에 깜짝 놀라며, “그러면 나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하는 무디의 말에 월버 체프맨은 자신이 여태껏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학을 하고 D. L, 무디가 은퇴했을 때, 그 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상 믿음을 말하고 있지만, 정작 그 말을 써야 할 때, 믿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항상 당황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이성과 믿음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말하고,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만 그 믿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완전하게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을 완전히 분석하면 믿겠는데 조금도 분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었는데 배신을 한 예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전 2세기에 씨저가 Brutus에게 배신당했습니다. 21세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에게 배신당한 예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어야 할 대상을 한 차원 높입니다. 자기들이 믿어야 할 대상을 신으로 정합니다. 그런데 신으로 정하는 것도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정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정한 신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잃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자신이 정한 신에게 “all in”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도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영혼과 모든 것을 “all in”하지 않아야 할 곳에 “all in”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종교에 “all in”한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종교가 별 희한한 소리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의 미래에 대해서 “all in”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40절에서 45절을 보면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나병 환자 곧 한센씨 병은 지금도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문둥병은 癩菌나균으로 인해 생기는 만성 전염병입니다. 잠복 기간이 매우 깁니다. 눈썹이나 코, , 귀 등에 도토리만한 크기로 도드라지는 결절이 생깁니다. , 발 등의 관절이 녹아 손가락, 발가락 등이 떨어져 나갑니다. 피부에는 탈색된 반점이 생기고, 외부의 충격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병원균을 발견한(1874) 사람의 이름을 따라 한센 씨(Hansen, 1841-1912) 병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징벌과 연관된 질병으로 여기거나 죄를 상징하는 병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문둥병 증이 발견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칩니다. 윗입술을 가립니다. 타인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amef; amef;w]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칩니다. 제제 조치로 제사장은 문둥병으로 판명된 자를 진 밖으로 추방되어 격리 수용했습니다(13:46). 죽으면 격리된 장소에서 장사 지냈습니다(대하26:23). 성직을 수행할 수도, 성물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성회(집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문둥병이 들리면 평생 격리되어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병이 의심되는 자는 의원이 아닌 제사장에게 가서 병증을 진단받도록 하고 있습니다(13:8).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Messiah적인 이적이 베풀어졌다는 말입니다. 문둥병을 고친 사람이 곧 Messiah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형벌이요,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문둥병을 일순간에 치유할 수 있는 이 놀라운 이적은 Messiah만이 이뤄낼 수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에 손을 대셨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그의 병을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셨습니다. 그만큼 저를 불쌍하게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이 간단한 말씀에 그의 문둥병이 즉시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리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하신 메시아 비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즉각적인 정치적/민족적 구원을 갈망하던 유대 민중들의 그릇된 Messiah 대망론에 불을 붙이기를 꺼리셨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자가 치유되었다는 소문은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예언자를 생각하게 했을 것이었습니다(왕하5:8).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격리된 곳에서 가족공동체에 들어가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상담사들이 말로 정신질환의 종류의 병을 치료하고 있지만 완치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몸에 나타난 불치의 병은 치료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료하셨습니다. 이에 문둥병 들린 환자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탁한 것입니다. 원하시면 곧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시려는 마음만 있다면,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문둥병 들린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앞에 있었던 귀신을 쫓아내신 일(1:26),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1:31), 그리고 각색 병과 귀신을 쫓아내신 일들을(1:34) 들은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문둥병쯤은 거뜬하게 고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따라서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고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 로마에 있는 신들, 이 세상에 신으로 믿는 것들과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 로마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신은 자연의 법칙 로고스에 의해, 로고스에 따라가는 존재들입니다. 자연의 질서가 있고 질서에 의해 종속되는 존재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그리스 로마에서 이야기하는 다신교들의 특징입니다. 실제로 신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여호와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로고스 위에 있는 로고스,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중요한 시기나 혼란기에 내가 위로를 찾고 싶을 때 뭔가 구원받고 싶을 때, 내가 자연의 법칙에 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질서에 종속되는 신에게 의존하고 싶을 것 같습니까? 그걸 넘어서서 거기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신에게 손을 내밀 것 같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아닌 바에야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힘에 의해서 자연의 법칙을 넘어선, 자연의 법칙까지도 지배하는 여호와를 믿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뭡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게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아주 다층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원리, 법칙, 질서 이런 것들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또한 로고스는 인간의 지성, 이성을 이야기할 때도 로고스라고 하고, 로고스라는 단어는 또 어떤 의미냐 하면,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태초에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원리와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보면 될 겁니다. 그 로고스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잘 믿은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hn:Wma> pivsti" 믿음이란 말 자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혹 이 말이 나올 때에는 신뢰하는 의미 정도입니다. 그러나 믿다’, ‘신뢰하다’, ‘소망하다등 여러 단어가 믿음의 개념을 표현했습니다. 시편26:1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로 그의 충실함을 제시합니다.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또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본적인 올바른 태도로 요구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올바른 삶으로 표현합니다(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의나 우상 혹은 인간의 힘을 신뢰하는 것은 비난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든든히 신뢰할만한 반석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15:16)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믿음의 전형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믿음에 해당하는 다양한 단어가 무려 300회 이상 나타납니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행위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기준이 모호합니다. 유대 율법으로는 1521(36x36)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현재 유대인 중 단 한 명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1521가지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의존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16:30.31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모두 참되다고 믿는 것은 좋은 믿음입니다.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을 믿고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문둥병으로부터 탈출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네가 깨끗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즉시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누구를 믿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누가 믿었습니까? 문둥병 환자입니다. 문둥병이 의학적으로 치료되는 병입니까? 아닙니다. 과거도 현재도 치료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깨끗이 나았습니다. 점진적으로 낫지 않았습니다. 즉시 나았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즉시입니다. 점진적이지 않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한순간에 달라진 삶을 살았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특징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은 종종 병 고침과 연관되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대상은 항상 인격적인 예수님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믿다는 뜻의 동사가 98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혹은 그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그의 본질 곧 그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현재 영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전형적인 마음 자세로 봤습니다. 믿음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율법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바울은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바울의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을 믿음과 연관시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보증하는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의미에서 영생을 확고히 보증하는 계약금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명한 11장에서 믿음을 보이는 것과 대조시킵니다. 그곳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은 아무런 외적 증거도 갖지 못했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습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고 언급할 때, 얼핏 야고보서가 신약의 다른 책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거부하는 믿음이란 살아 계신 주님께 대한 진실 된 신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할 뿐 그 진리대로 생활하지는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의 곳곳에는 바울과 동일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Closing 믿음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의미하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11:6). 믿음은 지식과 의지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날아가는 날개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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