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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사하시며 육신은 치료하시고

마가복음2:1-12

 

 

정체성(identity)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다른 말로는 어떤 사람의 신분입니다.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입니다. 1세기경에 팔레스타인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몹시 궁금해 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극한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런 틈틈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사렛에서 큰 인물이 날 일도 없거니와 설령 인물이라도 그게 뭐 어쩌냐는 태도였습니다. 정녕 큰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있는 한 청문회를 거쳐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고위직들과 고위 레위인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들 틈에 끼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 군대제사장, 성전경비대장, 일직 제사장들, 성전감독, 창고책임자, 일반제사장, 레위인 등이 있는데 이 밑에 엄청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고,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으며, 받아들여야 할 당위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우선 긍휼에 풍성하셨습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품격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대하는 태도가 유대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만나주시고 소통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예수님께서도 나는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30).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26:63-64).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곧 아들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하심으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셨습니다(5:17).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아들로서 그것을 행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들이므로 아버지가 행하시는 심판을 아들이 심판한다고 제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면서 자기가 아버지와 완전히 동일한 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이사야가 바라본 여호와가 지금 자기들 가운데 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12:36-41). 이사야가 바라본 여호와의 영광이 바로 지금 성육신하여 자기들 가운데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가 구약의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함으로 자기들 가운데 사람으로 와 계신 주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라고 확증했습니다. (이러한)

 

I.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를 전하셨습니다(1-2).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우리가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결과로 예수님께서 인기인이 되셨습니다. 예나지금이나 인기인들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습니다. 사람이 인기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잘 한다든지, 강연을 잘 한다든지, 가르치기를 잘 한다든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든지, 잘 생겼다든지 등 사람들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심한 열병으로 앓아누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각색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지금도 고치지 못하는 문둥병환자도 고치셨습니다. 갈릴리로 다니시면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가버나움에도 예수님의 소문은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며칠 후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어느 집에 계신다고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 문 앞에라도 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모인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5을 보면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이제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가까웠으니 지금의 삶에서 돌이키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구상에서 하나님을 제일 잘 믿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천국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원칙, 나쁜 교리들을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알량한 장로들의 전통과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 곧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곳을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내야 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의미는 우리가 이 땅에서 보내는 짧은 몇 년 동안에 요약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의식하고 인식하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실 겁니까?”라는 질문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의미를 전달해 줍니다. 모든 인간은 어떻게든 영원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미래에 대한 것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한곳에서 영원을 보내야 합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미지들은 불확실하고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천국은 복된 장소이자 가고 싶은 장소인 반면에, 지옥은 고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신앙을 갖고 죽은 사람들이 가게 될 장소를 지적하기 위해서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이 물질적인 것들은 분해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새로운 창조를 공유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사야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66:22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구약성경은 역사를 초월하여 확장되는 삶, 영원히 지속될 삶을 제시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지옥(hell)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시적인 용어로 무덤(grave)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지옥에 대한 언급은 무덤 또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예로 시편86:13과 같은 구절은 음부(sheol)로부터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맹렬한 진노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과 비림 받은 자들의 부활을 예언했습니다. 다니엘12:2절을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처럼, 창조된 우주를 의미하는 하늘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물질적인 영역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는 영적인 영역입니다. 우리의 보화가 있는 곳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영역입니다(6:20). 또한 우리가 상급을 받게 될 곳도 영적인 영역입니다(5:12). 우리의 이름은 그곳에 새겨져 있습니다(10:20). 우리의 진정한 집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다시 한 번 모든 장벽을 파하실 것입니다(살전4:17/살후1:7).

 

신약성경은 지옥을 언급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gevenna는 새 국제역(NIV)에서 언제나 지옥”(hell)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2:4은 지옥을 tavrtaro" 라 했습니다. 이 단어는 반항하는 신들이 감금되는 신화 속의 심연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반면에 a{/dh" 는 때때로 죽음(death) 또는 무덤(gra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과 지옥과 관련된 서로 다른 단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a{/dh"는 일시적인 상태 즉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거처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누가복음16장에서 적나라하게 지옥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죽었을 때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16:23)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상태를 묘사하시기 위해 강력한 단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 중에있습니다. 긍휼이 절대로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데스와 복된 자들의 거처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깊고 넓게 갈라진 큰 구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묘사에 따르면 하데스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gevenna는 신약 시대의 랍비들과 예수님 모두가 사용한 말로 마지막 형벌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묘사에 따르면 gevenna는 종종 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5:22,18:9/9:43). 또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불의 장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곳은 마귀와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곳으로서 인간들이 그들과 함께 형벌을 반아야 할 장소입니다(25:41). 영원한 심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묘사는 요한계시록입니다. 버림받은 자들은 유황불 붙는 못”(19:20)에 던져집니다. 그곳에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습니다(20:10,14). 그리스도인들이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보아왔든 간에, 각 사람이 앞으로 끝없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성경에서 볼 때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천국 처소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계속해서 믿음을 갖지 않고 복음뿐 아니라 피조물 가운데 제공되어 있는 하나님께 대한 증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까? 현재는 천국과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함께 한 공간에 있습니다. 전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연히 구분될 때가 옵니다. 1차로 우리가 죽었을 때입니다. 죽음이 천국과 지옥을 구분합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심판 때입니다. 이왕 태어난 우리들은 지옥보다 천국을 가야합니다. 지옥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형벌로 부활한 자들은 마지막까지 주 예수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범죄를 용서하고 영생에 이르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지막까지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자들은 다시는 돌이킬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주 예수를 믿으라는 권고를 수없이 들었지만 그런 권유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인격과 위엄을 무시하고 짓밟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 제시 이후 오래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웃음거리로 여겨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끝까지 배척한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불 못에서 후회하고 탄식하고 절망할 뿐이고 다른 길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돌이킬 수 없는 결정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고통과 형벌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앞으로 어떤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까? 예수님의 도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때 정해진 대로 부활합니다. 모든 인류가 부활할 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로 결정되어 부활합니다. 심판을 받아서 상급과 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을 때 주 예수를 믿었거나 믿지 않았거나의 상태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활할 때는 상급과 형벌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영생이나 영벌은 죽을 때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배정된 대로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행함을 정밀하게 검사받고 그 결과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다시 판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는 것은 살아 있을 때 한 마지막 결정대로 부활하여 그 신분으로 영원한 세계를 살게 됩니다. 모든 인류가 다 부활하므로 인류역사가 마감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사람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예수님께서 불치병을 치료하셨습니다(3-12).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1)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질병의 종류에는 약 3,0000가지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질병은 치료할 수 있는 병과 치료할 수 없는 난치병이나 불치병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치유와 축사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곧 온 갈릴리에 전파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도의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에 침상 위에 누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3). 네 사람이 메고 온 것을 보면 이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문밖에까지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계단을 통해서 그 환자를 평평한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지붕을 뜯었습니다. “여기쯤 될 거 같다.”하고 환자를 달아 내리기 위해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주님 앞으로 매달아 내렸습니다(4).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믿음은 큰 기적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믿음을 보시고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저희의 믿음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과 같이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믿음이 중풍병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하였습니다. 고쳐주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우리들도 그 대열에 끼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믿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붕을 뜯어내는 믿음, 그리고 예수님 앞에 환자를 달아 내리는 믿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 그 믿음들을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약정입니다. 주님께서 귀신도 쫓아내시고 문둥병도 고치셨으며 각종 병들을 고치셨는데 이제 이 사람도 고쳐주십시오. 그들과 주님사이의 약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시고 갑자기 소자야 네 죄를 용서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이에 같이 있었던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발끈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매우 참람한데 하나님께서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데. 그들이 속으로 의논하는 것까지 아시고 왜 의논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왜 마가요한이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까? 이 치료사건이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자들이 증언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서 모든 사람의 영혼의 죄를 사죄할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치료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서 사죄권이 있느냐 없느냐는 신학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대하기는 하였으나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존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병을 치유하기 전에 먼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역시 의아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눈에 당장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사죄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유대인들의 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상을 들고 가라는 것은 그 능력의 출처문제였습니다. 당시 타락한 유대인들은 죄를 용서하는 것은 불가, 사람들 치료하는 것도 예언자, 마술사 등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10) 먼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침상을 들고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중풍병자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침상을 메고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성도여러분! 회개는 죄 사함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병의 나음은 중풍병자가 보여 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그의 친구들로부터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같이 온 일행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믿음은 올바른 신앙고백에 있습니다. 그들이 한 결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능히 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줄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움직이는 뜨거운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음으로 통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병자는 언어의 장애까지로 말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바라보고 믿었을 때 그의 마음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 이 중풍병자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마음 아프게 뉘우치면서 통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그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는 일에 간절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아래로 달아 내리기까지 한 것입니다(5:18-20). 간절히 찾는 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주님께 상달됩니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왜 이 말씀을 읽고 말씀의 해석을 듣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긍휼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자체가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짐들을 모두 예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태복음11:28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가 일을 할 때 멍에하나에 소 한 마리입니다. 그러나 유대에서는 멍에 하나에 소 두 마리가 끌었습니다. 종종 힘이 약한 소들은 힘센 소의 덕을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같이 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힘이 들면 지는 척만 하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내가 지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엄위는 천국에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엄격한 공의는 가장 비참한 지옥에 계시하십니다. 자신이 지혜롭고 권능 있는 섭리는 온 세상에 두루 미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은혜로운 사랑은 지금 이 땅위에 있는 교회 즉 우리들에게 쏟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우리에게 쏟으시고, 우리가 믿을 때에 기도할 때에 부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굽은 막대기로도 정확히 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갖다 놓으십시다. 그래야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부지런히 갖다놓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그리하여 중풍병자처럼 죄도 용서받고 치료도 받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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