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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3-14 

 

 

회당 sunagwghv/sunagwgê은 주전 6세기경에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모세오경을 연구하고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원래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닙니다.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습니다. 회당은 신약 시대 유대인의 집회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 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습니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곳(4:16)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13:5,14)으로 활용했습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습니다. 회당장(5:22)은 예배를 감독했습니다. 시중드는 사람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4:20)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습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습니다(4:16; 13:15).

그러나 예수님 당시 회당의 문은 예수님께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회당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 정통주의를 수호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호숫가에서 가르쳤습니다. 야외가 교회였습니다. 푸른 하늘이 천정이었고, 산기슭과 어선들이 강단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장소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걸으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랍비가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이 이곳저곳으로 길을 걸어갈 때 또는 야외에서 산책할 때 그의 제자들이 몰려와 함께 걸으면서 랍비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랍비들이 하는 것처럼 가르치셨습니다.

 

갈릴리는 고대 교통로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다는 어디든지 통해 있지 않으나 갈릴리에서는 어디든 통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육로입니다. 모든 육상 교통은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해상의 대도로는 다메섹에서 갈릴리를 경유하는 가버나움을 통과해 갈멜로 내려가 샤론의 평원을 따라 가사를 지나 애굽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세계 최대 도로 중 하나였습니다. 또 하나의 도로는 해안의 아크레에서 요단강을 건너 아라비아 제국의 경계에 이르는 군대와 대상들이 통과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유다는 로마의 행정관 관할 하에 있는 로마의 속주였습니다. 갈릴리는 혜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인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지배되었습니다. 고라니티스를 포함한 동방의 영토 테라코니티스와 바타내어는 헤롯의 또 하나의 아들 빌 립에 의하여 지배되었습니다. 헤롯빌립의 영토에서 헤롯 안디바의 영토로 오는 길에 여행자가 들리는 최초의 거리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국경도시였으므로 세관의 중심지 였습니다. 당시에는 수출입세가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이런 세금을 징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레위 마태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삭개오처럼 로마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마태는 헤롯 안디바를 위해 일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세리였습니다. 마태는 왜 미움을 받았습니까? 고대 사회에서 세리들은 매우 미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세리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남는 것은 그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일은 법률적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의 세 복음서 모두에 레위 마태가 제자로서 부름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소명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 사이에 도적이나 창기처럼 가장 나쁘게 평가되었습니다. 세리는 압제자 로마 정부와 그 속국인 헤롯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당시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초과 징수, 뇌물, 강제 징수 등 온갖 협잡과 부정으로 백성의 돈을 착취했었습니다. 때로 레위 같은 세리들은 일정한 지역에 대한 조세 단독권을 얻어 각종 세금으로 폭리를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죄인과 같이 취급하여 교제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회당 출입을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당시 마음속에 아픔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군중의 외곽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충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직업을 미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정통적인 선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마태는 매우 더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따라 걷고 있을 때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즉시 일어나 좇았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마태가 가장 많은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마태는 문자 그대로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다시 어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한 번의 행동으로, 순간적인 결심으로 그는 직업을 영원히 버렸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버린 후에는 다시 그 직업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결심에는 위대한 인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언젠가는 결정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트무어(Dartmoor)로 가는 긴 시골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쉽게 건너기에는 폭이 넓은 개천에 다다랐을 때 그가 언제나 처음 한 일은 건너편으로 저고리를 벗어던지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건너갈 결심을 했고, 견디어 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Matqai'o"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레위는 히브리식입니다. 마태는 헬라식이름입니다.

 

미운 물건이었던 마태

유대인들은 딴 나라 사람들이 굶어 죽는 곳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에 대한 욕심의 DNA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고질적인 죄악으로 지니고 있었던 마태가 얼마나 비열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유대인의 회당과 그들의 사회에서 쫓겨나는 가장 엄한 출교를 당했겠습니까? 레위는 제사장이 아닌 세리가 되었습니다. 세리란 오늘 우리로 말하면 친일파요 왜놈의 앞잡이입니다. 가이사의 세금 징수원은 보통 로마인 귀족으로서 로마제국의 각 식민지에 파견되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가장 비열한 자들은 왜놈들의 앞잡이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밀정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 추악한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모두 가이사가 정한 것보다 더 많이 착취하여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흡혈귀였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자기가 가난한 자의 것을 조금이라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19:8)고 그리스도께 고백하였었는데, 이것으로써 그는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음을 암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족 중 누가 로마 세리의 직책을 맡게 되면 그는 하나님께 불충한 사람이요, 고귀한 유대인 사회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여겨 마땅히 죄인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태는 동료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과중한 세금을 이방에 대한 예속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중한 세금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희망을 꺾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사람은 누구든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사람이요, 그들의 민족적 신앙을 버린 자,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배신한 자로 취급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찾아 그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 자신, 곧 삭개오 같은 고급 세리나 마태 같은 하급 세리를 막론하고 매우 부정직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로마의 세리보다 더 혐오 받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세리를 가장 비천한 사람들과 한 부류로 여겼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울 일이 아닙니다. “세리의 집안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그들 모두가 세리요, 도적이요, 강도요, 사악한 죄인들이니라.”라는 속담까지 있었습니다.

더러운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마태가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가족을 팔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통 유대인 친구들 그리고 친지들과의 사귐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조국을 팔았습니다. 동족들이 로마의 학정과 압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는 로마를 섬기는 직업을 택하여, 천박한 욕심으로써 애국심의 불길을 꺼버렸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양심을 팔았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신앙도 팔아먹었습니다. 그의 본명인 레위는 그가 제사장들의 계열의 선조인 야곱의 아들 레위에까지 이르는 경건한 조상들의 후예였습니다. Emerson돈의 가장 사악한 점은 그것을 얻는데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돈 때문에 마태는 동족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또한 모든 종교적인 저주의 말을 뒤집어쓴 채 회당에서 출교당해야 했습니다.

 

Victor Marie Hugo의 레미제라블에는 엉뚱한 사람이 범인의 누명을 쓰고 노예선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면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는 Jean Valjean입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범인이요, 혐의를 받는 사람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듯한 논리로써 자신의 양심을 호도하고, 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구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자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비록 사람들이 그의 가면만을 본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의 참모습을 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웃들은 그의 겉으로 사는 모습만을 볼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양심을 꿰뚫어 볼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4월이 되면 연인들이 라일락 꽃을 따기 위해 찾아가는 파리 근교의 조그만 숲을 기억합니다. 그는 라일락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찾아갑니다. 거리에는 적막이 흐릅니다. 사람들이 말없이 벽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모든 나무와 문의 뒤, 그리고 길모퉁이에도 사람들이 말없이 서 있습니다. 음침한 땅, 납빛의 하늘! 그는 무거운 회초리를 들고 그 적막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말을 타고 들어오는 벌거벗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Jean Valjean은 공포에 질려 그 도시를 도망치지만, 이번에는 군중들이 침묵에서 벗어나 소리를 지르며 그를 쫓아옵니다. “너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인 것을 모르느냐?”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속였던 Jean Valjean은 자칫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뻔하였습니다. 이것이 Victor Marie Hugo가 말하고자 한 양심의 소리입니다.

 

마태는 명예를 팔아먹어 버리고 양심은 거의 목졸려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오랫동안 죽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Dr. W. Graham Scroggie는 마태가 의 의미로 데나리온대신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 그리고 세겔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에서 그의 前職을 추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17:22~27, 22:19과 막12:15).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희귀한 동전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렙돈’, ‘고드란트’, ‘데나리온등 가치 없는 동전의 이름만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렙돈고드란트그리고 므나가 나옵니다. 하지만 돈을 만지는 직업에 종사했던 마태는 당대의 가장 가치있는 동전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달란트같은 것인데, 이것은 므나에 비해 약 60배의 가치를 가진 동전이었습니다. 마가가 , 누가는 이라고 한 것을 마태는 금이나 은이나 동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세금을 징수할 때 이런 돈을 많이 만져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회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들이 있었던 곳에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걷고 계실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나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소의 사울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대낮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반역적인 행위는 즉시 중지되었습니다.

마태는 다메섹으로부터의 대서(大西) 간선 도로(The Great West Trunk Rood from Damascus), 지중해의 동쪽 맨 끝에 위치한 가버나움의 세관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마태는 당시 일어나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건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습니다. 그런데 얘기로만 듣던 갈릴리의 그 이상한 사람이 돌연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에게 다가와 일어나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는 새 스승께서 자신의 유명한 산상수훈을 설교하고 계실 때, 마태는 아마 거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경청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마태를 세관에서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얼굴에서 그의 속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 마태가 즉시로 응답할 것임을 아셨다는 점입니다. 짧은 권면, 당당한 명령에 마태는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마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직업과 동료들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오랫동안 생각만 했던 자유와 평강의 땅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마태는 그의 억눌렸던 본성이 즉시로 속박에서 풀려나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죄악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머리는 기쁨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믿고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부르심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구원얻는 믿음의 부르심과 구원받은 사람의 mission미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겸손함의 깊이를 체험한 후 가장 고귀한 특권을 지닌 지위에까지 높여졌습니다. 전에는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자신을 팔았었지만 이제 그는 가이사보다 더 위대한 왕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마태는 주님이 주시는 영적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돈이 잘 벌리는 직장을 팽개치고 물질문제의 해결에 대한 가망이나 약속도 없는데 예수를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마태로서는 얼마나 힘든 시험이었겠습니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마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재산을 포기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의 직장이라고 하면 연봉이 2-3억정도가 넘습니다. 요새 같으면 연봉이 1억원이라도 신의 직장입니다. 마태 정도 되면 신의 직장이었습니다. 그런데 180도 달라졌습니다. 신의 직장을 포기한 것입니다. 마태는 신속한 판단력과 강력한 의지, 명확한 견해로써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 없이 따라나섬으로써 그는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주님에 의해 책상에서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Richard Glover는 그의 마태복음주석서에서 주님의 부르심과 세리 마태에 대한 응답에 관련된 몇 가지의 기이한 일을 말했습니다. 부르심의 엄숙함. 그것은 미지의 위험한 미래를 위해 재산과 직업과 옛 습성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부르심의 은혜 사람들은 세리의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의 구주요, 친구가 되셨습니다. 부르심의 약속.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태는 혼자였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구원과 사귐과 인도와 보호의 약속이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여명. 마태는 어제는 죄인들과 한 무리였지만 오늘은 사도요, 내일은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부르심의 영광.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가 어떻게 한 죄인에게 그의 동역자요 사도가 되는 영광을 주셨는지를 증거 합니다. 부르심의 본질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의 핵심이 되는 것은 신조가 아닌 한 인격(a person)에의 복종입니다. 주님의 명령 안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 고백, 그리고 그와의 사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일어나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5:28). 그런데 마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그는 자기의 그같은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9:9).

 

누가복음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복음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사실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부르시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의 결단의 용기와 열심. 용감한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지혜란 이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평강과 영광을 가져 왔습니다. 마태는 후에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복을 안겨 준 복음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만약 마태가 한 부자 관원처럼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 버렸었다면, 교회는 그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순종했습니다.

 

Closing 우리도 부르심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마태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지혜란 하나님 곧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생을 크게 복되게 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일어서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님은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부르셔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부름의 끝은 별로입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영원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하십시다.

And

마가복음1:40-45 

 

월버 체프맨이란 사람이 대학생 때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도 구원에 대해서 말씀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체프맨이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무디 목사님, 저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무디는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저는 믿기는 믿는데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디는 요한복음 5:24절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디가 체프맨에게 믿느냐고 묻자,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니 글쎄요.”라고 했습니다. 무디가 한 번 더 읽으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당신은 믿습니까?” “제가 믿는다고 여러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제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이때 무디가 큰 소리로 나무랐습니다. “당신이 무엇인데 하나님을 무시합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 그의 고함에 깜짝 놀라며, “그러면 나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하는 무디의 말에 월버 체프맨은 자신이 여태껏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학을 하고 D. L, 무디가 은퇴했을 때, 그 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상 믿음을 말하고 있지만, 정작 그 말을 써야 할 때, 믿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항상 당황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이성과 믿음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말하고,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만 그 믿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완전하게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을 완전히 분석하면 믿겠는데 조금도 분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었는데 배신을 한 예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전 2세기에 씨저가 Brutus에게 배신당했습니다. 21세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에게 배신당한 예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어야 할 대상을 한 차원 높입니다. 자기들이 믿어야 할 대상을 신으로 정합니다. 그런데 신으로 정하는 것도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정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정한 신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잃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자신이 정한 신에게 “all in”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도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영혼과 모든 것을 “all in”하지 않아야 할 곳에 “all in”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종교에 “all in”한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종교가 별 희한한 소리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의 미래에 대해서 “all in”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40절에서 45절을 보면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나병 환자 곧 한센씨 병은 지금도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문둥병은 癩菌나균으로 인해 생기는 만성 전염병입니다. 잠복 기간이 매우 깁니다. 눈썹이나 코, , 귀 등에 도토리만한 크기로 도드라지는 결절이 생깁니다. , 발 등의 관절이 녹아 손가락, 발가락 등이 떨어져 나갑니다. 피부에는 탈색된 반점이 생기고, 외부의 충격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병원균을 발견한(1874) 사람의 이름을 따라 한센 씨(Hansen, 1841-1912) 병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징벌과 연관된 질병으로 여기거나 죄를 상징하는 병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문둥병 증이 발견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칩니다. 윗입술을 가립니다. 타인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amef; amef;w]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칩니다. 제제 조치로 제사장은 문둥병으로 판명된 자를 진 밖으로 추방되어 격리 수용했습니다(13:46). 죽으면 격리된 장소에서 장사 지냈습니다(대하26:23). 성직을 수행할 수도, 성물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성회(집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문둥병이 들리면 평생 격리되어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병이 의심되는 자는 의원이 아닌 제사장에게 가서 병증을 진단받도록 하고 있습니다(13:8).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Messiah적인 이적이 베풀어졌다는 말입니다. 문둥병을 고친 사람이 곧 Messiah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형벌이요,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문둥병을 일순간에 치유할 수 있는 이 놀라운 이적은 Messiah만이 이뤄낼 수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에 손을 대셨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그의 병을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셨습니다. 그만큼 저를 불쌍하게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이 간단한 말씀에 그의 문둥병이 즉시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리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하신 메시아 비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즉각적인 정치적/민족적 구원을 갈망하던 유대 민중들의 그릇된 Messiah 대망론에 불을 붙이기를 꺼리셨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자가 치유되었다는 소문은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예언자를 생각하게 했을 것이었습니다(왕하5:8).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격리된 곳에서 가족공동체에 들어가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상담사들이 말로 정신질환의 종류의 병을 치료하고 있지만 완치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몸에 나타난 불치의 병은 치료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료하셨습니다. 이에 문둥병 들린 환자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탁한 것입니다. 원하시면 곧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시려는 마음만 있다면,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문둥병 들린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앞에 있었던 귀신을 쫓아내신 일(1:26),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1:31), 그리고 각색 병과 귀신을 쫓아내신 일들을(1:34) 들은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문둥병쯤은 거뜬하게 고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따라서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고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 로마에 있는 신들, 이 세상에 신으로 믿는 것들과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 로마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신은 자연의 법칙 로고스에 의해, 로고스에 따라가는 존재들입니다. 자연의 질서가 있고 질서에 의해 종속되는 존재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그리스 로마에서 이야기하는 다신교들의 특징입니다. 실제로 신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여호와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로고스 위에 있는 로고스,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중요한 시기나 혼란기에 내가 위로를 찾고 싶을 때 뭔가 구원받고 싶을 때, 내가 자연의 법칙에 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질서에 종속되는 신에게 의존하고 싶을 것 같습니까? 그걸 넘어서서 거기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신에게 손을 내밀 것 같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아닌 바에야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힘에 의해서 자연의 법칙을 넘어선, 자연의 법칙까지도 지배하는 여호와를 믿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뭡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게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아주 다층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원리, 법칙, 질서 이런 것들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또한 로고스는 인간의 지성, 이성을 이야기할 때도 로고스라고 하고, 로고스라는 단어는 또 어떤 의미냐 하면,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태초에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원리와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보면 될 겁니다. 그 로고스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잘 믿은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hn:Wma> pivsti" 믿음이란 말 자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혹 이 말이 나올 때에는 신뢰하는 의미 정도입니다. 그러나 믿다’, ‘신뢰하다’, ‘소망하다등 여러 단어가 믿음의 개념을 표현했습니다. 시편26:1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로 그의 충실함을 제시합니다.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또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본적인 올바른 태도로 요구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올바른 삶으로 표현합니다(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의나 우상 혹은 인간의 힘을 신뢰하는 것은 비난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든든히 신뢰할만한 반석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15:16)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믿음의 전형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믿음에 해당하는 다양한 단어가 무려 300회 이상 나타납니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행위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기준이 모호합니다. 유대 율법으로는 1521(36x36)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현재 유대인 중 단 한 명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1521가지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의존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16:30.31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모두 참되다고 믿는 것은 좋은 믿음입니다.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을 믿고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문둥병으로부터 탈출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네가 깨끗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즉시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누구를 믿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누가 믿었습니까? 문둥병 환자입니다. 문둥병이 의학적으로 치료되는 병입니까? 아닙니다. 과거도 현재도 치료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깨끗이 나았습니다. 점진적으로 낫지 않았습니다. 즉시 나았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즉시입니다. 점진적이지 않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한순간에 달라진 삶을 살았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특징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은 종종 병 고침과 연관되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대상은 항상 인격적인 예수님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믿다는 뜻의 동사가 98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혹은 그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그의 본질 곧 그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현재 영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전형적인 마음 자세로 봤습니다. 믿음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율법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바울은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바울의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을 믿음과 연관시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보증하는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의미에서 영생을 확고히 보증하는 계약금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명한 11장에서 믿음을 보이는 것과 대조시킵니다. 그곳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은 아무런 외적 증거도 갖지 못했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습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고 언급할 때, 얼핏 야고보서가 신약의 다른 책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거부하는 믿음이란 살아 계신 주님께 대한 진실 된 신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할 뿐 그 진리대로 생활하지는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의 곳곳에는 바울과 동일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Closing 믿음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의미하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11:6). 믿음은 지식과 의지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날아가는 날개도 있습니다.

 

And

마가복음1:35-39

 

Russian-Ukraine War 20222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21세기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대규모 전면전입니다. 푸틴의 야욕으로 인해서 우크라이나에 약 600만 명이 피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 약 1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가 약 10만 명입니다.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2022년 현재 전 세계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전 세계 식량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불안한 국제상황입니다.

2022년 국내상황은 제가 말 안 해도 우리가 잘 압니다. 엄청 뛰어나고 명석하다고 하는 자가 대통령이 되다 보니 모든 것을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모두 답답합니다. 불안불안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철이 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질문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를 비워야 한다.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착하지 않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비우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Russian-Ukraine War 을 멈추게 할 나라가 없습니다. 모두 푸틴의 형편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른 새벽에 베드로의 집에서 나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 곧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온 갈릴리 백성들이 환영하게 되자 즉시 한적한 곳 곧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사단이 주님을 기적만 행하는 Messiah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즉시 처음에 사단과 싸우시던 광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를 통해서 다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어두운 새벽에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을 쏟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기도였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한 갈릴리 대사역에 필요한 힘과 능력 주시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일어나보니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지극히 세상적입니다. 그를 다시 가버나움으로 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가버나움의 큰 무리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제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터전인 가버나움에 예수님이 오래 계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역 곧 그의 전도 여행에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계속 다니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의 구원과 그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선포하는 일에 역점을 두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여러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들은 자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도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도 엉터리입니다. 자신의 알량한 행위가 자신을 틀림없이 구원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전도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 구주로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갈릴리까지 가셔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38절에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는 말씀은 사람에 대한 구원의 message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에서 오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는 하늘에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왔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일을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3:21).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풀 때와 베푸신 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기도를 차일피일 미룹니다. 기도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기도를 싫어합니다. 기도는 해야만 하는데 하고 싶은데, 뭔지 모르게 우리와 실제로 기도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사이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고통을 체험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들과 가정사들 때문에 분주하게 생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쁘다고 해서 먹지 않거나 잠자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데에는 더 깊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기도하기 위해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먼저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기도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의 삶이 멋지게 조율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법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유창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구비되고 채워져야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의 이편에서는 순수한 것들과 불순한 것들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세금을 부과하거나 어떤 짐을 우리에게 메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꼭 현명하거나 순수하거나 믿음이 충만하거나 어떤 것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며 또한 은혜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나아오는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무조건 맹렬하게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가 이기적이거나 저속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어찌 되었건 그들이 우리에게 나아온다는 그 자체입니다. 기도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순수한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거나 충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제쳐 두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즉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 문제들이 때가 되면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또 우리의 기도를 있는 그대로 들어 주십니다. 어린아이가 나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나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놓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의 관심을 나누고 간청할 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직장동료나 이웃 사람들로 인해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는 좋은 날씨나 먹을 양식과 건강 따위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기도는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와 욕구와 관심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수많은 교만, 자만, 허영, 가식, 등 전반적으로 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량도 있고, 관대함도 있으며, 이타심 그리고 보편적인 호의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종종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일어서서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따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우리의 교만함과 방종함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자백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단순한 기도는 때때로 다시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단순한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서 가장 흔한 기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고상하거나 아량이 넓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옛날 목이 곧은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하던 모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 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11:11-12). 또 자기를 대머리라고 놀린 아이들에 대한 엘리사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2:24).

 

이러한 자기중심적 기도의 한복판에는 사람들의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기도 내용도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완고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2). 엘리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수넴 여인여인에게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4:16).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119:97)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기도에는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흉한 것 모두가 섞여 있습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는 가식이 조금도 없습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고, 더 순결하고, 더 성스러운 체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읍시다(요일3:20). 어쩌면 기도는 항상 초보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John Dalrymple 존 달림플우리는 이런 기도 이상은 드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부족함과 필요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기도를 멸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보다 성숙한 기도를 드리겠다는 소망으로 단순한 기도를 건너뛰려고 합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기적인 요구의 기도를 경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그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뛰어넘는 길은 그것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기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서 논의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진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는 이론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과 더불어 시작하면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적인 삶 속에서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재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로 들어오신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그런 기도를 멸시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없다.”고 우리는 신음합니다. 내가 졸업하면, 내가 이 일을 끝내면내가 CEO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장소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뿐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자신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곳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동료, 친구, 가족 그 누구와 함께 있는 그곳이 바로 기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일상의 경험들을 기도하려면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밤잠을 못 잘 만큼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상처와 고통과 실망을 느끼며, “왜 접니까? 왜 제가 이 아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좌절과 슬픔과 분노에 대하여 호소하는 것이 단순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길을 잃고 상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웃 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가 우리 속에 있는 분노, 시기, 두려움 따위의 감정을 모두 폭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 뒤에 숨어 있는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유로이 불평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외치기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20:7).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Clive Staples Lewis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 니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은 기도의 올바른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속임수를 믿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도가 숭고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활동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믿지 마십시오. 기도할 때는 하나님에 관해서만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고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우리는 일상의 체험들이 올바른 기도를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한다고 쉽게 단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영성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께서는 냄새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땅 위를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한시도 벗어남이 없이 살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들에 관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자유롭고 숨김없이 상처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올 때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말을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기도를 배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Closing 청교도 William Gurnal은 어린아이가 우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기도하는 것은 똑같다. 어린아이는 우는 법을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어린아이는 울면서 세상에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그 양식이나 규칙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새 생명의 원리 자체로부터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기도는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께 채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And

찾아온 사람들을 고치신 예수님

마가복음1:32-34

 

대학병원이나 대형병원의 응급실은 흡사 전쟁터와 같습니다. 각종 사고 난 사람들이나 병으로 위독한 환자들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들을 치료하려고 매우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응급실은 첨단장비들과 우수한 인력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습니다. 응급요원들이 응급처치해서 각 과에 보내어 생명을 연장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응급실에서 또는 수술실에서, 치료실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원에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은 의술의 부족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현재까지의 의술이 병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명을 연장하려고 생명공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상의 기적만 생각합니다. 기적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기적을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각각 다른 기적이 35회가량 기록되어 있습니다(20/18/20/28). 마태복음에만도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던 상황을 12번이나 암시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은 수많은 기적 중에서 기록자 자신의 저술 동기에 적합한 것만을 일부 선정하여 기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일일이 기록했다면 기적만 따로 기록한 책이 별도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4:6을 보면

 

개역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바른성경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와서 이 땅을 진멸함으로 칠 것이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말씀은 저주, 멸망 !reje/hērēm입니다. 여기에서 저주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저주는 신명기28:20입니다.

 

신명기28: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신명기28:20의 저주 hr:aem]/mĕ’ērâ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저주입니다. 하지만 말라기4:6의 저주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저주를 헤렘으로 기록했습니다. 헤렘은 금지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6:16-19을 보면

 

16 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18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찌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첫 성인 여리고를 주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신신당부하십니다. 절대로 가나안의 모든 재물을 착복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착복했습니다. 그 결과 조그만 아이 성에서 크게 패하게 됩니다. 이유는 아간이 하나님의 곳간에 넣어야 할 재물에 손을 댄 것입니다. 이것을 헤렘을 범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착복했다.”입니다.

 

말라기4:6의 저주가 곧 헤렘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을 금지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올 엘리야 곧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를 믿지 않으면 복을 금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막으시기에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침묵의 400년이 지난 후 예수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옵니다.

 

마태복음1:1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신약성경을 첫 번째로 열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저주를 선포하였는데, 신약성경 초입에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주와 그리스도. 어떤 관계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저주를 해제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저주를 없애십니다. 저주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불순종하여 생긴 결과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3:10). 누구든지에 모든 사람이 포함됩니다.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 있습니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죽어야 하고, 죽는다는 말은 영원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계산하기에 따라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대로, 약속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저주를 폐기하고 인간을 죽음에서 구해내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여자의 후손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율법 아래 오셨다는 사실이 기적입니다. Campbell Morgan유대인의 계통에서는 도저히 그런 분이 나올 수 없다. 그는 그 계통을 완성하시고 또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그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그 왕국은 죄로 인해 해체되어 붕괴하였으며, 국토는 유린당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이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지만,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도 자연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매우 노력해 왔습니다. 홍해가 갈라졌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홍해라는 이름은 #Ws !y: /yâm sûp입니다. 갈대 바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얕은 갈대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바다라도 바닷가에는 갈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는 넓고 깊은 바다였습니다. 만일에 갈대숲의 바다라면 어떻게 이스라엘은 건너고, 말을 탄 애굽 군인들이 수장되었을까요? 이럼에도 아직 그것을 규명해보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두루두루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도 현대인들은 성경의 기적을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홍해가 갈라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요단강이 갈라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fact인데 fiction으로 생각합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헤아리기 때문입니다. 육안이 아닌 영안으로 봐야 제대로 보입니다.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왜 해가 떠 있을 때 좀 더 일찍 나와서 고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병자들의 상황은 일각이 여삼추였습니다. 그런데 저물어 해 질 때에야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이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21). 오늘날로 말하면 토요일 오후 해 질 때입니다. 해가 지면 안식일이 종료됩니다. 히브리어 표현에 따르면 두 종류의 저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12:6의 원문을 보면, 해질 때를 히브리인들은 두 저녁 사이라고 읽습니다. 일몰과 어두움 사이로, 빛이 아직 있는 상태의 그 중간 시간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은 안식일을 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귀신 축출이나 병을 치료하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셨습니다.

복음서에 제시된 구체적인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 지극히 제한 된 몇몇 예일 뿐입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 온 동네, 각색 병든 많은 사람, 많은 귀신 등과 같은 표현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하였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얼마나 폭넓게 행하셨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병든 자, 다음에 바로 귀신들린 자가 덧붙여 기록되었습니다. 귀신은 들리지 않았으나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과 육체적으로는 병들지 않았으나 귀신이 들린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괴로움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병 고치는 능력은 결코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찾아온 사람들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이병은 되고, 저 병은 안 되고가 없었습니다.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동정의 손길은 결코 중단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귀신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귀신들의 그 소리에 재갈을 물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꾸짖으시고 더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말 귀하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망치려 했습니다. 아직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지 않으려고 하셨는데 이 귀신은 그것을 까발리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너무나 빨리 메시야로 알려지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아테네인들이 델피의 신전에서 신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누가 제일 지혜로운 사람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탁을 하는 무녀 PhythiaSwkravth"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아테네에 두루 퍼졌습니다. Swkravth"는 이상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자신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지혜롭다 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서 물었습니다. 찾아서 물어보고 시험해보니 엉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Swkravth"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의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지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無知라고 합니다. 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을 아는데, 저들은 아는 것이 없는데도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無知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무지의 지입니다. 병을 치료받은 사람이 있는데. 귀신들림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무지의 지입니다. 예수님께 왜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Closing 제가 만든 것은 제가 고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하나님께서 고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주무시다가 풍파를 안정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배는 가장 안전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And

죄는 사하시며 육신은 치료하시고

마가복음2:1-12

 

 

정체성(identity)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다른 말로는 어떤 사람의 신분입니다.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입니다. 1세기경에 팔레스타인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몹시 궁금해 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극한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런 틈틈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사렛에서 큰 인물이 날 일도 없거니와 설령 인물이라도 그게 뭐 어쩌냐는 태도였습니다. 정녕 큰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있는 한 청문회를 거쳐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고위직들과 고위 레위인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들 틈에 끼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 군대제사장, 성전경비대장, 일직 제사장들, 성전감독, 창고책임자, 일반제사장, 레위인 등이 있는데 이 밑에 엄청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고,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으며, 받아들여야 할 당위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우선 긍휼에 풍성하셨습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품격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대하는 태도가 유대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만나주시고 소통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예수님께서도 나는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30).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26:63-64).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곧 아들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하심으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셨습니다(5:17).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아들로서 그것을 행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들이므로 아버지가 행하시는 심판을 아들이 심판한다고 제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면서 자기가 아버지와 완전히 동일한 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이사야가 바라본 여호와가 지금 자기들 가운데 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12:36-41). 이사야가 바라본 여호와의 영광이 바로 지금 성육신하여 자기들 가운데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가 구약의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함으로 자기들 가운데 사람으로 와 계신 주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라고 확증했습니다. (이러한)

 

I.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를 전하셨습니다(1-2).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우리가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결과로 예수님께서 인기인이 되셨습니다. 예나지금이나 인기인들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습니다. 사람이 인기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잘 한다든지, 강연을 잘 한다든지, 가르치기를 잘 한다든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든지, 잘 생겼다든지 등 사람들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심한 열병으로 앓아누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각색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지금도 고치지 못하는 문둥병환자도 고치셨습니다. 갈릴리로 다니시면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가버나움에도 예수님의 소문은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며칠 후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어느 집에 계신다고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 문 앞에라도 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모인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5을 보면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이제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가까웠으니 지금의 삶에서 돌이키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구상에서 하나님을 제일 잘 믿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천국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원칙, 나쁜 교리들을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알량한 장로들의 전통과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 곧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곳을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내야 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의미는 우리가 이 땅에서 보내는 짧은 몇 년 동안에 요약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의식하고 인식하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실 겁니까?”라는 질문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의미를 전달해 줍니다. 모든 인간은 어떻게든 영원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미래에 대한 것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한곳에서 영원을 보내야 합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미지들은 불확실하고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천국은 복된 장소이자 가고 싶은 장소인 반면에, 지옥은 고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신앙을 갖고 죽은 사람들이 가게 될 장소를 지적하기 위해서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이 물질적인 것들은 분해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새로운 창조를 공유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사야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66:22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구약성경은 역사를 초월하여 확장되는 삶, 영원히 지속될 삶을 제시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지옥(hell)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시적인 용어로 무덤(grave)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지옥에 대한 언급은 무덤 또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예로 시편86:13과 같은 구절은 음부(sheol)로부터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맹렬한 진노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과 비림 받은 자들의 부활을 예언했습니다. 다니엘12:2절을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처럼, 창조된 우주를 의미하는 하늘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물질적인 영역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는 영적인 영역입니다. 우리의 보화가 있는 곳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영역입니다(6:20). 또한 우리가 상급을 받게 될 곳도 영적인 영역입니다(5:12). 우리의 이름은 그곳에 새겨져 있습니다(10:20). 우리의 진정한 집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다시 한 번 모든 장벽을 파하실 것입니다(살전4:17/살후1:7).

 

신약성경은 지옥을 언급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gevenna는 새 국제역(NIV)에서 언제나 지옥”(hell)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2:4은 지옥을 tavrtaro" 라 했습니다. 이 단어는 반항하는 신들이 감금되는 신화 속의 심연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반면에 a{/dh" 는 때때로 죽음(death) 또는 무덤(gra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과 지옥과 관련된 서로 다른 단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a{/dh"는 일시적인 상태 즉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거처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누가복음16장에서 적나라하게 지옥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죽었을 때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16:23)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상태를 묘사하시기 위해 강력한 단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 중에있습니다. 긍휼이 절대로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데스와 복된 자들의 거처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깊고 넓게 갈라진 큰 구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묘사에 따르면 하데스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gevenna는 신약 시대의 랍비들과 예수님 모두가 사용한 말로 마지막 형벌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묘사에 따르면 gevenna는 종종 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5:22,18:9/9:43). 또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불의 장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곳은 마귀와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곳으로서 인간들이 그들과 함께 형벌을 반아야 할 장소입니다(25:41). 영원한 심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묘사는 요한계시록입니다. 버림받은 자들은 유황불 붙는 못”(19:20)에 던져집니다. 그곳에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습니다(20:10,14). 그리스도인들이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보아왔든 간에, 각 사람이 앞으로 끝없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성경에서 볼 때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천국 처소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계속해서 믿음을 갖지 않고 복음뿐 아니라 피조물 가운데 제공되어 있는 하나님께 대한 증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까? 현재는 천국과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함께 한 공간에 있습니다. 전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연히 구분될 때가 옵니다. 1차로 우리가 죽었을 때입니다. 죽음이 천국과 지옥을 구분합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심판 때입니다. 이왕 태어난 우리들은 지옥보다 천국을 가야합니다. 지옥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형벌로 부활한 자들은 마지막까지 주 예수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범죄를 용서하고 영생에 이르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지막까지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자들은 다시는 돌이킬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주 예수를 믿으라는 권고를 수없이 들었지만 그런 권유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인격과 위엄을 무시하고 짓밟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 제시 이후 오래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웃음거리로 여겨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끝까지 배척한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불 못에서 후회하고 탄식하고 절망할 뿐이고 다른 길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돌이킬 수 없는 결정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고통과 형벌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앞으로 어떤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까? 예수님의 도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때 정해진 대로 부활합니다. 모든 인류가 부활할 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로 결정되어 부활합니다. 심판을 받아서 상급과 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을 때 주 예수를 믿었거나 믿지 않았거나의 상태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활할 때는 상급과 형벌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영생이나 영벌은 죽을 때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배정된 대로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행함을 정밀하게 검사받고 그 결과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다시 판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는 것은 살아 있을 때 한 마지막 결정대로 부활하여 그 신분으로 영원한 세계를 살게 됩니다. 모든 인류가 다 부활하므로 인류역사가 마감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사람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예수님께서 불치병을 치료하셨습니다(3-12).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1)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질병의 종류에는 약 3,0000가지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질병은 치료할 수 있는 병과 치료할 수 없는 난치병이나 불치병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치유와 축사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곧 온 갈릴리에 전파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도의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에 침상 위에 누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3). 네 사람이 메고 온 것을 보면 이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문밖에까지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계단을 통해서 그 환자를 평평한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지붕을 뜯었습니다. “여기쯤 될 거 같다.”하고 환자를 달아 내리기 위해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주님 앞으로 매달아 내렸습니다(4).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믿음은 큰 기적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믿음을 보시고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저희의 믿음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과 같이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믿음이 중풍병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하였습니다. 고쳐주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우리들도 그 대열에 끼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믿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붕을 뜯어내는 믿음, 그리고 예수님 앞에 환자를 달아 내리는 믿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 그 믿음들을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약정입니다. 주님께서 귀신도 쫓아내시고 문둥병도 고치셨으며 각종 병들을 고치셨는데 이제 이 사람도 고쳐주십시오. 그들과 주님사이의 약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시고 갑자기 소자야 네 죄를 용서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이에 같이 있었던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발끈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매우 참람한데 하나님께서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데. 그들이 속으로 의논하는 것까지 아시고 왜 의논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왜 마가요한이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까? 이 치료사건이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자들이 증언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서 모든 사람의 영혼의 죄를 사죄할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치료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서 사죄권이 있느냐 없느냐는 신학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대하기는 하였으나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존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병을 치유하기 전에 먼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역시 의아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눈에 당장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사죄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유대인들의 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상을 들고 가라는 것은 그 능력의 출처문제였습니다. 당시 타락한 유대인들은 죄를 용서하는 것은 불가, 사람들 치료하는 것도 예언자, 마술사 등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10) 먼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침상을 들고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중풍병자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침상을 메고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성도여러분! 회개는 죄 사함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병의 나음은 중풍병자가 보여 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그의 친구들로부터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같이 온 일행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믿음은 올바른 신앙고백에 있습니다. 그들이 한 결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능히 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줄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움직이는 뜨거운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음으로 통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병자는 언어의 장애까지로 말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바라보고 믿었을 때 그의 마음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 이 중풍병자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마음 아프게 뉘우치면서 통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그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는 일에 간절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아래로 달아 내리기까지 한 것입니다(5:18-20). 간절히 찾는 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주님께 상달됩니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왜 이 말씀을 읽고 말씀의 해석을 듣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긍휼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자체가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짐들을 모두 예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태복음11:28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가 일을 할 때 멍에하나에 소 한 마리입니다. 그러나 유대에서는 멍에 하나에 소 두 마리가 끌었습니다. 종종 힘이 약한 소들은 힘센 소의 덕을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같이 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힘이 들면 지는 척만 하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내가 지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엄위는 천국에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엄격한 공의는 가장 비참한 지옥에 계시하십니다. 자신이 지혜롭고 권능 있는 섭리는 온 세상에 두루 미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은혜로운 사랑은 지금 이 땅위에 있는 교회 즉 우리들에게 쏟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우리에게 쏟으시고, 우리가 믿을 때에 기도할 때에 부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굽은 막대기로도 정확히 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갖다 놓으십시다. 그래야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부지런히 갖다놓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그리하여 중풍병자처럼 죄도 용서받고 치료도 받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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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1:1-8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의 의지로 오지 않습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의지로 오지 않았습니다. 요새 우상화 되어서 신격화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태어나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부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로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오실 시기와 장소를 예언했었습니다. 이미 장소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기가 묘연했습니다. 언제인지 확실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의 왕들이 그의 길을 닦았습니다. 주전 334년부터 동방원정을 시작했던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제국, 중앙아시아,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광대한 세계제국을 건설하여 언어를 통일했습니다. 그가 정복한 모든 나라들은 헬라어를 쓰게 했습니다. 또한 로마는 길을 전문적으로 냈습니다. 도로공사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리스가 언어를 통일하고 로마는 길을 냈는데 그들은 이것이 그리스도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터를 이들이 닦아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때가 예수님을 보낼 시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1절을 보면 보내실 예수에 대해서 신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jArch; tou' eujaggelivou jIhsou' Cristou', uiJou' qeou':

I. 복음의 시작인 예수그리스도(1).

세계에서 신들이 가장 많은 나라가 인도의 힌두교인들입니다. 그들의 신들은 무려 4억8천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많은 나라가 일본입니다. 약 800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많았던 나라가 과거의 로마입니다. 거의 집집마다 신들이 하나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많은 신들을 섬깁니까? 그들이 믿는 신은 사람하고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많으면 좋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도 굉장히 강한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신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도 신들을 많이 두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읽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에게 썼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로마기독교인들을 위해서 썼습니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쓰는 만큼, 예수님의 기적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이론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봐야 관심 밖이었습니다.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힘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믿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들은 보통 인간과 다르게 보았습니다. 로마인들로서 유대인인 예수그리스도는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많이 기록하였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jArch; tou' eujaggelivou 복음의 시작이라”우리가 복음, 복음 하면서도 복음의 진정한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이름도 복음교회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복음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복음은 복음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Greece의 필디피데스는 Greece가 Marathon 평야에서 Persia와 싸워 승리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먼 거리를 단숨에 뛰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는 승전소식을 전하고 죽었습니다. 후에 그 병사가 뛴 거리를 재어보니 42.195km였습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마라톤 경기가 생겼습니다. 이 병사가 Greece에 전한 것은 ‘Greece가 Persia를 이겼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기 원하고 있습니다. 요새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휘발유 1리터에 500원한다면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또 전주시의 가장 좋은 땅을 평당 1,0000원에 준다고 하면 역시 좋은 소식입니다. 전주시의 가장 좋은 아파트를 1000만원에 준다고 해도 역시 좋은 소식입니다. 요새 서울에 문제가 되고 있는 뉴타운(new town; new city)을 300평씩 평당 5000원에 준다고 하면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복음(eujaggevlion)은 아닙니다.

종교적으로도 좋은 말을 하는 종교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연친화적으로 살며, 남에게 잘하라고 합니다. 자기를 비우라고 합니다. 도덕적으로 살며, 특히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좋은 곳에 갈수 있다고 말합니다. 좋은 곳에 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다고 말합니다. 좋은 소식이기는 한데 복음(eujaggevlion)은 아닙니다. 복음의 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eujaggevlion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막1:14). 복음은 여인의 후손에서 나와야 합니다. 남자의 후손인 자의 어떤 것도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해진 것입니다(갈3:8). 복음은 선지자들이 약속한 것입니다(롬1:2). 1절을 보면 “복음의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eujaggevlion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모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복음으로 앞으로도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복음으로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John Owen은 ‘세상에 종교는 많지만 복음은 하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우리가 꼭 믿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 복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사람들이 믿어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어야 우리들의 삶이 영육간에 윤택해집니다. 복음을 믿어야 우리들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복음을 믿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왕노릇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성도들이 복음으로 살 것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2절에서 8절을 보면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마가복음의 첫 서두에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II. 복음을 위한 예비자 세례요한(2-8절).

마가는 이사야 40:3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말라기 3:1절을 인용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3:1)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왜 세례요한이 꼭 등장해야 합니까? 왜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쳐야 합니까(3절)? 외치는 자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외치는 자는 왕의 마종(馬從)입니다. 왕이 지나는 길을 잘 정돈하는 왕의 시종입니다. 여기에서 왕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왜 하필 왕이 대로로 오지않고 사막으로 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실 때 사막을 통해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직접 임하시면 되는데 왜 세례요한을 등장시킵니까? 율법과 선지자가 그와 더불어 끝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400년간 침묵하다가 세례요한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이 세례요한의 출현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갈라놓습니다. 세례요한의 출현과 더불어 구약시대는 지나가고 신약시대가 펼쳐졌습니다. 세례요한의 활동이 구약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시대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율법을 은혜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까지 유대의 율법을 굳게 지키도록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을 보냄으로 새 시대가 열리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폐기와 복음의 시작이 요한의 전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보다 길잡이로 요한이 먼저 온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잡이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하였을 때 그는 미련 없이 갔습니다(막6:27,28). 그는 예수님의 길을 닦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막 같은 황량한 때에 나타나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은 메아리로 유대 온 땅에 퍼졌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모든 사람은 회개해야 된다고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울림이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회개(metanoiva")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eij" a[fesin aJmartiw'n) 선포(khruvssw)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에게 세례(bavptisma)를 베풀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서 자기 죄를 시인했습니다(ejxomologevw).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일약 stardom에 올랐습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도 안했는데 세례요한은 대형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인기관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인기관리에 신경을 썼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역을 마치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 앞에 한없이 낮추었습니다. 나는 그의 종일뿐이라 했습니다. 신발끈을 푸는 것은 주로 노예들이 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예수님의 신발끈을 푸는 일조차 할 수 없다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를 비교했습니다. 자신은 회개케 하는 물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세례는 죄를 회개케 하는 세례지만, 예수님은 구원의 세례를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신 구원자가 오심을 예비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를 비교하여 성령세례를 말했습니다.

성령세례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주신 선물로 성령의 임재하심입니다. 성령세례는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제자들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받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많은 news를 접하고 있습니다. news는 좋은 news도 있고 슬픈 news, 나쁜 news도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유익한 news도 있는 반면에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news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news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육신을 위한 news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거의 육신을 위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개발하는 모든 것들이 육신을 위한 것들입니다. 우리나라 한 사람이 지구밖에 갔다 오는데 그 비용이 310억 원이었습니다. 이것도 육신을 위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모든 것들이 육신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육신적인 것을 생각하지, 영적인 것에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전에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 사람들이 관심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가장 관심 있는 내용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 있는 것은 IMF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사람들의 삶의 관심은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육신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삶의 질도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일하러 오셨습니다.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히 죽게 되어있습니다. 죄(aJmartiva)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이것을 누구도 제거하지 못합니다. 오직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완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신들이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신들이 지켜주지 못합니다.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영원히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이 세상에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만 좋은 소리로 다독거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구원할 수도 없는데 구원한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담보로 큰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요구조건에 맞아 떨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반드시 길을 닦는 자 요한이 앞에 와야 합니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흘 만에 성경대로 부활해야 합니다. 하늘에 승천하셔서 다시 이 땅에 오셔야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복음의 메시지에는 일회적인 과거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충만한 능력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거듭남과 새 생명을 낳으며, 평화를 가져옵니다. 구원을 주십니다. 그리고 고통과 환난을 이길 힘을 얻게 하십니다. 복음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우며 실제적입니다.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신다는 현실성이 곧 복음의 내용이며 핵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기뻐할 때에 우리의 신앙과 삶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전도를 해야 합니다. 가족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현재는 가족으로 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믿지 않는 내 부모형제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 구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때문에 먼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굳센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복음의 참된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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