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플라톤주의主義/Neo-Platonism 플라톤에게 영감을 받은 헬레니즘 철학 학파 중 하나. 플로티노스는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자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선의 형상인 일자로부터 일련의 위계를 거쳐 유출된다는 점과 다시 一者일자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질을 경시하고 금욕적 실천을 함양하는 이 철학의 경향성은 수많은 교회 교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참조. 관념론, 존재의 사슬].
▪ 플로티노스/신플라톤주의(P'lwti'o" 205년-270년0는 고대 그리스의 후기 철학자이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작품 54편을 보존해서 전한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북아프리카 리코폴리스(Likopolis)에서 태어났고, 비교적 늦은 나이(28살)에 본격적으로 철학에 몰두했다고 전한다. 처음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전해 듣다가 플라톤의 사상에 크게 감동하였고, 이후 ‘플라톤 철학의 해석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플라톤 사상에 몰두해서 가르쳤기에 사람들은 그를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고 평한다. 플로티노스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활동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고, 후에 갈리에누스 황제와 그의 부인 살로니아의 신임을 받아 플라톤 왕국의 건설을 제안받기까지 했다. 몸소 네 번이나 신적 체험을 했다는 그는 만 49세의 나이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병으로 풍을 앓아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언제든 토론을 즐겼던 성격의 소유자라 때로는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고서라도 몰입하는 열정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 공정한 인품 때문에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를 후원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했던 만큼 육체에 비해 영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으니, 그의 가족 및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그의 중심개념 ‘하나(Hen)’가 플라톤의 사상과 차별화된 것이라고도 연구자들이 지적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 개념조차 플라톤이 알고 활용했던 개념이다(특히 《티마이오스》 안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찌 ‘하나’에서 다수가 흘러나왔는지?”하는 당시 새롭게 제기된 물음에 집중하여 사상을 펼쳤다는 사실에 있다. 소위 영원한 것이 그대로 완전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이 세상의 불완전한 다수로(다양한 것들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하는 ‘난해한 물음’에 대해 답변하고자 하였다. 중기 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아직 제기되지 않았던 이 같은 물음이 플로티노스로 하여금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관심사인 “유출(Emanation)” 개념에 몰두하도록 이끈 셈이다.
▪ 엔네아데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했던 만큼 육체에 비해 영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으니, 그의 가족 및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포르피리오스의 『플로티노스의 생애』 중에서). 다행히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에 의해 그의 작품 54편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전해져 온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스승의 뜻을 숙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숫자 9(enneas)는 ‘완성’의 의미를 띠었기에, 그렇게 스승의 가르침이 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작품을 가리켜 《엔네아데스(Enneades)》라고 칭한다. 6집으로 배치된 작품들의 내용 및 주제를 보더라도 포르피리오스가 막연하게 편집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제1집은 일상적인 주제, 제2집은 대자연, 제3집은 인간의 삶, 제4집은 영혼, 제5집은 정신, 제6집은 하나(궁극적인 선이자 존재)에 관하여 다룬 작품들로 구성했다.
▪포르피리오스(Parfuvrio", 234~305)는 3세기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티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인 자신의 스승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논문집인 《엔네아데스》를 출판하였다.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그가 다룬 주제들은 호메로스 서사시와 같은 서양 고전으로부터 철학, 논리학, 수학의 학문들과 기독교와 미트라교 등의 종교와 채식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고 다양하였다.
그의 저서 《입문서(Εἰσαγωγή Isagoge)》는 논리학과 철학에 관한 입문서로서, 이 책의 라틴어 번역본은 중세 논리학 교과서의 표준이 되었다. 유클리드의 《원론》에 대한 포르피리오스의 주해는 알렉산드리아의 파푸스에 의해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포르피리오스는 자신의 저작들 중 대여섯 저작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탁에서 유래한 철학(Philosophy from Oracles)》과 《기독교에 대한 반론(Against the Christians)》으로 인해,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의 저서 《님프의 동굴에 대하여(De antro nympharum)》에는 로마 제국 시대의 신비 종교였던 미트라 신비 가르침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포로피리오스는 페니키아의 무역도시 티로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선 당시의 풍습대로 아테네에 유학하여 롱기누스에게 배웠다. 그 후 로마로 나가, 플로티노스와의 해후(解逅)로 그에게 쏠려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의 논문을 정리하여 《엔네아데스》를 편집하고 스승의 학설 보급에 진력하였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저작했다고 전하는데, 그 태반은 단편적으로 전해졌다. 그는 채식주의자였다고 전하며, 그 관점에서 《육식의 기피(忌避)에 관하여》를 내놓았다. 또 기독교를 적대시하여(그리스도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만년에 여섯 아이를 가진 미망인 마르셀라와 결혼하였으나 그녀에게 보낸 서간에는 그의 이교(異敎)의 제신(諸神)에 대한 경건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호메로스의 시 해석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계 저서의 주해와 입문서 등이 있다.
▪ 이암블리코스
이암블리코스(Iamblichus: 고대 그리스어: Ἰάμβλιχος, c. 245-c. 325) 또는 이암블리코스 칼키덴시스(Iamblichus Chalcidensis)는 아시리아 태생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이다. 시리아파의 창시자.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주의의 기초 위에서 자연학 ·윤리학 ·형이상학의 연구를 통하여 철학과 신비학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이암블리코스는 후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암블리코스는 피타고라스 철학에 관한 개요서를 저술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암블리코스가 저술한 것으로 간주되는 저작으로는 《신성 마법 또는 이집트의 신비 가르침(Theurgia, or De Mysteriis Aegyptiorum》과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주의자의 삶(De Vita Pythagorica)》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이암블리코스는 온갖 종교적 의식, 신화를 포섭할 수 있는 종합적 다신교적 신학을 시도하였다.
▪프로클로스
프로클로스 리카이우스(412.2.8-485.4.17)는 계승자라고도 불린 고대 그리스 신플라톤주의자이고 마지막 주요 고전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아테네 학파의 마지막 영수(領袖)로, 그리스도교가 크게 득세하던 시기에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끝까지 수호하였다. 그의 사상은 일자(一者)의 부동적 성격과 동적 성격의 공존을 통한 상호 모순으로 인한 생성의 원리(일자→정신→영혼→물질)와 이를 관통하는 인식으로서 변증법을 발달시킨 그는 제일 세련되고 발전된 신플라톤주의 체계 중 하나를 세웠다. 그는 철학의 고전 시대의 거의 끝자락에 활약했다. 그의 주석서는 이후 중세사회의 철학 담론 형성에 일정 영향을 주었으나, 그가 가진 철학 사상은 인간의 자력(自力)을 통한 자기 해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졌기에 부분적으로만 허용되었다.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멈춰져 있는 것과, 무한히 운동하는 것 사이의 대립을 다룬다. 그는 이러한 대립 운동이 만유를 산출한다고 보았다. 그는 부단한 실천과 이성적 사고의 통일 노력을 통한. 인간과 일자와의 합일을 말한다. 이는 이론지(理論知)와 실천지(實踐知)의 합일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기에, 이후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프로클로스의 삼분적 부정 변증법은 금기시되었다.
프로클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이 정해진 궤도에 따라 움직인다는 전제, 즉 이심원과 주전원을 상정하여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이론을 비판하였으며, 행성의 움직임은 정신에 의한 영혼의 산출 운동의 복잡한 양상을 운동이라는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 운동이 프롤레마이오스가 정해놓은 궤도에서 이탈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중력 변수의 변화로 인해 행성 운동이 정해진 궤도에서 충분히 이탈할 수 있다는 현대 천문학의 관점과 유사하다.
서구 근세 이후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항하는 성격으로서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일부 과학자와 개혁적 신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파라켈수스, 쿠자누스, 브루노, 헤겔은 프로클로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프로클로스는 대립의 근원을 부동과 운동 사이의 관계로 보았고, 헤겔은 존재와 무 사이의 관계로 보았지만, 절대정신의 타재로서 현실, 변증법적 사유 도정으로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헤겔의 부정철학은 프로클로스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