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신하나님의 약속(출애굽기 1:12-14)
히브리사람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라바)하였습니다. 창성(라바)하였습니다. “번식하고 또 번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애굽 사람들은 근심하였습니다. 근심(쿠츠)하여는 “몹시 싫어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싫어하다. 강한 혐오감을 가지다”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애굽 정부는 억제정책으로 이스라엘 자손의 役事(역사)를 가혹하게 하였습니다. 아주 어려운 노역을 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생활양식과 번성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이 싫어하는 흙이기기를 시켰습니다. 벽돌을 굽게 하였습니다. 어려운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그 시키는 역사가 모두 힘들었습니다. 일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위해서 일을 시켰습니다. 애굽의 이 같은 잔인한 정책은 하나님의 예언 (창 5:13)의 성취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어디론가 탈출해야만 하는 배경이 되게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어리석은 정책을 통해서도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먼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낮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매를 맞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채찍은 결코 대수롭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는가?”(사1:5). 고난은 또한 우리가 영광의 깃발, 곧 하나님의 자녀 됨의 표지임을 깨닫게 합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히12:7) 채찍의 흔적은 모두 영광의 상징입니다. 고난은 또 세상에서 성도들이 유명해지도록 하기 위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자기들의 승전을 결코 축하받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성도들도 자기들의 고난을 예찬할 자격이 없습니다.
애굽의 왕들이 히브리사람들을 끝까지 섬기고 있다면 과연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까요?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그들이 기도할까요? 기도할 필요가 없고 구원자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오니까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려우니까 기도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고난으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히려 복이 됩니다. 나의 모든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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