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주인 예수그리스도
마태복음1:1-17
각 세대마다 나라의 막강한 주인공들이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볼 때 이집트의 바로나, 앗시리아의 앗수르바니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들이 이에 속합니다. 또한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황제들, 프랑스의 나폴레옹, 몽고의 징기스칸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철학자들, 종교가들 역시 많습니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노자, 순자, 그리고 근대현세사의 많은 철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한 학파로서 한 개의 종교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출생과 신분이 다릅니다. “그의 근본은 태초요 상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성 즉 그의 사람 되심의 족보를 마태가 기록하였습니다. 1절에서 17절을 보면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I. 왕으로 오신 예수님(1-16)
신약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1:1-17의 족보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3:23-38에 나오는 족보입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위에서 아래로 족보를 말합니다. 누가는 이에 비해 아래에서 위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왕통에서 나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Bivblo" genevsew" jIhsou' Cristou' uiJou' Daui;d uiJou' jAbraavm.)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쓸 때 저자들은 각각 그 대상을 정해서 기록했습니다. 즉 마태는 유대인에게, 마가는 로마인들에게, 누가는 소외계층에게, 요한은 헬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썼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썼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왕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손 중 한 분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7:12-16). 이사야도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공평과 정의로 이 세상을 다스릴 ‘한 아기’를 말했습니다(사9:6,7). 심지어 예수님 당시 유대종파들 간에도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통임을 제시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 전체와 연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계보의 처음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마태는 아브라함을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선조라는 점과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아브라함을 기록했습니다(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왕들은 다윗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사건으로 끝납니다(1:17). 그 뒤로는 사실상 왕들이 아니었습니다. 왕통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지 실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왕의 계보를 왕답게 잇는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 분이 곧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다윗-아브라함”으로 시작하고, 1:17을 보면 “아브라함-다윗-그리스도”로 끝내고 있습니다. 족보전체가 세 이름들로 감싸지고(inclusio)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스라엘 역사와 다윗왕조의 목표를 성취한 왕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3x14의 구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다윗부터 바벨론으로 갈 때까지 열 네 대, 바벨론으로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입니다. 그런데 3x14=42명인데 전부 헤아려보면 41명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14명이실제로는 17명입니다(대상3:10-17). 의도적으로 세 명을 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완성의 수 “7”의 곱(2)인 14를 세 번 반복함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준비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왕 중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 속에서 왕이란 백성들 위에 군림한 잔인한 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이란 백성들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백성들을 잡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국민들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왕과 다른 점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철저하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 위에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들을 위한 왕이었습니다. 왕은 먹을 것을 주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에 나가서 싸웠습니다. 백성들이 고난에 처하면 그 현장에 가서 직접 그것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왕이 이스라엘의 왕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왕이 이스라엘에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셨습니다. 전쟁에 직접 나서서 이스라엘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광야의 뜨거움을 막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를 막으셨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함께 하셨습니다. 홍해가 그들을 막았을 때는 갈라서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하시다시피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왕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다. 교회에도 계시고, 우리의 가정에도 계십니다. 내가 사업장에 있을 때 거기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학교에 있을 때 거기 계시고, 우리가 직장에 있을 때 거기 계십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를 도우시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첫 번째 기적을 베푸셨는데 곧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 사건입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오직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곳에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이 믿는 여러분에게 계속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셔서 새로운 세대를 여셨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3-6절을 보면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II.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3-6).
백악관을 무대로 연기를 펼쳤던 여인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sis/1929.7.28-1994.5.19)입니다. ‘재클린 리 부비에’로 태어나 바람둥이 케네디와 결혼을 함으로서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후에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자 당대의 선박왕이며 바람둥이인 오나시스에게 감으로써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 나라 그것도 세계적인 나라의 first lady였지만 존경을 받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재클린은 학창시절에 줄곧 우등생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후 여기자로 활약하면서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존 F. 케네디를 만나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8년 뒤인 1961년 미국의 first lady가 되었습니다. 31세의 우아한 first lady는 유행의 첨단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암살당하자 하루아침에 미망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미국 국민은 경악할 만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재클린이 그리스의 세계적인 부자 오나시스와 재혼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오나시스는 부정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바람둥이였습니다. 이런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미국의 국민은 자존심이 심히 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는 존경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계보 중에서 여러 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제외한 네 명의 여인들은 유대에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세대에서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들은 개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다말은 가나안 사람입니다(창38:6-30). 라합은 여리고 여인입니다(수2:1).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룻1:4). 우리야의 아내(삼하11:3).
이들은 결혼생활도 비정상적이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했습니다(창38:13-19).라합은 직업이 창녀였습니다. 룻은 재혼을 했습니다(룻4장). 우리야의 아내는 남편을 죽게 했습니다. 다윗과 간음했으며 그와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예수님의 족보에 이들이 올라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족보에서 파버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쌍놈이라는 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어릴 때 쌍놈이라고 욕을 하면 사람을 아주 비하한 욕이었습니다. 막돼먹은 남자를 상놈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족보란 몇 대조 선조께서 영의정을 지내셨고, 판서를 지내셨으며 하는 판에 상놈이족보에 있다면 당장 족보에서 파냈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본디 없는 여자들이 올랐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넷이나 올라있습니다. 유대귀족의 딸들도 아닙니다. 이방의 유명한 여자들도 아닙니다. 정상적으로 결혼한 여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간음하지 않으면 재혼의 경력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좋지 못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의 족보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마태는 이 사람들을 고스란히 기록했을까요? 치부를 가리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우리들 조상가운데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족보에서 파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왜 이들의 이름을 올렸습니까? 그냥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다윗은 솔로몬을 낳고”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기억하기 싫은 치부를 마태는 건드리고 있습니다. 자존심 상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와, 살몬과, 다윗입니다. 보아스는 과부와 결혼을 했으니까 그래도 한숨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와 다윗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에 다른 종교인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격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다말에게서, 살몬은 라합에게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이름을 굳이 넣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유대인들만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그리스도도 되십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자나, 야만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오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보아도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죄인들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방인, 세리, 창기들은 죄인으로 여겼습니다(마9:10). 이러한 유대의 규정으로 보아서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죄인들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9:13을 보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으며” 눅12:29절을 보면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죄입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죄인들입니다. 사람치고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이 죄 때문에 법원 검찰청이 밥을 먹고 삽니다. 경찰청이, 군인들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밥을 먹고 삽니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모든 것들이 죄 때문에 기인했습니다. 우리들을 통제하는 것들이 죄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비록 법원, 검찰, 경찰청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자신을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모두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에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우리조상 아담이 모든 인류에게 새카맣게 죄를 유전시켰습니다. 이 죄는 어떤 사람이 와서 없앨 수 없었습니다. 오직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입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갑자기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가 남편 없이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사단에게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박살 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짐을 말씀합니다.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고 빠른 것인지를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기사도를 발휘해서 하와는 절대로 죄가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러한 남자다움이 없었습니다.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주께서 저와 함께 하도록 만들어 주신 저 여자가”라고 말합니다. 속도 좋으신 하나님은 이제 하와에게 묻습니다. 이럴 때 하와도 남편을 위해서 총대를 메어야 했습니다. 어차피 자신이 먹게 했으니까 “남편은 죄가 없습니다. 모두 제가 한 일입니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와 역시 뱀에게 전가하였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했지만 죄를 짓고 나니 금방 달라졌습니다.
죄가 얼마나 잔인합니까? 최초의 가정에서 형제들 간에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밥그릇 뺏은 것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죄는 이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다말의 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 라합의 죄가 있습니다. 룻과 같이 저주를 받아야 할 죄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 밧세바와 같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의 왕으로서 그들을 심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채우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문을 영광의 문으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을 생명의 돌파구로 바꾸셨습니다. 이 모두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죄인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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