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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8-25

 

사람이 쓰는 것 중에서 전쟁무기가 가장 발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항공모함은 온통 무기로 구성된 배입니다. 미국의 2017722일부터 취역중인 Gerald R. Ford급 항공모함은 그 이력이 대단합니다. 길이가 333m입니다. 전체높이는 76m이며, 폭이 78m입니다. 흘수가12m인데 떠 있는 물체가 수면에 의해 구분되는 면에서 그 물체의 가장 깊은 점까지의 수심을 말합니다. 갑판은 25층이나 됩니다. 만재배수량은112,000톤입니다. 그러면서도 속력은 시속30노트 이상인데 시속50km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습니다. 승무원은 4,660명이며, 항속거리는 무제한입니다. 그 외에 무장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함재기만 해도 75대 이상이 실려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무기와 같이 작전을 한다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웬만한 국가에서나 소유할 수 있는 무기가 배 하나에 탑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현재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 곁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시간과 공간이 제한하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것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같이 해야 할 이유입니다.

미국은 면적이 983,1519, 인구 3,3480,5268, GDP국내총생산량 209366억달러 세계 1위입니다. 현재 지구에서 미국을 능가할 나라가 없습니다. 러시아나 중국이 땅 크기로 미국과 겨루려고 하지만, 어림없습니다. 국방비가 제1위로 2위에서 10위를 모두 합해도 미국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전 세계가 미국의 활동지역/activity area입니다. 모든 나라가 미국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계기다가는 파멸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예배할 때에는 삼위의 제2위이신 성자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는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Messiah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행하셨던 이적들 외에도, 다른 신적 권세들을 예수님이 행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성자체를 주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하지 못할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9:6:2:10:5:24), 그리고 죄를 범한 사람들을 말뿐만 아니라(9:2:2:5;5:20:7:48)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15:1-2).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특권입니다. 물론 사람도 사람에게 대하여 지은 죄를 용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만이 그 죄를 용서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14:13).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심을 밝히셨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자신이 응답하실 것임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신 분만이 기도를 들으실 수 있기 때문에 기도응답을 약속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실례들이 인용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드려진 기도의 실례들은 사도행전1:24, 7:59, 9:10-17, 고린도후서12:8, 데살로니가전서3:11, 데살로니가후서2:16 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그들이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셨습니다. 곧바로 그를 찬양하던 어린아이들을 격노한 대제사장들이 잠잠케 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찬양을 당연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8:2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편 8:2절을 인용한 것에 관하여 D. A. Carson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찬미하는 것을 원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은 대단하셨다. 1.그의 대답은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찬미할 성경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자. 2.동시에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나중에 (특별히 부활 후에) 그 사건을 음미하고서 예수님의 그 대답에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린아이들의 호산나 찬미는 하나님이 아니라 Messiah이신 다윗의 아들에게 드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Messiah 됨을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의 찬미를 옹호하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도마가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찬미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이 같은 경배와 찬미를 받아들이신 경우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그 자신의 신성을 옹호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십니다.

요한복음 14: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신앙의 합당한 대상으로 자신을 성부와 동일선상에 놓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신성모독입니다. 이 같은 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선하심이 손상되지 않을 유일한 근거는 그의 하나님 되심을 확증하는 것뿐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가르쳐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듯 자기를 신뢰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신적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특권을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속성으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권과 전능성

우리 주님께서 우주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과 권능을 소유하셨습니다. 자신이 택한 자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는 특권과 권능을 가지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생명을 버릴 권세와 다시 생명을 취할 권세도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권세와 특권에 대한 주장들을 어떤 다른 사람이 했다고 하면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배와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우리 주님께서 가지셨습니다.

 

편재성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고 약속하신 때, 그는 임마누엘의 호칭을 원용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백성과 항상 인격적으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성령의 권능과 임재를 통해서 뿐 아니라 편재하시는 구주로서 스스로 임재하십니다.

전지성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1:48)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깜짝 놀라게 했을 때, 그는 일반 사람의 지식을 훨씬 뛰어 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식의 수준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들으며 응답해 주는 특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했을 때, 자신에게 전지성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밤낮으로 드려지되 수세기에 걸쳐 시도 때도 없이 드려지는 제자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들을 들어주고, 모든 기도 제목을 하자 없이 간청자와 잘 연결 지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 응답할 수 있는 자는 스스로 전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존재의 깊은 것까지를 아는 지식이 자기에게 있음을 예수님이 주장하신 때(11:27), 그는 "아들"로서 전지성을 온전히 소유한 것으로 주장하신 것입니다.

 

유대의 아하스 왕 시대에는 암울했습니다. 시리아와 사마리아가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시리아 북쪽에는 앗수르가 유대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는 더 힘써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유대는 하나님만 믿으면 어떤 위협도 없을 것이며, 戰亂에도 휩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숫제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람의 마지막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들 두 국가는 모압, 암몬, 에돔, 유다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앗수르의 서남진 정책을 저지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동맹하자고 했습니다. 이에 모두 동조했는데, 유다만 거절했습니다. 아하스는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너희들과 같이 해”. 아하스는 앗수르의 힘을 더 의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때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해서 유대를 침범했습니다. 두 나라의 갑작스런 공격에 유다는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버렸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쟤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하스 왕은 강대국인 앗수르를 의지고 하셨습니다. 높은데서든지 낮은데서든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서나 구하면 응답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세상세력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언약입니다. 임마누엘은 일차적으로 유다백성을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훗날에는 Messiah를 보내시겠다는 언약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laeWnM;[i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우리가 통상 Immanuel하면 예수님 출생 때 만을 기억하기 쉽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예언했고, 마태복음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Immanuel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여러 곳에서 나타내셨습니다. Immanuel의 하나님은 이사야 이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의 언약 백성에게 Immanuel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창세기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세기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출애굽기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애굽기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출애굽기23:20,24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여호수아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사무엘하7: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7). 하나님께서는 야곱(28:15)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3:12)와도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소유로 취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5-6).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항상 보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23:20,24).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5).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삼하7:9).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나타나셨던 것처럼 임재하십니다. 성육하신 아들로 처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19절을 보면 !Iwshvf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약혼한 Maria가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Maria로서는 이미 가브리엘천사로부터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Maria도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Maria가 임신했는데 !Iwshvf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Iwshvf은 두 가지 방법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Maria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Maria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가만히 끊는 것입니다. !Iwshvf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Maria가 왜 그랬을까? 착한 Maria가 왜 그랬을까? 나는 너무나 사랑하는데 Maria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그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20절에서 23절을 보면 !Iwshvf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지시를 받습니다. Maria 데려오기를 두려워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Iwshvf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24절에서 25절을 보면 !Iwshvf의 고민이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그랬네! 그러면 그렇지! Maria가 누군데 하면서 !Iwshvf은 고민해서 해방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초자연적으로 이 땅에 들어오셨습니까?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백성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서양 종교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인식입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지만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성이 구심점이 된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태는 Messiah의 거룩한 족보를 다윗에게서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더 멀리 올라갈 수 있도록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였습니다. 누가는 더 합니다.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그 이상은 노아요그 이상은 아담이요라고 하면서 인류의 조상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복이라는 것을 암시해 놓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복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수록된 네 여인 룻, 다말, 라합, 우리야의 아내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Messiah 의 탄생을 위해서 이방인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동쪽에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온 박사들이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이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저희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2세기경부터 교회를 새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로 부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천사가 !Iwshvf에게 Maria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름을 반드시 예수/!Ihsou'"라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백성/to;n lao;n aujtou'을 위함이라 했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tw'n aJmartiw'n aujtw'n)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거론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과 죄라는 것과 구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류 즉 만인구원이 아닙니다. 자기백성이며(3:16), 자기 양(10:11)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전쟁무기를 의지합니다(20:7). 혹은 육체의 힘을 의지합니다. 얼마나 인간이 상승되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식, 명성, 지위, 훌륭하고 정교한 기계, 영향력 있는 친구, 기개가 뛰어난 사람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단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최대의 적은 죄입니다. 이 죄가 우리들의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죄가 인간을 무참히 파괴시킵니다. 우리나라의 한 해 술 소비량은 소주102, 맥주164병입니다. 음주행태위험도는 5점 만점에 3점입니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술로 인한 범죄도 엄청납니다. 아마 술 마시는 사람들에게 1년간 술을 못 마시게 한다면 난리일 것입니다. 왜 이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이 죄는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어 파괴시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들이 모두 죄입니다. 우리들의 행위 그 자체가 죄입니다. 죄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표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죄들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의 피와 성령의 거룩하게 성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합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위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참된 행복의 구원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소유하는 구원입니다. 참 자유를 누리는 구원입니다. 영광으로 충만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구원입니다. 기도할 때 응답받는 구원입니다. 영향력 있는 간증을 다른 보일 수 있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영혼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꼭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구원하다/swvzw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존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심각한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위험은 전쟁 중 또는 바다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는 위험한 질병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붙여진 명칭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성부에 대한 명칭들로는 태양, 방패, 강한 요새, 피난처, 운명 등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들로는 세상의 빛, 생명의 양식, , 진리, 생명 등입니다. 성령에 대한 명칭들로는 진리의 성령, 거룩한 영, 영광의 영, 은혜의 영, 보혜사, 인침의 영, 증거의 영 등입니다. 이 모두의 이름들이 무엇 때문에 나열되어 있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우리에게 미칠 때 Immanuel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보호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은총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분과 연합함으로 임마누엘의 은총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실제적인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존재가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자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했을 때, 어김없이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셔서 도우셨습니다.

 

Closing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우리 생애전반에 적용되는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의 이름은 예수님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분에게만 적용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대단히 밀접한 이름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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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1-8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놀라운 일 들 중 한 사건은 예수님의 변형 사건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의 변형 사건은 큰 인상을 주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예수님의 변형 사건을 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생각할 때 몇 가지의 진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1:14) 라고 요한이 말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단지 이 땅에 있는 사람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6:13) 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는 많은 답변을 들으셨습니다.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이었으며 예수님 또한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도 요한과 예수님은 정반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과 떨어져서 살았으나, 예수님은 무리와 어울려 살았습니다. 요한은 나실인(6/1:15)이었기에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결혼 잔치 집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인격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또 질문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5)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그 증거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이 책(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없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택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 붙여진 이름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10:36). “나는 선한 목자다”(11). “내가 문이니”(9).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6:35), 그리고 내가 참 포도나무요”(15:1)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주님의 영광과 신성은 그의 행하신 기적 속에서도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결혼잔치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렇게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 을 나타내시매”(1) 주님의 이름과 기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3:17). 변화 산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여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17:5)고 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늘로부터 그의 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12:27~30).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때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17:4)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17:5)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우선권을 드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절대적인 우선권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첫 번째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나,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같은 수준에 놓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 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1,2).

우리는 베드로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단지 우선순위와 두드러진 자리를 제공하지 말고, 절대적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러한 자리를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은 아들의 영광을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은 히브리적 배경에서 하나님 자체 또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때 이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 또는 하나님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게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의 칭호로서 하나님의 아들은 절대적으로 삼위일체인 성부와 성령과 성자 예수님은 그 권위와 영광이 동등하며, 동일한 영원성을 지니며, 동질적이라는 사실을 동시대는 물론 오고 오는 세대에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형하셨을 때 그것은 영광이 비추이는 곳에 들어가셔서 빛을 반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변형되사/metemorfwvqh는 다른 형상으로 바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변형기사는 인지 가능한 변화의 실례였습니다. 지상적 형태에서 천상적 형태로 변형한 이 기적은 옷의 광채로 나타났습니다. 이 변형은 헬라적 의미의 변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변형되었다는 말은 종말론적 사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새 세대에 의인에게 약속된 일이 이미 이 세상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가장 친밀한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인간적 외모가 일순간에 변모된 세계에서의 천상적 존재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실재에 대한 예견이자 보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로서 궁극적 구원의 소망을 명백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길의 목적이 위대한 성취자의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였을 때,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사무엘상 4:21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은 성전을 건축하였고 솔로몬은 이 성전을 봉헌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가득하였습니다(왕상8). 그러나 그 백성이 다시 범죄 했습니다.

에스겔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떠나버린 성전을 바라보는 에스겔의 모습을 발 견할 수 있습니다.

 

8:1-4 제 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내가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보던 이상과 같더라

 

9:1-4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10:1-7,18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 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자에게 명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취하여 가는 베옷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가지고 나가는데 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1:22-25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주의 신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신의 이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보는 이상이 나를 떠난지라 내가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로 고하니라

 

이 영광은 이 땅에 되돌아오지 않다가 예수님의 탄생하심에서 영광이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변형은 단지 역사적 사실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믿는 자들 속에 충만하게 거하시므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7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중보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도 적어도 여덟 번이나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시옵소서”(1). 기도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2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트럭을 운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시험공부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방문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1031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의 영광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들의 영광을 기억하였고 기록하였습니다.

 

Closing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의 영광이 빛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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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인 예수그리스도

마태복음1:1-17

각 세대마다 나라의 막강한 주인공들이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볼 때 이집트의 바로나, 앗시리아의 앗수르바니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들이 이에 속합니다. 또한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황제들, 프랑스의 나폴레옹, 몽고의 징기스칸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철학자들, 종교가들 역시 많습니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노자, 순자, 그리고 근대현세사의 많은 철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한 학파로서 한 개의 종교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출생과 신분이 다릅니다. “그의 근본은 태초요 상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성 즉 그의 사람 되심의 족보를 마태가 기록하였습니다. 1절에서 17절을 보면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I. 왕으로 오신 예수님(1-16)

신약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1:1-17의 족보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3:23-38에 나오는 족보입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위에서 아래로 족보를 말합니다. 누가는 이에 비해 아래에서 위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왕통에서 나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Bivblo" genevsew" jIhsou' Cristou' uiJou' Daui;d uiJou' jAbraavm.)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쓸 때 저자들은 각각 그 대상을 정해서 기록했습니다. 즉 마태는 유대인에게, 마가는 로마인들에게, 누가는 소외계층에게, 요한은 헬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썼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썼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왕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손 중 한 분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7:12-16). 이사야도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공평과 정의로 이 세상을 다스릴 ‘한 아기’를 말했습니다(사9:6,7). 심지어 예수님 당시 유대종파들 간에도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통임을 제시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 전체와 연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계보의 처음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마태는 아브라함을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선조라는 점과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아브라함을 기록했습니다(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왕들은 다윗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사건으로 끝납니다(1:17). 그 뒤로는 사실상 왕들이 아니었습니다. 왕통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지 실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왕의 계보를 왕답게 잇는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 분이 곧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다윗-아브라함”으로 시작하고, 1:17을 보면 “아브라함-다윗-그리스도”로 끝내고 있습니다. 족보전체가 세 이름들로 감싸지고(inclusio)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스라엘 역사와 다윗왕조의 목표를 성취한 왕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3x14의 구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다윗부터 바벨론으로 갈 때까지 열 네 대, 바벨론으로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입니다. 그런데 3x14=42명인데 전부 헤아려보면 41명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14명이실제로는 17명입니다(대상3:10-17). 의도적으로 세 명을 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완성의 수 “7”의 곱(2)인 14를 세 번 반복함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준비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왕 중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 속에서 왕이란 백성들 위에 군림한 잔인한 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이란 백성들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백성들을 잡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국민들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왕과 다른 점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철저하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 위에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들을 위한 왕이었습니다. 왕은 먹을 것을 주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에 나가서 싸웠습니다. 백성들이 고난에 처하면 그 현장에 가서 직접 그것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왕이 이스라엘의 왕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왕이 이스라엘에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셨습니다. 전쟁에 직접 나서서 이스라엘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광야의 뜨거움을 막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를 막으셨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함께 하셨습니다. 홍해가 그들을 막았을 때는 갈라서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하시다시피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왕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다. 교회에도 계시고, 우리의 가정에도 계십니다. 내가 사업장에 있을 때 거기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학교에 있을 때 거기 계시고, 우리가 직장에 있을 때 거기 계십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를 도우시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첫 번째 기적을 베푸셨는데 곧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 사건입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오직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곳에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이 믿는 여러분에게 계속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셔서 새로운 세대를 여셨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3-6절을 보면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II.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3-6).

백악관을 무대로 연기를 펼쳤던 여인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sis/1929.7.28-1994.5.19)입니다. ‘재클린 리 부비에’로 태어나 바람둥이 케네디와 결혼을 함으로서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후에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자 당대의 선박왕이며 바람둥이인 오나시스에게 감으로써 “재클린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 나라 그것도 세계적인 나라의 first lady였지만 존경을 받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재클린은 학창시절에 줄곧 우등생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후 여기자로 활약하면서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존 F. 케네디를 만나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8년 뒤인 1961년 미국의 first lady가 되었습니다. 31세의 우아한 first lady는 유행의 첨단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암살당하자 하루아침에 미망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미국 국민은 경악할 만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재클린이 그리스의 세계적인 부자 오나시스와 재혼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오나시스는 부정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바람둥이였습니다. 이런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미국의 국민은 자존심이 심히 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는 존경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계보 중에서 여러 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제외한 네 명의 여인들은 유대에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세대에서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들은 개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다말은 가나안 사람입니다(창38:6-30). 라합은 여리고 여인입니다(수2:1).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룻1:4). 우리야의 아내(삼하11:3).

이들은 결혼생활도 비정상적이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했습니다(창38:13-19).라합은 직업이 창녀였습니다. 룻은 재혼을 했습니다(룻4장). 우리야의 아내는 남편을 죽게 했습니다. 다윗과 간음했으며 그와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예수님의 족보에 이들이 올라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족보에서 파버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쌍놈이라는 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어릴 때 쌍놈이라고 욕을 하면 사람을 아주 비하한 욕이었습니다. 막돼먹은 남자를 상놈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족보란 몇 대조 선조께서 영의정을 지내셨고, 판서를 지내셨으며 하는 판에 상놈이족보에 있다면 당장 족보에서 파냈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본디 없는 여자들이 올랐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넷이나 올라있습니다. 유대귀족의 딸들도 아닙니다. 이방의 유명한 여자들도 아닙니다. 정상적으로 결혼한 여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간음하지 않으면 재혼의 경력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좋지 못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의 족보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마태는 이 사람들을 고스란히 기록했을까요? 치부를 가리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우리들 조상가운데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족보에서 파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왜 이들의 이름을 올렸습니까? 그냥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다윗은 솔로몬을 낳고”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기억하기 싫은 치부를 마태는 건드리고 있습니다. 자존심 상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와, 살몬과, 다윗입니다. 보아스는 과부와 결혼을 했으니까 그래도 한숨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와 다윗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에 다른 종교인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격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다말에게서, 살몬은 라합에게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이름을 굳이 넣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유대인들만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그리스도도 되십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자나, 야만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오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보아도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죄인들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방인, 세리, 창기들은 죄인으로 여겼습니다(마9:10). 이러한 유대의 규정으로 보아서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죄인들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9:13을 보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으며” 눅12:29절을 보면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죄입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죄인들입니다. 사람치고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이 죄 때문에 법원 검찰청이 밥을 먹고 삽니다. 경찰청이, 군인들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밥을 먹고 삽니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모든 것들이 죄 때문에 기인했습니다. 우리들을 통제하는 것들이 죄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비록 법원, 검찰, 경찰청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자신을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모두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에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우리조상 아담이 모든 인류에게 새카맣게 죄를 유전시켰습니다. 이 죄는 어떤 사람이 와서 없앨 수 없었습니다. 오직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입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갑자기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가 남편 없이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사단에게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박살 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짐을 말씀합니다.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고 빠른 것인지를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기사도를 발휘해서 하와는 절대로 죄가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러한 남자다움이 없었습니다.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주께서 저와 함께 하도록 만들어 주신 저 여자가”라고 말합니다. 속도 좋으신 하나님은 이제 하와에게 묻습니다. 이럴 때 하와도 남편을 위해서 총대를 메어야 했습니다. 어차피 자신이 먹게 했으니까 “남편은 죄가 없습니다. 모두 제가 한 일입니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와 역시 뱀에게 전가하였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했지만 죄를 짓고 나니 금방 달라졌습니다.

죄가 얼마나 잔인합니까? 최초의 가정에서 형제들 간에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밥그릇 뺏은 것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죄는 이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다말의 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 라합의 죄가 있습니다. 룻과 같이 저주를 받아야 할 죄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 밧세바와 같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의 왕으로서 그들을 심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채우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문을 영광의 문으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을 생명의 돌파구로 바꾸셨습니다. 이 모두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죄인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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