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룟 유다의 가치 없는 죽음(마태복음27:3-10)
사람들이 정치판에 들어가면 그 당에 속한 수장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판에서 나와야 합니다. 따라서 정치판은 패거리들의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정치철학이 좋다고 해서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설득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아도 하고자 하는 사업들이 사문화되어 버립니다. 양상은 달라도 유다는 애초에 산헤드린과 나누었던 밀담과는 뜻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기획재판을 받고 정죄됨을 인하여 무엇이 잘못되어가는 상황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무죄한 피값을 받았음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무를 것을 표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호구(虎口)에 들어온 먹이를 풀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돈을 다시 주고 예수님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유다는 가책이 되어 예수님을 판값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버리고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이에 돈에 환장했던 제사장들이었지만 피값을 쓸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값이었던 돈을 더러운 돈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즉 비율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돈을 버려진 땅인 토기장이의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였지만, 그 밭은 후에 그들의 죗값을 묻는 ‘피밭’(1:19)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판값이 예수님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지만, 그들은 묘지를 볼때마다 피 값으로 샀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이 행위는 예레미야가 한 말을 성취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에는 ‘정가한 자’라는 말이 없습니다. 스가랴11:12,13절에 있습니다. 은 30은 스가랴당시 노동자의 값이었습니다. 스가랴가 노동한 대가로 은30을 던져주듯이 예수님의 몸값 은 삼십도 토기장이에게 던져졌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와 가룟유다를 비교해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강도 높게 부인했습니다. 어쩌면 유다와 거의 같은 죄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죄가 작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울자 심히 통곡했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살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실 얼굴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했느냐? 안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회개한 베드로는 후에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영원한 배반자로 남습니다. 그는 돈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베드로의 죽음과 유다의 죽음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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