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1)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8)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6)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11.10.10
    모세와 대면하신 여호와
  2. 2010.09.23
    참고한 책
  3. 2010.09.23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4. 2010.09.22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
  5. 2010.09.21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종교지도자들
  6. 2010.09.20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주님의 제자들
  7. 2010.09.19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무덤을 지켰던 로마군인들
  8. 2010.09.17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모세와 대면하신 여호와(출애굽기33:7-11)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 하셨습니다.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는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하심에 대해서 모세는 장막을 취하였습니다. 이 장막은 진밖에 쳤습니다. 진과 멀리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장막을 회막이라 불렀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은 모두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장막은 성막의 성소입니다(출25장). 왜냐하면 계약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성소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35장). 이 장막에 구름기둥이 내려왔습니다. 따라서 이 회막은 일시적인 성소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장막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진밖에 있는 장막에 와야 했습니다(카일·델리취).

이렇게 진밖에 장막을 친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가 장막을 진과 떼어 놓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보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죄를 충분히 깨달아 그들이 돌이키기( bWv)를 원하신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여호와를 만나볼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계약갱신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모세가 장막에 나갔을 때 백성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장막위에 내려와 문 앞에 서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각기 자기 장막 문 앞에서 여호와 앞에 경배하였습니다.

그런데 11절에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회막 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슬슬 성경의 저자는 여호수아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신앙의 회복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실상 경제적인 회복보다, 다른 어떤 것의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앙의 회복입니다. 신앙이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것들이 회복되거나 주어진다면 신앙의 면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회복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도 그렇고 이스라엘 편에서도 그랬습니다.

이토록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금송아지 사건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회복하는데는 시간이 걸렸고 이스라엘의 극한 회개였습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그들의 살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스라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우선 3000명가량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여졌습니다. 그리고도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만큼 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골을 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언약도 미루어졌습니다. 앞으로 진군해야 할 입장인데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하나님과 대치상태로 있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한걸음을 못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And

참고문헌

Dr, A. 코 편.『관주 탈무드』원응순 역 서울: 圖書出版 南星, 1988.

H.H 할레이.『성서핸드북』박양조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3.

J. 예레미야스.『예수시대의 예루살렘』한국신학연구소 번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James M. Freeman.『성경속의 생활풍속 따라잡기』남송현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8.

W. A. 반 게메렌.『예언서 연구』김의원‧이명철 옮김 서울: (주)엠마오, 2004.

가스펠서브편.『성경관용어사전』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권성수. “메시야의 수용과 거부”『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기독교연대표』서울: 기독교문사, 1985.

노르만 L. 가이슬러. 『기독교 윤리학』위거찬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데릭 윌리엄스.『IVP성경사전』, 218.

라이온社 편.『교회사핸드북』송광택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9.

래리 리처즈.『735가지 성경난제 뛰어넘기』이길상 옮김 서울: (주)아가페출판사, 2004.

레온우드.『이스라엘의 역사』김의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레이몬드 딜러드·트렘퍼 롱맨.『최신구약개론』박철현 옮김 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로버트 L.레이몬드.『최신조직신학』나용화·손주철·안명준·조영천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루이스 뻘콥.『基督敎神學槪論』신복윤 역 서울: 예수교서회, 1980.

매튜 헨리.『마태복음/상』, 고영민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2.

매튜 헨리.『마태복음/하』, 고영민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1.

밀라드 J. 에릭슨.『조직신학개론』나용화·황규일 共譯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박용규.『초대교회사』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朴亨龍.『朴亨龍博士著作全集IV』서울: 한국기독교교육원연구원, 1988.

朴炯庸. “하나님 나라의 실현”『神學正論』합동신학교 신학정론 편 서울: 바라, 1990.

변종길.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개념”『聖經과 神學』한국복음주의신학회논문집 서울: 기독지혜사, 1993.

변종길. “파송받은 전도자의 자세”『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벤 워더링턴III. “마가복음의 관점과 구조”『마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7.

성주진.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학개·스가랴·말라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스탠리 그렌츠.『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신원하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학생회출판부, 2004.

시오노 나나미.『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김석희 옮김 서울: 한길사, 2000.

시오노 나나미.『로마인이야기6권』김석희 옮김 서울: 한길사, 1998.

시오노 나나미.『로마인이야기8권』김석희 옮김 서울: 한길사, 2001.

신기철․신용철 편.『새 우리말 큰사전』 서울: 삼성출판사, 1981.

심상범. “요한복음의 주제와 구조”『요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7.

양용의. “누가복음의 장르, 신학, 구조”『누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7.

양용의. “예수는 누구이신가, 어디로부터 오셨는가”『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양용의. “성전파괴와 마지막 때에 대한 교훈”『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에두아르트 로제.『신약성서 배경사』박창건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2005.

오병세.『구약성경신학』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9.

오픈성경편찬위원회 편.『오픈성경』서울: 아가페출판사, 1990.

윌렴 헨드릭슨.『헨드릭슨주석누가복음(上)』김유배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5.

윌렴 헨드릭슨.『헨드릭슨주석누가복음(下)』김유배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5.

윌렴 헨드릭슨.『헨드릭슨주석마태복음(上)』김만풍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5.

윌렴 헨드릭슨.『마태복음(중)』이정웅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5.

윌렴 헨드릭슨.『헨드릭슨주석마태복음(下)』김경래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5.

유상섭.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기적들”『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유상섭.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이규태.『한국인의 의식구조①』서울: 신원문화사, 1991.

이병용.『비유를 산다』 서울; 요단출판사, 1999.

이원희, 신현주.『성서속의 역사와 지리』 서울: 기독교문사, 1990.

이학재. “여호와의 종의 노래”『선지서 자료모음집2』.

장동수.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누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7.

장종길.『백투더바이블(레위기)』 서울: 그리심, 2003.

전호진. “복음주의 관점에서 본 종교 다원주의”『聖經과 神學 제11권』서울: 기독교문사, 1992.

정규남.『구약신학의 맥』서울: 도서출판두란노, 1996.

정훈택. “산상수훈: 하늘나라의 복음”『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제임스 패커.『성서시대의 일상생활』노광우 옮김 서울: 성광문화사, 1993.

조병수. “세례요한의 사역과 시험받으시는 예수”『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존 머레이.『조직신학II』박문재 옮김 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존 칼빈.『기독교강요1권』로고스 번역위원 譯 서울: 로고스; 1987.

존 칼빈.『기독교강요4권』로고스 번역위원 譯 서울: 로고스; 1987.

존 칼빈.『新舊約聖經註釋1/공관복음』존·칼빈聖經註釋出版委員會 譯 서울: 聖書敎材刊行社, 1980.

존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편.『칼빈聖經註釋/공관복음II』서울: 聖書敎材刊行社, 1995.

챨스 하지.조직신학I김귀탁 옮김 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2.

카일·델리취.『舊約註釋/사무엘상하』최성도 역 서울: 기독교문화사, 1992.

캠벨 몰간.『주님의 비유와 은유I』김진우 옮김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7.

캠벨 몰간.『주님의 비유와 은유II』김진우 옮김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4.

하문호.『교의신학 기독론4권』서울: 그리심. 2002.

해롤드 L. 윌밍톤.『윌밍톤성경연구/구약』김기희 외 서울: 나침반사, 1990.

해롤드 L. 윌밍톤.『윌밍톤성경연구/신약』김기희 외 서울: 나침반사, 1991.

허버트 로키어. 『남자/성경연구올시리즈』이정복···외., 로고스, 1982.

허버트 로키어.『여자/성경연구올시리즈』이정복···외., 로고스, 1983.

허주. “마태복음의 문학적 성격”『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허주. “하나님 나라의 비밀”『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서울: 사단법인두란노, 2006.

헤르만 호온.『예수님의 교육방법론』박영호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헨리 디이슨.『조직신학강론』권혁봉 譯 서울: 생명의말씀사. 1975.

And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마태복음28:16-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든 의심을 모두 불식시키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열 한 제자를 갈릴리의 한 산에서 소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18절을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선언했습니다. ejdovqh moi pa'sa ejxousiva ejn oujranw'/ kai; ejpi; th'" gh'".(에도쎄 모이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하늘과 그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 이 말씀은 이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님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수여받은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선언함으로서 온 세계에 복음을 선포케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그의 제자들이 순간순간 날마다 그분을 의지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당시뿐만 아니라 사도시대에 이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주의 주,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명령은 ‘가서/명령형’ ‘그러므로’ ‘제자를 삼아/제자를 삼아’ ‘모든 족속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가서 소중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제 전 세계로 복음이 전해져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는 주님께서 명하셨으므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힘을 주시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가야 했습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단순히 복음만 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완전히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제자삼아야 합니까? ‘모든 족속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심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어려움들을 주님께서 모르쇠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항상 같이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한다는 말씀입니다. 항상(pavsa" ta;" hJmevra"/모든 날) 같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약한 우리들을 혼자 두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께서는 은밀한 방법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일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자꾸 확장되어갑니다. 세상은 점점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And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마태복음28:11-15)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특히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 계몽주의 신학자들, 자연주의 신학자들이 반대했습니다. 톨란드(John Toland)와 콜린스(Anthony Collins)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라이마루스(Hermann S. Reimarus)의 영향을 받은 렛싱(Lessing)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모두 배제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못했습니다. 라이마루스는 렛싱, 스트라우스(D. F. Strauss),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라이마루스와 렛싱은 예수님의 부활을 시체도적설로, 슈바이처는 졸도설로 일축했습니다.

시체(屍體) 도적설(盜賊說)

사람들은 생각할 때 예수님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해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시체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적질했다고 한다면, 마태복음28:12-15의 설명을 꾸미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 당시에 유명한 로마군인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로마 군인들이 허수아비였는가?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인봉한 돌을 굴려 낼 수 있겠는가? 로마 군인들이 일제히 잠들었어야만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자기목숨을 부지하기도 급급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있었습니다.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은 로마 군인들이 일제히 잠이 들었다면 어떻게 제자들이 도적질해 간 것을 알 수 있는가? CCTV도 없었는데 어떻게 감식할 수 있었을까?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요20:19). 또한 제자들이 외부에 나가서 자신들이 꾸민 것으로 알고 있는 조작사건을 역사적 실제의 사실로 전파했다고 믿어야 하고, 그들이 박해나 처형의 위협을 당할 때도 조작된 사건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나리오는 불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적들(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없애기로 정했다면 당연히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라도 죽여야 했는데 그들이 도적질해 가서 살려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예수의 시체를 그들의 수중에 넣었거나 그 소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 증거물을 제공하였을 것이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하기 시작할 때에 거짓을 전파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증인들을 내 놓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빈 무덤의 사실을 시체도굴범의 소행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가능성이 희박한 변명일 뿐입니다. 아예 가치가 전혀 없는 주장일 뿐입니다. 만일 도굴범들이 그런 일을 시도했다면 로마 파수꾼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하였을 것입니다. 혹 성공적으로 침투하여 그 무덤을 털었더라도 우선 그 시체의 싼 것을 벗기고 그것들과 함께 벌거벗은 예수의 시체를 취하고 또 그 다음에는 그 뒤에 전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에 시체 도적설은 거짓말일 뿐입니다(요20:6-7).

졸도설(卒倒說)

알버트 슈바이쳐의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견해에 대해서 다비드 슈트라우스(David Strauss)가 치명상을 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견해를 채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졸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상에서 실신상태에 빠졌다가 무덤에서 깨어나 그 파수꾼들을 지나 제자들에게 왔는데, 제자들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후 예수는 금방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보통 상식적인 선을 넘어야 가능합니다. 예수의 사형집행을 책임 맡은 사람들은 사형집행자로서도 멍청한 사람들이었 뿐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들을 최종 확인하는 행위(죽은 자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요19:31-33)를 집행한 감독관들도 멍청한 사람들이었어야 합니다.

예수는 손과 발에 몹시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 것은 물론이고 아주 심한 고통을 당하고 신체적으로 몹시 약해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만으로도 엄청난 고통과 압박을 받아 온 신체 기관이 심한 쇼크를 받았습니다. 또 인간적인 관심에서 도외시되고, 또 몸의 영향상태가 몹시 안 좋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손과 옆구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장사지낸 일들을 겪었습니다. 무덤에는 서늘한 냉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 상처 입은 손으로 무덤의 입구에 놓인 거대한 돌들을 밀어내야했습니다. 곧바로 시내로 들어가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까지 가서 자신을 생명의 주라고 확신을 시켜야 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휴 스콘필드(Hugh Schonfeld)의 유월절 음모(The Passover Plot), 도 노반 죠이스(Dnovan Joyc)의 예수의 문서(The Jesus Scroll) 등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And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종교지도자들(마태복음28:11-15)

로마 군인들이 보초를 서다가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되어진 일들을 보고.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 진원지의 입부터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1절에서 15절을 보면 이들은 정말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자격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1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로마군인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몇이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즉각 그 사실 때문에 장로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간단하고 사악한 회의였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입을 막자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그를 죽이고자 했던 자신들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 가지 안을 내놓았습니다. 많은 돈을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명의 보초가 있었고, 보초가 잠을 잤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안은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갔다는 말을 퍼뜨림으로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막고, 무덤이 비어 있다는 충분한 설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안은 로마군인들의 안전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거짓말이 만일에 총독의 귀에 들리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마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을 유대인을 위해서 썼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들의 거짓말이 오늘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두루 퍼졌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라고 했지만, 그들 산헤드린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깡패들이었습니다. 협잡꾼들이었습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작자들이었습니다. 최소한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진지하게 회의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믿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검증을 해야 했습니다. 저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께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하나님께 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하나님께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은 모세의 자리로는 모자라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갈릴리의 어떤 잘못된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황, 그리고 자신들이 큰 교회의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의 거드름은 정말 볼만합니다. 사람들을 자신들이 함부로 예단(豫斷)하고 심판(審判)합니다. 정말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코로 숨 쉬는 사람임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And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주님의 제자들(마태복음28:16,17)

마태는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시던 산에서 예수님을 보았지만,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16절).

마가요한은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가 남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말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에 11명의 제자가 음식 먹을 대에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믿음 없는 것(불신)과 마음이 완악한 것(완고함)을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살아나신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막16:12-14).

누가는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마태와 마가와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무덤에 갔다 온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허튼 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무덤으로 달여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그를 감쌌던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된 일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갔다고 했습니다(눅24:10-12). 또한 그 날에 제자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들도 부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부활의 소문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헤어졌습니다. 후에 11제자들이 모였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확실히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제자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역시 마리아들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시신을 우리가 찾을 수 없다하니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급히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세마포만 있었지,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그때에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그 말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을 보고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은 한 사람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목격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상당수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제자직분을 잘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부활했을 때, 같이 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만국에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전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And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무덤을 지켰던 로마군인들(마태복음28:4)

지구상에서 가장 강했던 군인들은 로마의 군병들입니다. 그 편제와 용맹이 어떤 군인들보다 탁월했습니다. 그들은 죄수들을 지킬 때도 철저했습니다. 만일에 죄수가 탈옥을 하거나 도망을 쳤을 경우에 죄수를 잡지 못할 경우에 군인들에게 죄를 물었습니다. 빌립보의 간수가 자결하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행16:27). 따라서 예루살렘을 소동케 했다고 생각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안심했다는 것은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무덤을 지킬 군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대로 근무를 섰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 군인들이 수직하다가 잠을 잔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절을 보면 주님께서 부활과 관련해서도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에도 지진이 일어났는데, 부활 때도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 후에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을 굴려 냈습니다. 사람들은 천사만 봐도 놀라거나 죽기도 합니다. 천사들의 형상은 번개 같다고 했습니다. 그 옷이 눈같이 희다고 했습니다. 수직하던 자들도 큰 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큰 지진이 나자 벌벌 떨었습니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한 동안 그들은 죽은 사람 같았습니다. 로마의 용맹성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만 더 굳게 세워줄 뿐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찾아가 무덤 문을 굳게 하고 지키게 했습니다. 돌, 인봉, 지키는 병사들은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의 보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무덤을 목격한 군인들에게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할 일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목격한 것을 거짓소문을 내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요나가 지중해에 사흘을 있다가 나올 때 예표였습니다. ‘너희가 성전을 할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하셨을 때에 이미 부활은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막고, 인봉하고, 지켰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삼위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성부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롬6:4, 갈1:1, 벧전1:3). 성령께서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롬8:1, 딤전3:16). 그리고 부활하신 성자께서는 버리신 목숨을 다시 얻으셨습니다(요10:18, 2:19,21, 11:25).

이러함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사람들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증거이고,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로마 군인들이 증인이고, 돌과, 무덤문과, 빈 무덤이 그 증거입니다. 부활을 덮고 또 덮어도 막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은 확실한 역사의 현장에서 있었습니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비웃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And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마태복음28:1-10)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야고보의 어머니)가 무덤을 보려고 왔습니다. 이 마리아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무덤에 왔습니다. 이 여인들은 미리 예비한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여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고 넣기 위해서 예비하였습니다(눅23;56). 이 여인들(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요안나)은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는 누군가 무덤을 막은 돌을 굴려 주어야 했습니다(막16:1-3). 그런데 돌이 이미 굴려졌습니다(요20:2).

막달라 마리아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은 이미 굴려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덤밖에 서서 엉엉 울었습니다. 뒤에 예수님이 서 계셔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어디다 두었는지 묻기까지 했습니다(요20:11-15). 그때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무덤에 누구보다 일찍 갔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전혀 부활을 의도하지 못했습니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도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첫 번째 증거는 텅 빈 무덤이었습니다. 여인들이나 제자들이 목격했던 것은 텅 빈 무덤이었습니다. 무덤에 안치했던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숨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숨기면 숨길수록 그들의 거짓은 더 커지고 탄로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부활 후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말들을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11번이나 사람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던 대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시신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서 나오셨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으나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역시 찾아갔으나 무덤 문이 열려 있었고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관원들도 확인 차 무덤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부활을 전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복음은 거짓일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