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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7
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사도행전28:30-31)
慣用語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관용이란 말은 ‘습관적으로 늘 쓰거나 오랫동안 써서 굳어진 것’을 말합니다. 話者들이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존의 단조로운 표현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양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브루터스 너마저’라는 말은 믿고 신뢰했던 사람마저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즉 씨저가 죽음의 순간에서 관용과 믿음을 베풀었던 사람의 배신을 탄식하는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하면 누구나 ‘배반자 유다’라고 할 만큼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도직이란 그야말로 쉬운 자리가 아니었고,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의 사명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의 산헤드린보다, 세상의 그 어떤 자리보다 보배로운 자리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성경 속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불가사의한 기록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사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와 본디오 빌라도는 영원한 악명을 얻은 야비한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유다를 가장 비열한 정열을 묘사하기 위한 주제로서 이용하여 왔으며, 시인들은 그의 지독한 악덕과 음흉한 배은망덕을 제시하기 위하여 모든 상상의 공포를 자아내어서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마10:4)를 마귀라고 지칭하셨습니다(요6:70,71). 그는 돈궤를 맡았었습니다(요12:4-6, 13:29). 예수님에게 향유 부은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요12:3-6). 가룟 유다는 마귀에게 사로잡혔습니다(요13:2). 가룟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일컬어졌습니다(요17:12). 예수님을 팔기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흥정했던 자입니다(마26:14-16).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습니다(눅22:21).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22:22).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막14:44-45, 마26:47-50, 눅22:47-49, 요18:2-5, 행1:16-25). 후에 예수님을 판 것을 뉘우쳐 은 삼십을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마27:3,4).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마27:5, 행1:18).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슥11:12,13, 마27:6-8). 가룟 유다대신 맛디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시109:8, 행1:20,26).
사기꾼들이 사람을 속여도 사기를 당한 사람은 일을 당한 뒤에 알게 됩니다. 사도들은 유다를 마지막까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유다가 배반하리라는 생각을 그의 음모가 완수될 때까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팔려가고 난후에야 그들은 유다의 파렴치한 행위를 알아차렸습니다. 유다는 가룟 출신이었습니다. 가룟(Kerioth)이란 이름이 그에게 부가된 것은 당시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同名異人이 여섯 사람이나 되었기 때문이라고 혹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따라다니는 말이 있는데 ‘…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은 자였습니다. 그는 영원을 위해 뛰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것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고, 그에 대한 보상이 없어졌습니다. 유다의 이 계획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귀 너머로 넘겨버렸습니다. 유다는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을 배반하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을 은 삼십(당시 노예 값)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 돈도 소유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쩌면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를 가룟 유다는 놓쳐버렸습니다. 그리고 my way를 외쳤습니다. 자기 갈 길을 가다가 영영 잘못된 길로 들어섰습니다.
유다를 보면서 우리들이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들도 얼마든지 유다의 심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반발하고 불순종하다가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울자 밖에 나가서 슬피 울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시리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비를 곧이듣지 않은 귀들은 결국 악함 속에 완전히 방치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바로의 강퍅함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돌이킬 기회가 많았는데 전혀 바로는 그 많은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악한 것과 악한 자들이 제 갈 길로 가버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계속하는 경고를 듣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스스로 뿌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택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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