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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인과 유대인(사도행전25:6-12)

 

로마인이야기를 쓴 Shiono Nanami 즉 불신자들이 보는 유대인과 Roma인과의 관계입니다. Roma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상과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이 생각하는 사상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Roma인들은 패자까지도 자신들과 동화하는데 있음을 자부했습니다. 그럼에도 패배한 여러 민족들 가운데 유독 유대인만이 동화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승자인 Roma인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민족과의 동화도 유대민족은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신도 인정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날들을 유대인들은 다른 신도 섬기기도 했습니다. 허나 웬만한 사람들은 Babylon의 포로로 있을 동안에도, Palestine에 돌아왔을 때도 여호와만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고대의 유대인은 Greece인에 버금갈 만큼 이산(離散) 경향이 강해서 웬만한 도시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같은 도시에 많은 사람들과 살면서도 유대인만은 다른 거주자와 동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금융업이나 장사에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교류가 그 이상으로 진척되어, 동화나 융합으로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Roma인과 유대인은 법률에 대한 사고방식도 달랐습니다. 유대인에게 ‘법’이란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Roma인이 생각한 ‘법’은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인간이 결정한 것입니다. Roma가 제국 안에 사는 이민족을 Roma인과 동화시키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방책은 Roma시민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Roma의 시민권은 속주세를 면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 민족들은 Roma에 동화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Roma군단에 지원하는 유대인도 극히 적었습니다. Roma 병사가 되면 최고사령관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Roma도 이 ‘특수사정’을 인정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해서만은 병역을 면제했습니다. 유대인은 언제나 Roma의 이방인이 되는 쪽을 택했습니다. 지배자인 Roma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선택했습니다. 오래 전에 Alexandros대왕이 Hellenism화한 이후 유대인의 사회적 지위가 그대로 지속되었습니다. 지배자는 Greece인에서 Roma인으로 바뀌었지만, 유대인의 지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Roma인과 유대인이 직접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주전63년에 Pompeius때부터였습니다. 이어서 Pompeius를 패배시킨 Caesar와 유대인의 협정은 유대인의 요망을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Caesar의 뒤를 이은 Augustus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Augustus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Agrippa의 조언에 힘입었습니다. Agrippa(Marcus Vipsanius Agrippa/주전62-주전12)는 Roma의 장군과 정치가로서 Augustus의 정계진출을 도왔습니다. Agrippa의 군사적/외교적인 것에 능했습니다.

Augustus에게는 Agrippa의 도움과 유대에서는 Herod이 도왔습니다. Herod은 순수한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유대의 주권을 장악한 Herod왕은 머리가 기민했습니다. 삶의 달인이었습니다. Pompeius가 Roma의 주권자일 때는 Pompeius에게, Caesar가 유대 왕국을 재건하자 당장 Caesar에게 달려가 Julius라는 가문 이름을 받고서, Caesar의 부하로 변신했습니다. Caesar가 암살되자 Brutus(Marcus Junius Brutus) 일파의 세력이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Caesar 암살 주모자인 Brutus와 Cassius(Caius Longinus Cassius) 편에 붙습니다. 그러나 Caesar파인 Antonius와 Octavianus가 반Caesar파인 그 두 사람과 대결했을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Antonius와 Octavianus가 권력투쟁 시 Antonius의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Antonius편에 붙습니다. 이를 고맙게 여긴 Antonius는 Cleopatra가 아무리 간청해도 유대 왕국만은 Cleopatra에게 선물로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ntonius가 패하였습니다. 이에 Herod은 Augustus로 이름을 바꾼 Octavianus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서둘러 Roma를 방문한 Herod을 Augustus는 Roma의 동맹자로 삼고, 유대 왕위를 인정했습니다. Augustus는 Herod의 이용가치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그같이 했습니다. 즉 Augustus가 볼 때 Herod은 전제군주였습니다. 유대에서 전제군주라는 것은 유대교 제사장들이 국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Roma인은 독립된 사제계급을 두지 않았던 만큼, 종교의 정치 개입에는 항상 불신했습니다. 또한 Herod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Orient에 주둔한 Roma군단의 후원이 적극 필요했습니다. Augustus에게는 Orient 일대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Roma의 직할령인 Syria와 Egypt를 잇는 선상의 유대가 Roma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Augustus는 현지에 밝은 Herod을 유대에 상주시켰습니다. Herod은 Augustus의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 Augustus는 Orient 일대에 널리 퍼져 살면서 공동체 network를 형성하고 있는 유대민족을 다스리려면 그들에게 마음의 고향인 Jerusalem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는 어디에 살든 Jerusalem 성전에 일정한 헌금을 바칠 의무가 있었습니다. Jerusalem 성전에 돈이 모인다는 것은 그 돈을 틀어쥐고 있는 제사장들의 권력이 강해짐을 뜻했습니다. 이에 Augustus는 민족주의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 유대교 제사장들을 강권으로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Herod이라고 판단했습니다. Jerusalem만 안정되면 Orient 일대의 유대인 사회도 안정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전4년에 Herod이 죽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Herod왕은 유대 왕국을 삼분하여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왕국의 북부는 philip에게, 남부는 Herod Antipas에게,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는 Herod Archelaus에게 남겨주었습니다. 북부와 남부의 통치권은 두 왕자가 별 문제없이 계승했지만, 문제는 Jerusalem이었습니다. Jerusalem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의 신권통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Herod이 임명한 대제사장을 면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이번에는 비유대교도들을 Jerusalem에서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Jerusalem은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젊고 미숙한 Archelaus는 Syria 속주 총독에게 군대출동을 요청했습니다. 이 시기의 Syria 총독은 Varus였습니다. 총독은 즉각 군단을 출동시켜 진압하지 않았습니다. Varus는 봉기한 급진파 유대인의 대표가 Roma로 가서 왕정을 폐지하고 제사장의 신권정치를 부활시키고 싶다는 뜻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50명의 대표가 황제에게 호소하기 위해 Roma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Palestine에서 Italy까지는 바닷길입니다. 왕복하는 데 걸리는 기간과 Roma에 체류하는 기간을 합하면 반년은 족히 걸립니다. 급진파는 이 기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자기네 요구를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비유대인들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Varus도 Syria 주둔 4개 군단을 출동시켜 진압하였습니다. 결국 Herod왕의 상투 수단이었던 단호한 무력행사만이 Jerusalem의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Roma에서는 Augustus가 팔라티노 언덕에 서 있는 아폴로신전 앞에서 유대인 대표들을 만났습니다. Augustus는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 밑의 50명의 유대인들의 호소를 듣고 있었습니다. 50명의 대표 뒤에는 Augustus의 허락을 받고 테베레 강 건너편 제14구에 공동체 유대인들이 8000명이나 몰려왔습니다. 그럼에도 Augustus는 유대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Augustus는 왕정을 폐지해달라는 요구는 거부했지만, 대신 조세경감을 약속했습니다. 이 회답을 가지고 귀국한 대표들은 경과를 설명했지만 Jerusalem의 유대인들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폭동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Augustus도 수습능력이 없는 Archelaus를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정이 폐지된 것입니다. 그러나 Augustus는 유대교 제사장들에게 통치를 맡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헤롯이 Archelaus에게 준 Jerusalem과 유대 중부를 직할통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행정은 Jerusalem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장로회의에 맡겼습니다. 내정의 자치권은 유대인들에게 남겨준 것입니다. 주후6년부터 Jerusalem과 유대 중부는 Roma의 속주로 바뀌었습니다. 유대 담당 장관의 관저도 Jerusalem에 두지 않았습니다. Greece계 주민이 많은 교역도시 Caesarea에 두었습니다. 이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도 거의 온건파였습니다. Roma는 군사력도 3000명 정도밖에 주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로마 시민인 군단병이 아니라, Syria에서 모집한 Greece계 지원병이었습니다. Roma는 유대인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마찰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Roma는 어떤 지역을 속주화하면,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인구나 재산을 조사했습니다. 이럴 때 유대인은 자신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그런 조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속주세를 내야 한다는 것도 유대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왕에게 세금을 낸다면 모르지만, 멀리 있는 황제에게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다른 민족의 안전까지 지켜주기 위해 돈을 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지,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속주화가 진행되는 어려운 시기에 봉기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요소가 로마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유대민족은 바윗돌처럼 단단히 단결되어 있지 않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항구도시의 유대인과 농민이나 예루살렘 하층민으로 구성된 급진적인 유대교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유대인은 대부분 공업이나 금융이나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Roma의 직할통치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인구조사와 속주세의 필요성도 이해하였습니다. Augustus는 유대를 속주화하기 위해 시리아 총독 Kurhvnio"/Kurêvios를 등용했습니다.

Kurêvios는 온건파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항구도시의 자치권을 재확인했습니다. 유대 중부에서는 Jerusalem뿐 아니라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내정 자치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정책의 목적은 ‘분할하여 통치하라’ 는 Roma의 통치 좌우명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Jerusalem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Kurêvios총독은 Jerusalem의의 특수성을 배려하였습니다. Roma는 Jerusalem과 유대 중부를 직할 통치하더라도 Jerusalem에서는 제사장들이 사법권을 갖는 것을 인정해주었습니다. 다만 사형 판결이 난 경우에는 ‘황제의 대리인’인 유대 주재 ‘장관’이 허가해야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예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Jerusalem의 제사장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유대 장관인 Pontius Pilatus가 집행을 허락했기 때문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제사장들의 압력에 굴복한 Pilatus는 손을 씻는 상징적인 gesture를 보이면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Syria 총독 Kurêvios가 실시한 Augustus의 유대대책은 Tiberius에게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Tiberius는 더욱 철저하게 실시했습니다. 황제가 Tiberius로 바뀐 뒤에도 Kurêvios는 여전히 Syria총독이었습니다. Jerusalem성전에 바쳐진 Roma의 봉납품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 없었지만, Tiberius는 이것조차도 신격이 된 선황 Augustus에게 바쳐진 Caesarea의 신전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Jerusalem성전이 비유대교도의 봉납품으로 더럽혀졌다고 유대교도가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또한 유대교 대제사장이 의식을 치를 때 입는 제의는 Roma측이 Jerusalem 궁전 안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유대 측에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종교의식을 치를 때마다 제사장들이 그 제의를 빌려와야 했고, 이교도인 Roma인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 더러움을 없애기 위한 일주일의 ‘정화’ 간을 두어야했습니다. Kurêvios가 주후21년에 죽었을 때 Tiberius황제는 조국에 대한 공헌이 컸다는 이유로 국장을 치러주었습니다.

Kurêvios가 죽은 뒤에도, Tiberius는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혹 유대 장관들 중에는 유대민족의 특수성에 무지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Tiberius에게 알려지면 당장 해임될 뿐 아니라, 본국으로 소환되어 재판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주후26년부터 10년 동안이나 유대 장관을 지낸 Pontius Pilatus가 해임된 첫 번째 이유는 군기를 앞세운 부대를 예루살렘에 입성시켰다는 것, 두 번째 이유는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난 주민의 소요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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