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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善行)이라는 맹점(로마서3:1-8)

 

인간의 선이라는 것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면을 감추는 면이 있고, 밝은 면을 나타내는 선이 있습니다.

Albert Schweitzer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이고, 사상가이며, 신학자이고, 음악가입니다. 그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한 의사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외경(Ehrfurcht vor dem Leben)을 윤리의 기초로 하였습니다. 또한 원자폭탄 실험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였습니다.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받았습니다.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였습니다. 철학가로서는 칸트를 연구하였습니다. 독자의 윤리관인 '생명의 경외'를 주장하였습니다. 음악가로서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가였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 개량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추앙을 받았었고, 현재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음악가요, 도덕가요, 사상가이며, 의사였고 신학자였던 Schweitzer. 그런 그가 내세운 예수님에 대한 것이나 종말론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Schweitzer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묵시적 요소가 그의 가르침의 껍질이 아니라 핵심이라고 주장한 바이스(Johannes Weiss/1866-1914)의 견해에 찬성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하나님 나라의 비밀』(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1906)과『역사적 예수 탐구』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영역본 1910)에서 Schweitzer는 예수가 19세기의 사람이 아니라 1세기의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또 유대주의적 묵시의 장르가 비록 19세기의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의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였다고 주장했습니다. Schweitzer에 의하면 ‘망상적 광신자’였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앞으로 오실 인자(coming Son of Man)로 생각하고서 “허황된 묵시적 꿈에 사로잡혀 자기의 삶을 헛되게 내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생전에 올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말론적 동기를 일관되고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메시지는 근본적이고 그리고 절대적으로 종말론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신 목적은, 마지막 위기(즉 심판)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마태복음 10장에 진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마10:23) 재림(Parousia)이나 ‘메시야적” 수난이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일어나지 않자, 예수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깨닫고서(“재림”의 첫 번째 지연), 자신을 대속제물로 삼아 메시야적 저주들을 홀로 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시대를 강요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상에서 자기의 오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가운데, 버림받고 완전히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으로(a forsaken and utterly disillusioned man)죽었다는 것입니다(마27:46). 즉 하나님께서 행할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아니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스스로 무덤을 판 사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역사적 예수 탐구』가운데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진술에 보면 Schweitzer는 예수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오실(coming) 인자로 알고서 모든 평범한 역사를 끝장내는 마지막 혁명을 항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나가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바퀴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그 위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러자 바퀴가 움직였고, 그 바퀴는 그를 박살냈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상황들을 가져오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을 파괴시켰다. 그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위대했던 그 사람. 너무나도 강하여 스스로를 인류의 영적 통치자로 생각하고서 역사를 자기 목적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의 몸은 그 위에 아직도 매달려 있다 그것이 그의 승리요 그의 통치였습니다.

 

실제로 Schweitzer의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문장 가운데 있는 “강한’이라는 단어보다는 ‘미친”이나 “망상에 속은”이 더 적절한 단어이다. 더욱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가르침의 종말론적 내용은 예수에게는 중심적일지라도 오늘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예수의 종교적 가치가 1세기 팔레스틴의 유대인으로서 그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무관한 까닭에 예수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비종말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윤리적 강조점들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 짧은 기간만을 위하여 의도된 “한시적 윤리”였을 뿐입니다. 홈스트렴(F. Holmstrom)은 Schweitzer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러므로 Schweitzer의 결과적(consequent) 종말론은 결과적 자유주의 기독론이다. 그는 형식상으로는 종말론을 옹호하고 있어 보이지만 사실상은 종말론을 배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윤리는 리출의 윤리주의보다도 참된 기독교로부터 훨씬 더 멀어져 버린 도덕주의로 남아 있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역사이래로 선행이 자칫 하나님의 구원과 대치될 뻔했던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요새는 아마도 더 그럴 것입니다. 그만큼 선행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행은 어디까지나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선행’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다 인정한다 해도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선행이 아니라면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조금의 자극제는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선행자체가 구원에는 절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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