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로마서2:25-29)
‘의문’/gravmma/grâmma이란 문자(letter)나 규정(ordinance)입니다. 곧 글자로 기록된 율법입니다.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는 Aeschylus이래 그라포/gravfw/grâpho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라페/grafhv/graphê와 같은 의미로서 ‘새기거나 조각된 것’입니다. 후에 ‘기록된 것’이란 넓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명각’, ‘그림’, 기록하기, 기록하는 행위와 결과, 기록하는 행위자체, 기록할 수 있는 능력, 알파벳의 개개의 ‘문자’, 책의 글자들, 상징. 편지, 문서, 공문서, 법령과 같이 기록된 것, 문법, 초보적 지식, 학습, 문헌. ‘거룩한 문서’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의 문서들, 마술에 관한 서적, 그리고 연금술에 관한 문헌과, 신성한 것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황제의 편지와 교령(敎令)에도 적용되었습니다.‘성경’이라는 개념으로도 헬라시대에 사용되었습니다.
LXX역본에서 grâmma는 히브리어 rp,se/sêper/세페르/‘문서, 기록, 책’의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용법에서 ‘의문’은 갈라디아서6:11에서 알파벳 글자였습니다( …글자…), 사도행전28:21에서 grâmma는 기록된 정보입니다(편지). 문자에 의한 의사전달이나 소통입니다. 누가복음16:6에서 grâmma는 ‘채무증서’였습니다(증서). 그런가하면 요한복음7:15에서 grâmma는 ‘학식’입니다(글). 사도행전26:24에서 베스도는 바울의 학문(grâmma)을 깔보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학식이나 학문이란 성경에 관한 지식입니다. 요한복음5:47에서 grâmma는 모세의 ‘글’ 곧 율법을 의미합니다(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디모데후서3:15에서 grâmma는 거룩한 ‘기록’을 의미합니다(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바울사도는 종종 grâmma와 pneu'ma/pneȗma를 대조하였습니다. 로마서2:27,29에서 grâmma는 논증할 수 있도록 기록된 것으로서의 율법입니다. 증명할 수 있는 할례의 표시와 달리, 율법은 율법의 준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율법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범죄자들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grâmma는 단순한 글자 이상입니다. 즉, grâmma규정, 규범이라는 의미입니다. 참된 유대인은 grâmma를 이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할례, 즉 영적할례가 필요했습니다(롬2:28-29).
서로 대립되는 savrx/sârx/사르크스(육)와 kardiva/kardîa/카르디아(마음), ejn tw'/ fanerw'//en tȏ phnerȏ/엔 토 프하네로(표면적인/보이는 것 안에)와 ejn tw'/ kruptw'//en tȏ kruiptȏ/엔 토 크륍토(이면적인/감추인 것 안에)는 ejn gravmmati'//en grâmmatȋ/엔 그람마티(율법의 글자에 의한) 할례와 ejn pneuvmati/ejn pneu'mati/엔 프뉴마티(인격적 삶의 결정적인 개입에 의한) 할례 간의 차이에 대응합니다. 사람 안에서 대립되는 것이 있는데, 육과 마음이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며, 기록된 율법과 인격적인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늘 다투고 있는 것들입니다.
grâmma는 pneȗma가 하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대조는 성경과 성령 간에 있지 않습니다. 순전히 기록된 규정(prescription)인 율법과 성령 간에 있습니다. 로마서7:6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단순한 grâmma로서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섬기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없으면 율법은 아주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grâmma와 pneȗma가 절대적으로 대조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기록된 것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그것만으로 새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3:6-7은 양자의 관계에 개입했습니다. 여기에서 grâmma는 옛 언약과 연관되었습니다. pneȗma는 새 언약과 연관됩니다. 예레미야31:33에 근거하여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단순히 기록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마음에 새기신 율법은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목적으로 율법으로서의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을 얻게 하실 목적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3:7의 gravmmasin/grâmmasin (복수형)은 돌에 새긴 글자들(의문)입니다. 율법의 돌판 들을 가리킵니다. 이 글자들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단지 글자를 영에, 혹은 불충분한 글을 참된 의미에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옛 계시 문구를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가져다주는 새 계시에 대립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베일을 제거하실 때에 비로소 옛 율법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날 것입니다(고후3:14,16). 그리스도께서 완고히 거부당하실 때 하나님의 목적은 감추어집니다.
바울사도가 grâmma와 pneȗma를 구별하는 것은 성경자체를 경시하려함이 아니었습니다. grâmma는 성문율(법)으로서의 율법을 가리키는 반면에, grafhv/graphê/그라페는 바울이 성경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운 말씀(롬10:8)은 grâmma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입증된 성경입니다. 비록 우리가 단순한 율법의 글자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성경의 권위가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규정되므로 우리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새 언약은 성령에 의해 생명을 줍니다. 이는 기록되지 않은 율법이 기록된 율법을 대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기록된 율법의 내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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