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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랑할 수 없는 구원(로마서3:24-31)

 

27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다. 어떤 율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이다. 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인정한다. 29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정으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30 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으니,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바른성경»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서 중세의 신학자들이 전개한 종교개혁기에 첨예화된 균형이 깨져버립니다. 지구가 네모져서 어느 지역 이상 갔을 때, 한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것,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것 등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이 시대를 계몽주의시대라고 말합니다. 계몽주의 시대 인간들은 Renaissance라는 기초위에 모든 것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는 중세적인 사고와는 다른 사상을 가졌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해를 전개시키고 발전시켰습니다. 인간의 위치를 격상시켰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한층 높게 평가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역사의 중심무대에 두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따지는 식으로 하나님을 평가했습니다. 철학은 철학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괜찮을 수 있는가를 발전시켰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DescartesGalileo와 같은 사상가들이 개척한 새로운 방법론을 지식의 모든 분야에 적용했습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신학 등도 이 과학적 표준규정에 맞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철학까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노력이 드는 모든 분야가 자연과학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포함한 몇 가지 원리들이 있는데 자율, 자연, 조화, 진보 등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계몽주의의 제1원리는 이성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대단히 강조했습니다. 이성의 원리란 우주전체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 질서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켰습니다. 이성의 원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원리인 자연입니다. 사실상 자연(nature)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이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고 사전에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자연은 아닙니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의 원리란 물질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고 그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우주를 내재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질서정연한 체계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과 자연법이라는 말들은 지적추구에서 표어로 되었습니다.

이성자연은 계몽주의 사고의 세 번째 원리인 자율’(autonomy)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자율적인 인간이 진리와 행동의 결정권자가 되어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가르침의 직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니까라는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 신앙이나 행위를 부추기는 수긍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개인이 권위에 대한 그런 종류의 모든 외적 주장들을 시험해 보려했습니다.

계몽주의의 넷째 원리인 조화는 이성의 시대가 그 원리로 간주한 우주의 합리성과 질서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사상가들은 우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질서가 특징적으로 내재되어 있어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각 개인이나 물질의 이기적이고도 독립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주전체가 가장 적절한 모양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진보에 대한 낙관적 신념의 시대였습니다. Descartes 등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적 작업에 힘입은 이성의 시대 사상가들은 우주가 질서정연할 뿐 아니라 인식 가능한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적합한 방법론을 채택한다면 진정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신학자, 과학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들 나름대로 진리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믿는 사상 체계들을 구축하였습니다.

이성의 시대는 문화가 교회와 기독교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던 때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 말씀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는 아니었습니다. 소위 말해서 지성인들은 교회로부터 세상에 눈을 돌리고 세상에 의하여 연구하려 했습니다.

이런 영향을 교회에서 전연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데, 교회에서 받아들였습니다. 계시종교는 자연종교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곧 계시종교보다 자연종교를 앞세웠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존로크에 의해서 마련된 이신론자들은 자연종교가 합리적이므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은 자연종교로 순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서 19세기의 신학은 이신론을 제껴 버리고 초월성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Immanuel Kant는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Hegel은 사변 이성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Schleiermacher는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Albrecht Ritschl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윤리적 문화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Immanuel Kant는 종교의 적합한 영역으로서 삶의 실천적 영역을 제시했습니다. 즉 도덕적 영역을 제시하였습니다. 실천 이성 안에 그 적절한 기초를 두었습니다. Kant는 거기에서부터 신학을 형성하려 했습니다. 그것으로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맞추려 했습니다.

Hegel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지적인 차원에 주목했습니다. Hegel은 궁극적인 진리를 인간역사의 진행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성의 능력과 연관을 시켰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때 신은 자기인식에 이른다고 주장했습니다.

Schleiermacher는 그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찾기 위하여 감정에 주목했습니다. Romanticism(계몽주의 철학의 냉랭한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에 매료된 Schleiermacher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직관 등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자기실현과 자기표현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Albrecht Ritschl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 곧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자유주의 대표자들인 Adolf HarnackWalter Rauschenbusch 등은 기독교의 신조들을 현대적 지식의 빛 안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신학은 계몽주의 이후로 문화 속에서 일어난 어떤 발전들을 신학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신학이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학 속에 융화(戎華)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학은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사상의 주장들을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개개기독교 사상가가 전통적 신조들을 비판하고 재구성할 자유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실천적, 윤리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기초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초월성을 간과하고 신적 내재성 쪽으로만 기울어갔습니다. 원래 신학이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성경의 이중적인 진리를 균형 있게 표현해야 하는데 말입니다(Stanley J. Grenz Roger E. Olson).

요새 우리나라의 어떤 교회들은 자랑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요정도 되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숫자를 자랑하고, 프로그램을 자랑하며, 건물을 자랑하려 하며, 목회자의 자격을 자랑하며, 성도들의 격이 다른 교회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랑하려 합니다. 우리교회의 성장은 이러이러해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성장했다고 하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공로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기념비를 세우고, 동상을 세우려 하며, 기념관을 지어 인간의 공로를 최대한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Barclay에 의하면 어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경리장부와 같이 대차대조표를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의 율례를 작은 것까지 엄격하게 지키고 그것을 수행하고 나면 수입에다 기록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갖은 show를 해서 사람을 모아놓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저 목사는 그릇이 커서(?) 성공한 것처럼 포장되어 버립니다. 사실 우리들의 구원과 우리들의 목회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특히 복음 이외에 윤리적, 율법적인 것들은 고도의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로부터 빚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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