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세 성전
이스라엘은 역사 이래 세 차례에 걸쳐 성전 건축이 있었다. 제1성전은 솔로몬성전이고, 제2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이며, 제3성전은 헤롯성전이다. 솔로몬성전은 처음성전이고, 스룹바벨성전은 바벨론 포로 후에 페르시아 시대 때 페르시아 왕의 허락으로 귀환해서 건축했으며, 헤롯성전은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던 성전이다.
제1성전-솔로몬 성전
성전건축
솔로몬성전은 솔로몬 재위 5년째에 시작되어 7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재위 11년에 준공되었다(왕상6:37-38).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 구릉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은 원래 다윗 왕 때 계획되었다. 그러나 왕국 통일을 위해 너무 많은 전쟁을 치르며 피를 홀린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채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것으로 그의 역할을 마쳐야 했다. 성전건축을 위해 다윗과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자재와 기술 원조를 받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꾼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 당하던 B.C.586년에 파괴되고 성물은 모두 약탈되었다(왕하25:13-17,렘52:13).
성전 구조
가. 본체
성전 본체는 길이 약 27m(60규빗. 넓이9m(20규빗. 높이 약 13.5m(30규빗)의 크기로 이루어졌다. 이 중 지성소는 길이 약9m(20규빗)이며, 성소의 길이는 약 18m(40규빗)이었다(왕상6-7장 대하3-4장).
나. 낭실
성소 앞의 현관을 말한다. 길이는 약9m(20규빗)이며, 높이는 약54m(120규빗)이다.
다. 야긴과 보아스
낭실 좌우에 있는 두개의 청동 기둥으로 높이는 15.8m(35규빗)이며 기둥머리는 2.3m(5규빗)로 백합화 꽃모양을 했다.
라. 뜰
a. 바다
큰 물두멍. 솔로몬 성전에서는 성전 좌우에 각 5개씩 도합 10개의 바다가 있었다 직경이 약 4.5m(10규빗)이며, 높이 약 2.25m(5규빗)로 아래는 12마리 황소가 바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b. 번제단
높이 약 4.5m(10규빗)로 성막 뜰에 있던 번제단보다 무려 3.1m(7규빗)나높았다(대하4:1).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
건축동기
유다왕국의 멸망은 곧 성전파괴와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후 예루살렘은 70년 동안 폐허가 되면서 성전도 같은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면서 성전재건은 활기를 얻게 되었다 본토로 돌아온 1차포로 귀환 인솔자 스룹바벨은 제일 먼저 성전재건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제2성전인데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하여 스룹바벨 성전으로도 불린다.
건축과정
페르시아 왕의 허락 하에 재건된 성전 건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원주민과 암몬 등 주변국의 지속적인 방해로 작업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 귀환 초기 어려운 생활고와 식어진 신앙열기도 성전재건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격려하며 성전재건 역사를 독려한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다. 그리하여 B.C.515년에 성전은 재건되었다.
건축 결과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비교할 때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지성소에는 언약궤와 속죄소도 없었고, 현관의 우림과 둠밈도 없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성전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생활에 중심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고.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건축 이후
제2성전은 이후 B.C.169년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졌다 유대를 헬라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수리아 왕은 성전 번제단 자리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성전을 더럽혔다. 이런 일련의 성전모독 행위들은 곧이어 일어난 마카비 혁명으로 중단되고 마카비 가문은 성전 외벽을 쌓는 등 성전을 정화시켰다. 하지만 B.C.63년경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B.C.106-48)에 의해 제2성전은 파괴되었다.
제3성전-헤롯 성전
건축시작
파괴된 제2성전을 개축한 사람은 헤롯대왕이다. 그는 재위 18년째 되던 해(B.C.20년경) 성전개축을 시작하였다.
건축과정
헤롯은 공사시작 18개월 만에 본체를 15층 규모로 개축하고 B.C. 9년 경에 제단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모두 완성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헤롯은 성전 뜰, 성전 담, 성전 문등 외곽을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몄는데이 공사는 헤롯 시후 A.D. 64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성전공사는 1000 명의 제사장들을 포함하여 무려 20,000명이 동원되는 어마어마한 대역사였다. 이때 사용된 돌의 크기나 대리석의 아름다움은 당시 건축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리석의 높이는 평균 90-120㎝나 되었고, 어떤 것은 돌 하나의 길이가 12m이고, 무게가 100t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성전을 본 자는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막13:1), 유대 랍비들은 ‘이 성전을 보지 못한 자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까지 극찬하였다고 한다.
건축이후
제3성전은 이런 외적 규모나 아름다움과는 달리 본연의 모습을 많이 훼손하였다. 이미 로마의 지배 하에서 정치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대제사장은 왕이나 총독에 의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절기 때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많은 유대인들은 성전을 거점으로 하여 로마에 항거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성전은 열심당원들의 본거지처럼 활용되었다. 결국 A.D.70년 로마의 장군 Titus (디도)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시켰다. 성전 완공 6년 뒤의 일이었다.
성전 파괴 이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는 파괴된 성전 터에 로마식 신전을 세웠고, 7세기 경에는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으로 불리는 이슬람식 사원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