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7)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9)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1)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8)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예지와 예정(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창세 이래 아담 이후, 노아 이후부터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었더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이중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는 참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구원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안에 참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입니다.

통상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그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요소(예를 들면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1:13절을 보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 내 자녀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이라는 공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스마엘=에서=유대인이라는 사람들이 끼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100%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다가 영원한 구원을 놓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정에 대하여 예지적 견해(선견, 앞선 지식)라는 입장을 받아들여버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예지적 견해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지, 거절할지를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하기도 전에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선택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선택하려는 사실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이란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나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전혀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하나님의 결정에 관한 자의적 요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명백히 어떤 잘못된 행위로부터도 벗어나 계십니다. 우리에 대한 궁극적 심판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느냐 아니면 받아들이느냐 하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로마서8:29-30절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의 豫知에서 시작하여 신자들의 영화에까지 이르는 일종의 순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지적 견해에서 볼 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예지가 예정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선택할 것을 미리 아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선택 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언급되어 있지도 않고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여기에서 하나님이 예지를 가지셨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전혀 모르고 계시는 사람들을 선택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시기 위하여 먼저 야곱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시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의 선택을 근거로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8장에 나오는 예지-예정의 순서에 대해서는 예지적 견해와 더불어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구절에 나타나고 있는 사건들의 순서는 예지-예정-부르심-칭의-영화의 순서입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에서 부르심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한 가지 방법 이상으로 설명합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발견합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부르심을 받거나 그리스도 앞으로 초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수 없는 귓가에 복음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외적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만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는 믿음으로 연유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외적전파를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믿음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서 모두를 첨가한다면 이 구절에 있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만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지적 견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들의 외적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지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신다면 어떻게 예정된 자들 가운데 오직 일부만이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만 부르시는데. 부르심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예정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가 부르심을 받지도 않고 예정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심에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지식에 근거하여 예정하시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부르심이 없는 데에 대하여 아무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실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결코 일부라는 말을 내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황금사슬은(8:29,30) 필연적으로 모두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황금사슬에 일부라는 말을 첨가시킨다면 그 결과는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이 되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부르시지도 않은 자들을 예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예지적 견해는 하나님의 예정이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고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부르심 없이도 예정되었다면 그 견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 됩니다. 모두라는 말을 덧붙여도 역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 결과입니다. 이러한 난제는 칭의에 대한 부르심의 관계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만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면 그 구절은 아래의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a.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 b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게 된다. a를 취한다면 복음을 들은 적이 있는 각 사람은 모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인 구원론자 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든지 안 들었든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예정에 관한 주된 논쟁이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다 만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외부적으로 복음(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a의 입장은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개혁주의적 견해의 옹호자들에게나 모두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는 b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외적 부르심은 복음전파입니다. 복음전파는 인간인 우리가 하는 어떤 일입니다. 외적 부르심은 성경을 읽음으로 들을 수도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이 기록한 하나의 문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외적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 속에서 내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에 즉각적인 영향력을 일으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외적으로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말들이 마음속에 파고들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나의 능력으로 그렇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내적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즉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b의 입장이 사도의 의도였다면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이 내적 부르심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예지에는 인간이 택하는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단순한 선지식(先知識) 이상의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복음에 반응할 것이며 누가 반응하지 않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단순한 수동적인 방관자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구를 내적으로 부르셔야 할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을 또한 하나님은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즉 황금사슬은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은 의롭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장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통하여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b의 입장이 황금사슬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으신 어떤 종류의 부르심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부르심이란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 깊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로 예정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예정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은 인간 속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가? 예지적 견해의 옹호자들은, 하나님이 오직 일부의 사람들만을 내적으로 부르신 이유는 누가 내적 부르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누가 반응하지 않을지를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부르심에 호의를 가지고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자들에게만 내적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 가운데는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특권이라도 있는가? 내적 부르심이 자신의 힘으로 거기에 반응할 것을 아신 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실질적 능력이 없는 내부적 영향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외적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어떤 특권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영향력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내적 부르심이 전혀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아니라면 구원을 위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고 황금사슬의 무의미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사람들이 믿기 전 곧 믿음으로 반응하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적 부르심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어떤 특권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이러한 dilemma는 예지적 견해에 있어서는 결코 달랠 수 없는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R.C.Sproul, 1998, 126-134).

'로마서새벽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속의 자녀  (0) 2022.08.31
개혁주의적 예정견해  (0) 2022.08.02
바울의 근심과 고통  (0) 2022.06.30
구속과 하나님의 관계  (0) 2022.06.05
유대인의 구원문제  (0) 2022.05.28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