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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구원문제

 

그리스도교는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Levant(동부지중해 연안제국)종교로 출발했습니다. 이후에 그리스도교는 세련되었다고 하는 서구인으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의 원주민에 이르는 거의 세계의 모든 국가와 모든 민족의 신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그 신자를 뺏기지 않은 종교가 하나도 없습니다(Stephen Neil 1999, 9, 15).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땅들은 정치적으로 로마가 다스렸습니다(Williston Walker 2008, 17).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1:11). 그런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땅, 자기 백성은 물론 유대와 유대인입니다.

유대교라고 하면 유대인들의 종교입니다. 유대교가 생겨난 것은 바벨론 유수로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란 AD 70년까지만 하더라도 구약의 사상들을 수정하거나 확장시킨 것을 의미했습니다. 70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 이후에야 비로소 유대교의 존재가 확연해졌습니다. 구약에서 유대인이란 유다 왕국의 백성을 의미했습니다(1 :2). 그러나 신약에서 유대인이란 유대교 신앙을 지닌 자 혹은 예수님과 그 복음을 대적하던 무리들을 가리켰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난 신약성경에서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긋지긋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내쳤습니다.

William Barclay9-11장에서 사도바울은 교회가 해결했어야 할 가장 곤란한 문제 즉 유대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자 그들은 바로 배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까지 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paradox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부족과 아울러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9장에서 11장은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자기 형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버릴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이 선민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입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성전의 예배와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인간 족보상으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서 유대인의 특별한 위치를 바울은 전체문제의 원리이며 시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my-way를 외친지가 수천 년이 지났습니다. 바벨론 포로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my-way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국민인 것이 사실이나 유대인 모두가 다 그를 배척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 중 얼마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이나 로마제국 내에 있었던 초기 신자는 모두가 다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역사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브라함으로부터의 육적인 혈통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에는 여러 번 되풀이 하여 하나님의 선발과정(선택)이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아브라함의 육적자손 중 어떤 이들은 선택되고 어떤 이들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출생한 이삭은 선택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연적인 과정과 욕망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선택되지 못했습니다. 이삭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아들 야곱은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쌍둥이인 에서는 선택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선택은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선택된 사람들이 어떤 권리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지혜와 권능의 일입니다.

참으로 선택된 백성은 절대로 전체민족이 아닙니다. 의로운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할 때에도 하나님께 신실한 소수자이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든 백성이 바알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신실했던 7000명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교훈의 본질적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9:27,10:22)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는 아무 때라도 전체 백성이 선택된 백성이었던 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항상 하나님 편에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러하심이 과연 공정하시느냐는 것이 사람들의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린다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이냐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 잘못으로 기인되지 않고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버림을 받는다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한다고 해서 어떻게 그들을 비난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어떻게 그들을 칭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이러한 논쟁은 우리를 망설이게 할뿐 아니라 위축하게 만듭니다. 실로 바울의 변론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좋아하시는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결정이 제아무리 난해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반문할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진흙은 그 옹기장이에게 반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자기를 만든 장인에게 반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인이 두 개의 그릇을 만들 때 하나는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한 목적을 위해 만들 수 있으되 그 그릇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 관해 가지고 계신 권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로마서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바로는 하나님의 보복의 능력을 과시하는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역사의 무대 위에 올라서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의 선택에 관하여 미리 경고를 받았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말한 대로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1:10,9: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 배척은 예사롭고 목적이 없으며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문은 이방인에게 열려지기 위해서 유대인에게는 한시적으로 닫힌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마음을 굳게 하고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리하셨고 그것은 이방인들을 신앙 안으로 들어오게 할 길을 열어 줄 궁극적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불필요한 모든 것을 다 떼어놓고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사람이나 어느 민족에게 대하여도 당신이 하고 싶은 때 할 수 있으며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되기 위해서 유대인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눈을 감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까닭 없이 유대인들이 잘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에게 근본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근본적인 실수는 그들이 인간적 노력 즉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들은 혼자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고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길이라는 것과 인간업적은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만 했습니다. 이사야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28:16/10:11)고 했습니다. 요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32/10:13). 사실 아무도 하나님의 제언을 듣기 전에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제언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한 인격적 업적방법을 줄기차게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행위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줄기차게 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마련한 것입니다. 이방인이 들어올 수 있게 허락되게끔 마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만심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 순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구원을 스스로 이룩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에게 의존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접붙인 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와 줄기는 여전히 선민입니다. 이방인들의 선택됨과 유대인의 버림받음에 이방인들은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만은 곧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대로 영원히 쭉 가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들을 그런 관계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원을 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32:21/10:19). 결국 이 방인들은 유대인이 구원을 얻게 하는 바로 그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11:26). 구원하시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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