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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게이로”와 “아니스테미”)동사의 태(마태복음28:1-10)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22:23,28,30-31, 27:53, 막 12:18,23, 눅14:14, 20:27,33,35-36, 요5:29, 11:24-25, 행1:22, 2:31, 4:2,33, 17:18,32, 23:6,8, 24:15,21, 롬1:4, 6:5, 고전15:1213,21,42, 빌3:1011, 딤후 2:18, 히6:2, 11:35. 벧전1:3, 3:21, 계20:5-6”입니다.

부활 ajnavstasi" /아나스타시스는 ‘잠에서 깨어나다’입니다(마22:23). 그러나 마태복음27:53에서는 부활을 e[gersi"에게르시스’로 ‘깨어남’입니다. 즉 죽은 사람이 깨어난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마태복음28:6을 보면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을 때 에게이로(ejgeivrw)/일어나다)는 동사,직설,과거,수동,3인칭,단수(hjgevrqh)로 ‘그가 일으킴을 당했느니라’입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16:6도 같고, 누가복음24:6도 공히 수동태로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0:9에서는 부활이 능동태로 나와 있습니다(ajnasth'nai). 왜 공관복음은 수동태인데 요한복음은 능동태로 기록되었습니까? 그것은 공관복음은 공히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강조하여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을 말하고자 함이고, 요한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수동형이면 동작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능동형이면, 동작의 주체가 예수님이십니다. 스스로 일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때 “에게이로”와 “아니스테미”의 용법을 고찰하면 삼위일체의 제일위 되신 성부 하나님이 부활 행위의 주체자로서 동작의 책임자이시며, 제이위이신 성자 예수님은 일으킴을 받은 수동적인 입장에 놓입니다.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일어났느냐 아니면 수동적으로 일으킴을 받았느냐 하는 문제를 바울서신에서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예수님의 부활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행위가 강조되고, 그 행위의 은택을 입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에게이로”가 성도들에 관해서 사용될 때도 수동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사의 주어로서 동작을 받는 수동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말합니다. 곧 부활에 있어서 예수님과 신자들의 수동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을 차이를 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은 능히 스스로 일어나실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일으킴을 당한 수동태로 말함으로서 죽기까지 복종한 수난을 통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예수님의 수동적인 부활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서 예수님이 신자들과 동일시되고 더 가깝게 되신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일으키시고,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일으키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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