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금식문제(마태복음9:14-17)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헤어졌다가 모였다가 하는 일입니다. 어제까지는 모였다가 오늘 헤어집니다. 그런가하면 어제까지 헤어졌던 자들이 오늘 뭉치는 일입니다. 정치적인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이합집산 하는 사람들은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 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영원한 적이 없고, 영원한 친구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당들이 그렇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국회에서 멱살을 잡고, 치고받으며 싸웠던 자들이 오늘 같은 정당에 소속되어서 같은 정책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자신들이 비슷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들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기도와 금식하는 것이 우리와 같다고 여기면서 자신들의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서로 등을 돌리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순수한 질문인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집을 비유하면서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통상 이스라엘의 결혼은 7일간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이 축제기간 중에 신부의 집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때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더 쉽게 설명하시기 위해서 수선한 옷과 포도주부대를 예로 들었습니다.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통상적인 비유를 쓰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친 새로운 것들을 낡아서 달아빠진 형식 안에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지속적인 기쁨과 즐거움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어느 누구도 훼방할 수 없습니다. 항상 혼인집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죽은 종교의식으로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기쁩니다. 기쁨 자체가 불가피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장례식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항상 혼인집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있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 (0) | 2010.02.16 |
---|---|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0) | 2010.02.15 |
마태의 부름 받음 (0) | 2010.02.13 |
중풍병자를 고치심 (0) | 2010.02.12 |
사람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8:28-34) (0) | 2010.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