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대하는 태도(마태복음5:41-48)
유대인들은 이웃을 동족에게만 국한시켰습니다. 개종한 사람들도 이웃의 범위에 넣었습니다. 그 외는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원수였고, 죄수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웃은 사랑하고(ajgapavw), 원수는 미워하라(misevw)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한 사람에게 모두 햇빛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비 또한 구분하지 않고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끼리 사랑하면 무슨 상(misqov")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리들도 자신들끼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만 문안(ajspavzomai)하면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이와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같이 온전(tevleio")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분류하는 장벽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들의 지파는 열두 지파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와 베냐민 지파여야 했습니다. 같은 이스라엘이라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치지 않았습니다. 아예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리나 창기를 가장 더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국경 넘어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웃을 확대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이웃이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도 저주를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였습니다.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똑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면 타국으로 영토가 정확합니다. 도경계를 넘어 살면 호남이냐 경남이냐 하고, 학교출신별을 따집니다. 민족, 혈연, 지연, 학연, 당파 등이 세상의 발전을 막고 있습니다. 어쩌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원수보다 더 멀리 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패를 갈라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좌파다 우파다 교회가 나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생각을 너무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원수관계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원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 났다고 네편, 내편 가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의 국제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나라에만 국한시키려 했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원자이지, 유대인만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