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마태복음6:1)
5장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유대의 랍비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해서 가르쳤습니다(5). 살인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21). 사회와 가정문제인 간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27). 이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31). 서원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33). 원수 갚는 것에 대해서 가르쳤으며(5:38), 이웃과 원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쳤습니다(5:43). 조상들의 유전과 랍비들의 가르침으로 가르쳤지만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참신앙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참 신앙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6장부터는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를 예수님이 대조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의를 행하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전시하기 위한 의는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한 의가 아니라 꾸밈없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점에서 잘못 행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전시효과만을 노렸습니다. 모든 행동이 계산된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과 주의와 칭찬만 받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행동으로 인해서 상(misqov"/보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받으면(言語로라도), 하나님께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말로라도 보상을 받으면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을 말살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의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참 신앙적인 마음이 없이 외식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진정한 의는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행위만 남았는데 그것이 신앙처럼 정형화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展示效果를 굉장히 노립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향상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려고만 하고,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득을 보지 못하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실적을 체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어디를 어떻게 도왔네, 어떤 교회를 돕고, 어떤 단체를 돕고 있네, 하고 광고하면 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상을 기대하고, 하늘의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상은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세상의 상보다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