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부류의 사람들[종교지도자들](마태복음2:1-12)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도자적인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직무의 제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자로서 공동체를 속죄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리새파 사두개인들이 종교지도자라고 자처하면서 세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귀족정치 사회에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겼으며, 주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로서 영향력이 많았습니다. 또한 바리새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산헤드린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세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들을 자처했지만 이미 그 정통성은 이미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과는 전혀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당시와 초대교회 종교지도자들은 엉뚱하게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로 가고 율법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장로들의 유전만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즉 자신들의 행위를 남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도 제대로 된 유대인이라면 예수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적어도 종교지도자들이라면 더 그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에 빌붙어서 그에게 정보만 제공했지, 그 자신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오고, 헤롯이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묻는다면 분명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메시야가 최소한 오려면 극적으로 와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로마의 학정에서 풀어주고 이전의 영광을 되찾게 해줄 메시야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들레헴 같은 곳은 그들이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성경의 예언을 말했을 뿐이지 실제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관심 없는 세상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래도 관심 없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지구 저 멀리 반대편에 있는 관심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오셨습니다. 영접하지 않으나 영접하나를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사람들에게 맡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깨어 있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이방인들보다 못할 때 예수님은 조용히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