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신비함이 있습니다. 신비함이 있다는 것은 기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란 평상의 상태가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해가 지지 않는다든지(수10:12), 깊은 바다에 길이 생겨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하든지(출14:22), 죽었던 사람이 살든지(막5:41) 등입니다. 이런 일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함이 우리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이 신비함의 출처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십니다. 초대교회에서 지금까지 이 출처는 삼위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 전도를 위해서 베푸셨습니다. 영원한 삶을 위해서 초자연적으로 기적을 베푸시고, 베푸셨습니다. 따라서 그의 택하신 백성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따라서 신비함을 주신 주체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킨 것은 사도들이 아닙니다. 초대교부들이 아닙니다. 중세시대의 교부들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시대의 신학자들이 아닙니다. 근세현대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종교각성시대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초대교회시대부터, 창세시대부터,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자신과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치신 주체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자신을 고친 사람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베드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왜 너희들이 왜 놀라느냐? 마치 우리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고친 것처럼 바라보느냐? 빌라도가 놓아주려고 애를 썼는데도 너희들의 반대로 오히려 살인한 자(바라바)를 놓아주고 생명의 주를 너희들이 죽였다. 그런 주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따라서 이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으로 완전히 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 했습니다.
오늘날 사경회라든지, 부흥회포스터를 보면 可觀(가관/spectacle)입니다. ‘능력의 종 ○○에 오시다’ ‘기적을 일으키는 ○○○ 목사 ○○에 오시다’ 정말 낯 뜨거운 문구들이 버젓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붙여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마치 기적을 일으키는 양 행세하고 다닙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을 현혹시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신학부재와 신앙부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 때문에 이단이 판을 치고, 교회에 문제가 들어옵니다. 내가 능력자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다만 종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통로일 뿐입니다. 능력의 종이니, 기적의 종이니 하는 것은 말이 맞지 않습니다. 만일 능력의 종이라고 했을 때는 사도들이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냐? 내 능력이냐를 생각할 때에 망설임 없이 주님의 능력임을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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