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바울과 실라(사도행전16:25-34)
사람은 신체적인 고통을 가할 때 극히 약해집니다. 소위 고문기술자들은 이 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강제했었습니다. 우리가 손에 1mm도 안 되는 가시가 박혀 있어도 온몸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신체적인 고통에 얽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 같은 경우에는 이중의 고통을 겪오 있었습니다. 매질을 당하고 발을 잔뜩 벌려놓은 버티기 힘든 착고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바울과 실라가 기뻐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집정관이나 간수 누구라도 바울은 억울해 하거나 슬퍼할 수는 있었지, 기뻐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라도 그렇게 되면 기뻐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밤중쯤 되어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매를 맞게 하고 견딜 수 없는 착고에 채워지게 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할 수 있습니까? Kierkegaard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은 객관적으로 불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불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신앙의 도약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불확실함을 말했습니다. 많은 사상가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보이는 실존적으로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으로 말하고 계산하기 쉽습니다. 같은 성도이면서 누구는 복을 받고, 누구는 복을 받지 못하고…라며 예단을 해버립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은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사라지고 인간의 생각만 남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절망적 상황이었습니다. 마케도냐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잡혀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감옥 안이나 감옥 밖을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매질 좀 당했기로서니 뭐 대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하신 일로 보아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출하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상당히 둔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 은행통장을 더 믿고, 보여지는 세상의 것을 더 선호하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믿고,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것들을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더 높은 선한 大義대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초탈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입니다. 죄수들이 기도와 찬송을 들었을 때, 자신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통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지, 고통으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기 어려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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