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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위클리프(사도행전21:7-14) 

개혁교회라 했을 때 성도들은 ‘개혁’이란 말을 자꾸 무엇을 고쳐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개혁’이란 말은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꾸 고쳐나간다 해서 성경적으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초대교회를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초대교회로 회귀하자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고 확장을 했습니다. 문제는 313년의 밀라노칙령입니다. 분명히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로부터 구해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교회여야 했고, 황제가 다니는 교회의 규모는 당연히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儀式이 말씀보다 앞섰고, 행위가 신앙보다 앞서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꾸 초대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6세기부터 17세기 약 1000년간 교회는 그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것을 개혁하고자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John Wycliffe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옥스퍼드에 있다가 1361년에 밸리얼 대학(Balliol College)의 학장이 되어 이 대학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Wycliffe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썼습니다. 당시 영국도 교황권의 지역이라 교황에게 세금을 바칠 때였습니다. 영국의 왕들과 영국의 지성인들은 영국이 굳이 Roma-catholic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Wycliffe는 1366년 왕이 교황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한 사건과 관련하여 에드워드 3세의 눈에 띄었습니다. Wycliffe는 교황에게 세금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작은 논문을 썼던 것입니다. Wycliffe는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영국교회의 돈을 모아서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영국이 오랫동안 매년 1000 마르크에 상당한 세금을 바치지 않고 있었으므로 영국에게 매우 못마땅해있었습니다. 이 돈은 죤 왕이 교황 인노센트 3세에게 매년 로마에 바치기로 약정했던 금액입니다. 이에 교황 우르반 5세가 그동안 밀렸던 세금을 받으려고 하자, 1360년에 에드워드3세는 의회를 소집하였는데, 의회는 세금을 거부했습니다. 1374년에 왕실 성직자로 임명받은 Wycliffe는 왕을 대표하여 교황의 사절들과 만났을 때 왕의 신임을 더욱 얻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과 탁발 수도승들이 위클리프를 미워했습니다. Wycliffe는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 행위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왜곡하는 사실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Wycliffe는 우상(또는 형상)과 유품들을 숭배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행진(行列聖歌)과 순례 등을 부정하였습니다. Wycliffe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가장 저주받은 도둑이요 사기꾼이며 교만한 로마의 사제”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영국교회의 주교들은 1377년에 런던에서 열린 성 바울교회의 성직자회의에 참석하도록 Wycliffe를 소환하였습니다. Wycliffe는 그 회의에 참석하여 혹독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교황은 바로 Wycliffe에 대하여 다섯 가지의 교서를 발표하여 그의 저술에서 19가지 혐의를 걸어 정죄하였습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Wycliffe는 화체설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극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왕도 Wycliffe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여러 학장과 동료들마저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Wycliffe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1381년에 농민반란(the Peasant’s Revolt)이 일어났습니다. 이것 때문에 Wycliffe는 더욱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Wycliffe는 책임이 없었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그 사건과 관련하여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공작 곤트의 죤이 Wycliffe에게 개혁운동을 포기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계속 공표하였습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합하여 숫자로 진리를 왜곡하곤 했습니다.

의회는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교회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지진회의’(Earthquake Council)로 불리었습니다. 회의기간에 지진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Wycliffe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심으로 그들을 돕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Wycliffe의 가르침은 정죄를 받았습니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소환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로마로 가지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두 사람의 교황이 권좌에 있었습니다. Wycliffe의 추종자들과 동료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Wycliffe는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1384년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Wycliffe는 전도단을 조직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의 무지와 영적인 맹목성을 불쌍히 여겨 그는 이러한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전달해 주려고 했습니다. 전도자들은 붉은 갈색의 길다란 가운을 입고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Wycliffe의 가장 큰 업적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서 그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Roma-catholic은 Vulgate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일반 백성들이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Wycliffe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몰랐습니다. Latin語를 번역을 해야 했기에 정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큰 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할 때였습니다. 가난한 전도자들은 번역 성경의 일부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도시나 촌락에 사는 남녀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Wycliffe는 최초로 성경전체를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로 많이 나옵니다. 영국의 의회와 교회는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화형 시켜야 한다는 법을 1401년에 통과시켰습니다. 1417년에 존 올드캐슬(John Oldcastle)경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직자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성경번역을 정죄하였습니다. Roma-catholic은 존 위클리프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 후에 콘스탄스 회의(The Council of Constance/1415)를 열어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1428년에 링컨의 주교는 위클리프의 유해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그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순교자들의 피에 빚진 자들입니다. 스데반을 비롯해서 최근에 일어한 순교자들의 피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출처: 교회사핸드북,중세교회사,기독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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