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에도 불구하고/왈도파(사도행전21:7-14)
John Milton은 1655년에 이러한 시를 썼습니다.
피이드먼트에서 ‘일어난 최근의 학살에 대하여(1655년)
오! 주여, 주님의 죽임당한 성도들의 원한을 보수하소서.
그들의 뼈가 차가운 알프스 산맥 위에 흩어졌나이다.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막대기와 돌을 섬길 때,
그들은 주님의 진리를 그토록
순결하게 변함없이 지켰나이다.
주님의 책에 그들의 신음을 꼭 기록해 주소서.
저들은 주님의 양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양떼들입니다·
주님의 양떼들이 피에 주린
피이드먼트 사람들에 의하여 피 흘리며 죽어가나이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도 돌에 맞아 쓰러지나이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골짜기와 하늘까지 울려 퍼집니다.
그 순교자들의 피와 재는
지금도 폭군들이 난무하는
온 이태리 땅에 씨가 되어
수백 배의 결실로 자라날 것입니다.
그 폭군들은 주님의 방침을 깨달은 후에
바벨론에 임할 재난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로마카톨릭을 지칭.
14-15세기에 벌어졌던 교회의 비극적인 모습으로 말미암아 이의 개혁을 시도하는 여러 가지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종교회의 운동(conciliar movenment)은 분열을 종식시키는 동시에 성직매매 및 족벌주의와 같은 부정부패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 종교회의운동은 그때까지 교회가 받아들였던 기독교 교리에 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John Wycliffe와 John Huss 등은 교회생활뿐만 아니라 교회가 지켜오다가 잘못된 교리자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Justol L. Gonzalez, 1995. 197).
앞이 캄캄하여 전혀 보이지 않는 12세기 초 프랑스 Lyons에 Peter Waldo라는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1170 년경에 4복음서와 성경의 일부 책들을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한 사제를 고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세속적 소유를 포기하였습니다. 청빈하고 설교의 단순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법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Waldo는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복음전도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비슷하게 헌신한 남녀의 무리가 그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청빈의 삶을 사는 무식한 세속인들의 이러한 이상은 저13차 라테란 공의회(1179)에서 교황 알렉산더 3세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그들이 설교하기 전에 지역교회 당국자들의 승인과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왈도파는 성경의 메시지를 전파하였으며, 청빈의 덕목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로마-카톨릭의 부와 나태에 대해 강하게 정죄하는 위치에 섰습니다. 왈도의 본래의 목적은 전적으로 정통적인 것이었습니다.
1181년경 리용의 대주교가 왈도파의 성경적 설교를 금지하자 그들은 더 열심히 설교했습니다. 성경을 강해함으로써, 교회의 역할을 떠맡는 가운데 그들은 많은 다른 중세의 분파들이 지닌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청빈의 삶을 설면서 그들은 많은 성직자의 세속성을 강조하였다. 1181년의 정죄는 1184년 베로나(Verona)에서의 파문에서 그대로 되풀이되었으며 이때 교황 루키우스 3세는 왈도파와 다른 유사한 집단들이 감독의 종교재판과 세속의 처벌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나기 전에, 열심 있는 대중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여기에서 이단은 로마카톨릭에 의해 판단 된 것)(교회사핸드북).
처음에 로마-카톨릭에서 이들에 대하여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왈도파를 법으로 금하였습니다. 1229년의 발렌시아 회의(The Council of Valencia)에서는 사제가 아닌 사람들은 라틴어로든지 각 나라 언어로든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일반인들도 시편이나 예배용 소책자 또는 성모(聖母) 찬송집 등은 가질 수가 있었는데,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금서(禁書) 목록으로 로마-카톨릭에서 정한 것입니다. 왈도파 뿐만 아니라 로마-카톨릭의 부패함을 공격하는 다른 종파들에 대해서도 온갖 박해를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수 년 동안 살육 작전이 감행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죽임을 당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했던 그들의 고향은 황폐하여 사막처럼 변해갔습니다. 심지어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였습니다. 피이드먼트(Piedmont)라는 지역에서 더욱 심했습니다. 신자들은 안전을 위하여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한번은 400여명의 부녀자들이 남자들이 멀리 떠나 있는 동안 동굴안에 있는 집에서 지냈습니다. 로마-카톨릭은 이 은신처를 발견하고 동굴 입구에다 불을 질러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 9세(Gregory IX:1227-1241)는 종교재판소의 사무를 위하여 도미니크파 수도승들을 임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왈도파에게 잔혹한 형벌을 주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왈도가 남부 프랑스 출신이었으므로 그 지역이 처음부터 그들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툴루즈(Toulouse)와 프와(Foix) 백작들은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많은 왈도파 사람들이 스페인, 사보이, 그리고 피이드먼트 둥지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곧 스페인에서 쫓겨나서 16세기까지 프랑스에 남아 있었습니다. 일부는 남부 이태리로 도망갔으나 거기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알프스 남부에 있는 서부 피이드먼트 지역에 피난했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박해를 받지 않는 그들만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Oliver Cromwell이 줄기차게 로마-카톨릭에 항의하고 군사행동을 통한 위협으로 박해를 멈추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감당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신의 생명을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와 같은 환난의 시대에도 진리의 증거를 굳게 지킨 자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싸워서 얻은 자유를 현재의 일부 교회들은 세속화되어 사탄의 다른 박해에 빠져들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짝하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출처: 교회사 핸드북,중세교회사,기독교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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