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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전도여행을 끝내며(사도행전21:15-16)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공식적인 전도여행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가장 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어쩌면 가장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라고 딱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사도도 유대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보면 전반부에 바울사도가 얼마나 유대인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에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만의 편협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과 율법 중에서 그들은 율법의 우월만 생각했습니다. 복음이 우선이어야 했는데, 율법만을 생각하고 강조하고 지키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만 바라보았지, 갈보리산은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바울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연구가 처음부터 열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인 Franz Overbeck/1837-1905은 Marcion이 바울을 잘못 이해했지만, Marcion만큼 바울을 이해한 사람도 그때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연구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시대 이전에는 Roman Catholic으로 인해서 성경연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통만 강조했습니다. 성경보다 교황청이 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연구가 이러다보니 성경연구에 장애를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행위와 전통을 강조하는 때에 바울은 ‘믿음으로’를 강조하다보니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Augustine 이후로 황무지와 같았던 바울연구가 비로소 종교개혁으로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Martin Luther의 바울의 해석 ‘오직 믿음으로’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바울이 나타나기만 하면 살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이 허다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의 일행은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지 며칠 만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들은 약 100km이상을 가야 했습니다. 갈 때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 몇 명이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예루살렘의 어떤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물 집은, 구브로의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멤버들 중 한 사람이었던 Mnason의 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적 성격이 뚜렷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자기들의 집에 맞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에 속했을, 나손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부딪히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그 부분에서는 왈칵 개방적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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