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로마서4:13-17)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는 역사에 근거를 둔 신앙입니다. 교회는 역사적이지 이교들처럼 허무맹랑한 전설과 신화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간은 흐르면서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식은 하고 있지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구는 그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시속1600km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1600km로 자전하면서 시속 11만km로 태양을 공전합니다. 지구는 은하계를 시속 10만km로 가로지르는 태양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77만km로 움직이는 은하계 공전 궤도 안에서 움직입니다. 지구는 시속 216만km로 공간을 통과합니다. 24시간마다 우리는 9000만km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336억km의 공간을 여행합니다. 일 년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지만, 분명히 같은 봄은 아닙니다. 우리를 변하게 한 봄을 맞고 각 계절을 맞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때문입니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되 교리적 진술이나 신학적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과 언약관계의 이야기 가운데 계시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장들이 그들의 자녀들의 질문에 대답할 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신6:20) 하거든 다시 한 번 출애굽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위대한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전해진 것입니다. 즉 그것은 애굽과 광야에서, 다윗의 통치하에서, 솔로몬 당시의 문명 속에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그리고 마카비가(家)의 지도 아래 싸울 때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동일한 이야기의 모든 부분은 로마에서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와, 교회의 성장 및 확장과 개혁되어야 하고 사도들의 비전을 다시 가져야 하는 필요성과 더불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신비입니다. 복음의 신비는 간단한 진술로 한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시정(詩情)을 위해서 정통교리의 기하학적 해석을 잘못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잘못된 교리가 마치 정통교리인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행세를 할 때 교회의 건물로, 교세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시입니다. 즉 성령께서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역동적 여정 안에서 그 백성에게 활력을 줄 때, 성령의 맥박과 심장의 고동소리를 지닌 시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사를 망라하는 이 하나의 이야기에는 초점이 있다. Oscar Cullmann은 이것을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시간의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신앙의 불명예는 세속사의 다른 기간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이 수년간을 ‘전체시간’의 중심이며 표준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만물이 시작될 때 말씀은 이미 존재하였음을 이것에 못지않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이 시간을 습격한 실재이며(reality), 불확실한 전망의 그늘진 세계에 쳐들어 온 실제적이고 참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예수만을 강조하는 교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통로로 마리아를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우리 눈은 밝아지고 궁극적인 진리를 얼핏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다른 모든 경험들은 오직 이것과 관련하여 판단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수수께끼를 의미 있게 하는 참조표입니다. 그래서 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절정은-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있어서 그 끝이 아니라 중간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사도신경에서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는 만납니다. 바로 신앙의 세계밖에 있는 본디오 빌라도가 그리스도인의 주장의 신빙성을 위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억측이나 상상의 어떤 전설적 인물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높임을 받아야 하는가? 마리아인가? 예수님인가? 누가 크리스마스의 주인인가? 산타크로스인가? 예수님인가? 누가 교회의 주인인가? 성도들인가? 예수님인가? 우리들은 오늘 이것을 많이 잊고 있습니다.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님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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