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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로마서6:1-11)

 

요즘의 성도들은 세례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지 못하여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고 요소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뭇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1-7항을 보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로서 세례 받은 당사자를 유형교회에 엄숙하게 가입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그 당사자에게는 은혜언약의 표호와 인호가 된다. 또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고 중생하고 죄를 사함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나타내며 확증한다. 이 성례는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명하신 것이기에 세상 끝 날까지 그의 교회 안에서 계속 집행되어야 한다. 이 성례에 사용되어야 하는 외형적 요소는 물이며 이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되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복음의 사역자인 목사에 의해서 집례 되어야 한다. 세례 받는 사람을 물속에 잠기게 할 필요가 없고 세례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물을 붓거나 뿌려서 베푸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앙과 순종을 실제로 고백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양친이 다 믿

거나 어느 한 편만 믿는 집의 유아들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이 의식을 모독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죄가 된다. 그렇지만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생할 수 없다거나 구원 못 받는다든가 또는 세례 받는 사람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중생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세례의식에 은혜와 구원이 불가분하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의 효력은 그것이 집행되는 그 순간에 꼭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을 옳게 집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하나님 자신의 뜻하신바 계획을 따라서 약속된 은혜를 받도록 되어 있는 사람(어른이든지 유아든지)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제공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로 나타나고 부여된다. 세례 의식은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한 번만 베풀어져야 한다.

사도바울 당시의 세례는 오늘날의 세례와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성인세례(成人洗禮)였습니다. 당시에 유아세례는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의 개인으로 그것도 곧 자기가족을 뒤에 두고 그리스도에게 나왔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신앙고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 들어올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교(異敎)에서 직접적으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세례는 그의 생애에서 분계선이었습니다. 세례로 자기의 생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뿌리로부터 찢어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기 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세례는 전신 침례였습니다. 사람이 물속으로 내려가 물이 그 위에 덮일 때면 그것은 무덤 속에 파묻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올 때 그것은 무덤에서 나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세례는 상징적으로 죽고 부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 가지 생에 죽고 다른 종류의 생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옛 죄악생활에 죽고 은혜의 새 생활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사람으로 물속으로 내려갔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교인(異敎人)이 유대교에 들어갈 때 세 가지 일을 수반했습니다. 제사와 할례와 세례입니다. 이방인은 세례로 유대교에 들어갔습니다. 세례의식에서 세례 받을 사람은 자기 손톱, 발톱과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옷을 완전히 벗었습니다. 세례수(洗禮水)는 약 40세아 약 500정도의 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몸의 어느 부분이나 물이 닿아야했습니다. 그가 물속에 있을 때 세 명의 세례 집례자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권면과 축복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이 세례의 효과는 완전히 중생(重生)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루 밖에 안 된 갓난아기라고 불려졌습니다. 그의 모든 죄는 다 용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낳기 전에 지은 죄를 하나님은 별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William Barclay는 헬라인들의 세례이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헬라의 종교는 신비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 신비종교들은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방은 어떤 신과의 결합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화는 수난극(受難劇)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난을 당해 죽고 다시 살아난 신들의 이야기에 근거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야기를 연극화(演劇化)했습니다. 누구나 그 연극을 관람하기 전에 기초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그 연극의 내적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기나긴 사전교육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행을 해야 했습니다. 이어서 조심스레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지고 준비되어졌습니다. 드라마는 음악, 조명, 향과 제물 등 모든 방편을 다 동원하여 연출되었습니다. 연극이 연출되는 동안 그 사람은 그 신과 하나가 된 것 같이 느꼈습니다. 그는 신과 일체가 되는 감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 경지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입신식(入信式)을 받았습니다. 이 입신식은 인간이 영생을 위해 재생하는 새 출생이 뒤따르는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신식을 받은 사람은 자기는 자발적인 죽음을 체험했다고 말해야했습니다. 어떤 신화극에서 입신식을 받을 사람을 죽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는 도랑에 머리까지 잠겼습니다. 그가 입신식을 받을 때 그는 어린아이라고 불리고 갓난아이와 같이 우유를 먹였습니다. 어느 다른 신화극에서 입신식을 받을 사람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신이여, 나의 영과 나의 생각과 나의 전생(全生)으로 들어오시오. 당신은 곧 나요 나는 곧 당신입니다.” 철저하게 이교였던 헬라인은 아무라도 바울이 죽었다가 세례 안에서 다시 산다고 하는 중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를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가 그의 아이디어나 그의 말들을 유대교적 또는 이교적 관계에서 빌어 왔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함께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말과 예화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우리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먼저 우리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이 세례입니다. 죽은 우리가 다시 부활할 모습으로, 세상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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