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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로마서8:26-30)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사도신경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모는 면에서 우리 구속의 값을 치루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였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그 멍에 아래 잡혀 있었는데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 세력에 내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히3:32)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이다. 그가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죽지 않을 것임을 보증하셨고,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살도록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다른 것은 그는 죽으심으로서 자신이 삼킨바 되었는데 이는 그 깊은 연못가운데 빠진 것이 아니고 도리어 우리를 삼켜 버리려했던 그것을 삼켜 버렸다(벧전3:22). 그는 친히 죽음을 따랐지만 그 죽음의 세력에 압도당해 버린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쓰러진 상태를 보고 기뻐 날뛰었을 때 결정타를 가하셨다. 또한 그 목적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함이었다(히2: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첫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또 다른 효과는 우리가 그것에 참여함으로서 그의 죽음은 우리의 지상적인 지체가 죽어버림으로서 더 이상 효능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 우리 안에 있는 몇 사람을 죽여 버림으로서 번영과 질서를 맺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사 지낸바 된 것도 같은 효과를 가지는데 우리가 그것에 참여함으로서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묻혀 버리게 된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느니라”(롬6:5). 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죄에 대하여 장사 되었느니라”(롬 6:4). 이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뭇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뭇박히게 하기 위함이요(갈2:19/6:14), 이는 우리가 그와 함께 죽기 위함인 것이다(골3:3) 라는 등의 말들로서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범으로만 삼으라고 권면하는 것만 아니고 그의 죽음을 무용하고 열매 없는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뜻이 없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야 할 효과가 그 죽음 속에 있다는 것까지 명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이중적인 복을 누리게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묶여 있던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우리 육신의 죽음 등 두 가지다.

라고 했습니다.

 

John Murray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이로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탁월하게 시현(示顯)된다. 그리스도가 주어지고 보내심을 받은 것은 성부의 뜻에 의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뜻에 의해서였다. 그리스도는 구원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유일한 선택은 온 인류가 멸망 받는 것이었다(요3:16). 예수만이 홀로 구원의 대장이시다. 그분 외에 그 누구도 구속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그분 외에 그 누구도 죄를 위해 속죄하지 않았고, 화목제물이 되지 않았으며, 화목을 행하지 않았다. 우리 인간들이 이 장중한 성취에 어떤 부분을 담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겠는가!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 하나의 유일 무이성, 그것이 나타내는 은혜의 지극히 크심, 그것이 가져오는 구원의 완전한 효력을 바라보는 바로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엡2:7)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과 작용을 우리들이 짓는 어떤 구성요소에 의해 조건 지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인지 드러난다. 우리가 죄 가운데 죽었을 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바울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 어떠한 것도, 그 어떠한 사람도 개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의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교도 그들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한 행위자체가 구원에 개입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代贖)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이교도도 죽은 이후로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귀에 속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가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창세기11장을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각종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심판배제 등 하나님과 관계된 것을 모두 끓으려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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