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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왜곡/교황제도 확립(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어떤 종교든지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고 사람들이 많아지면 교회가 다른 곳으로 그 힘을 돌리려고 합니다. 이때 교회가 성경적이지 못하면 바로 세속화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슬슬 지금 기어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코 심판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Roma의 영향력은 레오1세(Leo I/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있는 동안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는 5세기 교황들 가운데 가장 기민한 자였습니다. 5세기중엽에 발생한 두 가지 중요한 사건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관계에 대한 기독론논쟁과 로마제국에 대한 야만인들의 침공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서 레오1세는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성직임명과 관련된 사계 제일기간, 즉 사순절, 오순절 이후 9월, 강림절에 매년 4번의 단식을 준행하게 한 것도 레오였습니다. 레오의 정치적 수완은 로마의 역대 감독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Damasus 아래 제정된 일련의 법령들을 지속시켰습니다. 마니교의 성찬동참이나 태양신과 기독교를 혼합시키려는 행위에 대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452년에는 로마를 괴롭히는 흉노족인 아틸라에게 찾아가 담판까지 벌렸습니다.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했을 때는 중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삶에서 핵심적인 문제였던 교리적 문제도 손을 댔습니다. Leo는 서방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서방교회에 기독론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감독 지위가 교회에서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서 지녔던 지위와 동일한 지위”라는 그의 진술은 교황제도의 교리적 토대를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위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나 그가 발휘한 영향력에 있어서 누구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Leo가 성 베드로 성당에 묻힌 최초의 교황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Leo는 베드로와 바울이 Romulus(로마 건국의 시조라고 하는 자)와 Remus(로마의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의 쌍둥이 형제) 대신 로마 수호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Leo의 편지와 칙서에 나타난 문체를 보면 마치 황제가 내리는 조서 같았습니다. 이토록 Leo는 그레고리1세와 니콜라스1세와 함께 역사에서 소위 “대제”(Great)라 불리는 세 명의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래 교황청의 권력과 특권이 그의 방법론, 정책, 이상에 개괄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셀레스틴과 식스투스III세 아래서 420년과 430년대에 로마교회 수석집사 역할을 하면서 Leo는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곧 로마의 감독이 되었고, 440-461까지 21년 동안 서방교회에서 “로마의 교황권을 확립하고 동방 교회들과의 관계에서 교회법 (Canon Law)을 지지하며, 동방에서 발생한 기독론 논쟁에서 로마교회의 정통적 기독론을 방어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야만인들의 침략 앞에서 로마교회를 다스리는데 진력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Leo의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교황제도의 확립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Leo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로마교회의 우월성은 서방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Leo는 서방 교회들에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마니교, 브리스길라주의(Priscillianism),1 펠라기우스주의(Pellagianism),2 감독의 자질, 재세례 같은 치리적 실제적 문제들 및 야만인들의 침공에 의해 야기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Leo가 로마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입니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서 시릴의 후계자였던 디오스코루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권위를 동방 교회들 위에 높이 진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지도자인 유티케스(Eutyches)를 동맹자로 두고 있었습니다. 유티케스는 시릴의 교리를 극단으로 끌고 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적절한 자리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449년에 기독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으며 사회를 주도한 디오스코루스는 이 회의에서 Leo의 서신낭독을 불허했습니다. Leo의 입장이 이 회의에서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방 황제 데오도시우스II세가 450년에 죽었습니다. 그의 누이 펄케리아(Pulcheria) 및 그녀와 결혼한 마르시안 장군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펄케리아는 오래 전부터 Leo와 그의 양성 기독론에 동조해 왔었습니다. 정치적 변화는 곧 교회의 논쟁의 변화였습니다. 451년 520명의 감독들이 모인 가운데 칼케돈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Leo는 로마 감독들이 이전의 동방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전례에 의거하여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 사절단을 대리로 파견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451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함,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Leo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교부들의 신앙, 사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믿는다. 정통은 그렇게 믿을지어다! 달리 믿는 자에게 저주(Anathema)가 있을지어다! Leo를 통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Leo의 서신이 받아들여져 칼케돈회의에서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과 한 본체에 두 본성이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존재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레오의 교리가 확정됨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교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습니다. 모든 점에 있어서 거룩한 교부들의 판단을 따라 또한 우리가 읽은바 가장 경건한 150감독들의 법규〔콘스탄티노플 회의. 381〕를 따라 우리는 새 로마인 가장 거룩한 도성 콘스탄티노플의 특권에 대하여 같은 것을 작정하고 반포했습니다. 대개 옛 로마의 왕위에 대하여 교부들이 특권을 허락하였던 것은 마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150 감독들은 이 새 로마에 대하여 꼭 같은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 로마는 교회의 문제들에 있어서도 옛 로마와 똑같은 특권을 누려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순위에 있어서 옛 로마의 다음이 될 뿐이었습니다. 칼케돈 회의의 결정은 381년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동등하다는 콘스탄티노플 결정을 재확인 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은 새 로마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감독은 로마감독 다음의 영예를 가진다”고 결정한 바가 있습니다. 항상 로마의 우월권을 주창한 Leo는 “28조항의 법규가 325년 니케아에서 가결된 법규와 모순되며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위상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Leo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Leo는 “단순한 역사적 이상의 의미로서 자기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하거나 편지를 쓸 때에 바로 베드로 자신이 말하고 글 쓰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최소한 그의 말과 그를 듣고 읽는 이들은 이러한 태도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황은 성 베드로가 소유했던 모든 것의 합법적 계승자이므로 그가 가진(천국에의) 열쇠의 권한의 정도도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Leo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임직 기념일에 있었던 그의 설교는 마태복음16:16-19, 누가복음 22:31, 요한복음21:15-17을 사용했습니다. 베드로가 감독들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참람된 주장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의 권위를 로마의 후임 감독들에게 전이하였으므로 로마 교회에는 영구적인 베드로의 권위가 존재한다고 참람된 주장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도 듣지 않고. 사도들의 왕인(?) 복된 베드로를 통하여 지극히 거룩한 로마교회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 대한 통치권을 소유한다고 주장했습니다. Leo는 자신을 베드로와 거의 동일시하였습니다: “Leo는 우리가 베드로의 대리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감독은 모든 감독들 가운데 최고라는 것입니다. 3세기의 감독직에 대한 교리는 모든 감독을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다루었으나, Leo는 감독들의 권위가 어떤 의미에서 자기에게 종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감독들이 교회의 목양에 동참하지만 로마감독의 “충만한 권위”에는 동참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Pope(아버지)이라는 단어는 3세기 이래 주요 교회들의 감독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 이후부터 로마의 감독에 대한 칭호로 쓰였습니다. Leo에게서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Leo는 비약적인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Leo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로마제국의 두 부분 (교회와 정부) 사이에 어떤 유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로마와 교회를 비교했습니다. 로마교회의 창설자인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의 쌍둥이 창설자 Romulus와 Remus 같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Leo가 바울을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 관련 본문이 로마의 최고권에 대해 보다 많은 지지기반이 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Leo덕에 로마는 다른 교구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였습니다. 교황제도가 표면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Leo이후 영향력 있는 자는 겔라시우스1세(492-496)였습니다. 겔라시우스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듯이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고 황당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축복받은 베드로의 교구는 다른 어떤 감독들의 결정에 의해 매어진 것이라도 다시 풀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이런 확신 하에 그는 교회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교황제도는 역사에서 정착되었습니다.

  1. 4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한 이단(異端)으로 원래 평신도였던 프리실리아누스는 인스탄티우스(Instantius, 385년 면직) 주교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었고, 살비아누스(Salvianus) 주교에 의해 아빌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온 그노시스주의와 마니교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어 그가 사목을 담당하는 지방에 그의 교리를 폈으며, 황제 막시무스에 의해 체포되어 마술사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였다. 프리실리아누스파는 양태론(樣態論, Modalist)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人性)을 부정하였으며, 천사는 하느님에게서 유출(流出, emamations)된 존재로 파악하였다. 또 악마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악마에게서 육체가 생겨났고, 죄를 범한 영혼은 벌을 받아 육체와 결합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2. Pelagianism: 영국의 금욕적수도사이며, 신학자이고 교사였던 Pelagius로부터 유래한 신학적 견해. 그는 410년을 전후하여 로마에서 신앙생활 지도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아프리카의 히포와 카르타고, 팔레스타인을 전전하며 금욕적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하나님이 남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든지 말든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은총론 및 예정설의 내용을 변질시키고 원죄(原罪)를 부정하는 이른바 펠라기우스설을 주창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 그 무엇 하나도 명령하지 않았고, 또 누구든지 그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죄를 범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육체의 연약성 등을 구실로 우유부단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도덕적 노력을 하도록 분발시키려 했다.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성질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의지는 항상 선과 마찬가지로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서 인간의 성질은 악에 대한 편향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지 않았다고 했다. 즉,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유아들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똑 같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또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내적 은혜의 필요성도, 속죄의 필요성도 모두 부정하였다. 인간의 성질은 선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쉽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한다. 이른바 '선택할 수 있는 힘'(possibilitas utriusque patris) 곧 형식적인 자유(인간은 그의 자유의지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해방되었다는)를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에 가장 강력히 반발한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의 불만으로 논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예루살렘 회의(415년), 디오폴리스 회의(415년)에서 펠라기우스주의가 이단시되었으며, 두 차례 카르타고 회의(417, 418년)에서 정죄 유효선언이 내려졌고, 제2오랑주 회의(529년)에서 다시 정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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