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창세기16:4-6)
아브라함이 86세 때 사라의 의도대로 하갈이 잉태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사라는 이제 여자로서 떳떳했습니다.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갈이 이상해졌습니다. 사라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 때부터 아브람의 집안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아브람의 후사를 이어줄 자이기 때문에 사라는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그의 주인을 심히 멸시하였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 것입니다. 나는 날 때부터 개구리였지 올챙이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여주인 사라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갈이 오히려 사라를 하녀 취급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방법대로 한 실패의 결과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이러한 일을 많이 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사라가 열병이 났습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장막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인제공은 자기가 하였으면서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하갈의 문제를 전가하였습니다.
아브람과 사라의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받는 부당행위는 아브라함이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라에 대한 하갈의 태도가 얼마나 오만불손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회계급상 하갈은 하위자이지만 사라보다 상위자로 여기고 그 여주인의 자리를 위협하여 차지하려 했습니다. 사라가 여종 하갈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5절을 보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법적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부당한 불법에 대한 책임이 그녀의 남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법을 시정하는 것도 그의 남편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래는 그때서야 하나님의 판단을 원하였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종이니 사라의 의도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6절). 사라의 학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하갈에게 호된 고통을 가하였습니다. 후사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라는 하갈에게 괴로움을 더해만 갔습니다. 결국 임신했다고 주인을 멸시했던 하갈은 학대에 못 이겨서 도망하였습니다. 사라의 하갈에 대한 학대에 아브라함은 침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에 대한 치리의 권한을 사라에게 맡겼습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입었습니다. 하갈은 약속하심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달을 내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지루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곧 확실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해서 복된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약속하신 내용들이 눈에 보이도록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믿음의 장애물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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