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을 구하는 아브람(창세기14:13)
중동전쟁에서 패배하고 도망한 한 사람이 히브리 사람인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롯이 잡혀서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은 즉시 롯의 구조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출동하였습니다.
히브리 사람이란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 나옵니다. 히브리인이란 아브람을 지칭하는 독특한 명칭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주민들 중에 살면서 불려진 관습적 별명입니다. 이 명칭은 민족의 이름이었지만 이방인들과 교제할 때나 그들 자신을 이방인들과 구별할 때 외에는 “히브리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인이란 다른 편에서 온 사람, 강을 건너 온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브람은 토착민 또는 정착주민들에게 단순히 이방인 곧 요단 혹은 큰 강 유프라데스 강 저편에서 온 사람이나 ‘강 건너온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쳐집니까? 우리는 아브람처럼 대이주(大移住)를 하므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즉 과거를 떠나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체에서 이탈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많은 재산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종교인들 중에서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쳐 어느 한 순간에 의식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새벽과 같았든 촛불 점화 같았든 하나님의 빛이 처음으로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던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강을 건넙니다. 예수님이라는 믿음의 강을 넘을 때 변화가 있습니다. 한번 강을 건너온 우리로서는 강 저편을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메소포타미아에 가지 않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아브람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똑같은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강 이편에 괴로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강 저편에 가지 않는 이유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 저편에 갔다가 오면 그만큼 세월이 낭비가 됩니다. 갔다가 오면 원위치가 되어 기초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그래서 강 저편을 바라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일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을 인도하는 분은 창조주이십니다. 아브람이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브람을 害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창조주이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누구든지 해할 수 없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을 건너온 사람입니다. 강 저편에 세상의 모든 것을 놓고 나왔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고 채우실 것을 믿고서 다시는 강 저편으로 건너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