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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형식에 매인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25-26)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의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았습니까”하고 물으면 비록 모르더라도 “예”하고 전원일치해서 대답한다. 왜냐하면 전원일치하여 알았다고 대꾸하는 것이 알았습니까 하고 묻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선생님의 명분, 학생으로서의 당위, 그리고 모두가 알 것이라는 지배적인 추세 때문에 모른다는 본심을 희생시킨다. 여기서 ‘모른다’고 사실을 말하는 독립적 언행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의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미학교의 어린이들은모르는 것이 있으면 민망스러울 정도로 완고하게 모른다고 버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선택할 때, 어느 한두 사람이 선택한 메뉴가 반드시 내가 꼭 먹고 싶은 것이 아니더라도 대개는 그에 휩쓸려 “나도, 나도”하며 동일화하는 다중에 휩쓸라는 습성이 있다.

또한 일상의 교제나 직장생활에 있어서도 이 같은 겉과 얼굴과 속이 다른 이중성으로 공적얼굴과 사적얼굴을 잘 배려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조종 해 나간다. 예로 만나기 싫은 사람을 오래 만에 길가다 만났다 하자. 속으로는 에이하고, 빨리 가버리라고 속 얼굴은 찡그리면서 겉으로는 “반갑다. 일새 꼭 한 잔 하자”고 겉 얼굴은 웃는다. 외래자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는 막중하고 과분하게 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환대한다. 그 환대 때문에 몇 달 동안 조의조식(租衣租食)을 한다는 건 다반사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것 하나 쓸모 있는 것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버려야 할 것들만 잔뜩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들이 율법위에 여러 가지 규정을 덧붙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손을 씻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법제화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손을 씻는 양과 질, 물 붓는 방법,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 손의 자세 등을 규정해놓았습니다. 이런 의식을 하면서 그들은 자랑했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힐난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접을 깨끗이 닦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책망하셨습니까? 그릇은 깨끗하지만, 그 안에 담겨지는 음식은 탐욕과 방탕의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부정부패비리로 얻은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것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접은 따라서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최근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들은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거의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비리와 부패가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이 사람들이 망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이 사람들이 속한 교회들이 파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7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파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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