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에 대하여(마태복음6:16-18)
금식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금식(nhsteuvw)은 (nh'sti"/먹지 않는)에서 유래한 말로 ‘음식이 없다’입니다.
LXX에서 금식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한 준비로 행하였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에 금식했고(출34:28 신 9:9), 다니엘도 환상을 보기 전에 금식했습니다(단9:3). 금식은 큰 근심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개인적으로 행하여졌습니다(삼하12:16-23 왕상21:27 시35:13,69:10). 금식은 전쟁과 멸망의 위험이 임박해졌을 때(삿20:26 대하 20:3 에4:16 욘3:4-10 유딧4:9,13); 메뚜기 재앙 때(욜1장과 2장); 포로지에서 돌아왔을 때(스8:21-23); 속죄제의 때(느9:1); 그리고 끝으로 죽은 자를 애도할 때(삼하1:12), 국가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금식에는 기도가 수반되었으며(14:11-12 느1:4 스8:21, 스8:23), 특별히 회개의 기도가 따랐습니다(삼상7:6). 금식하는 사람은 애곡하는 자의 자세를 종종 취하였습니다(왕상21:27).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겸허한 자세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금식의 심오한 의미는 사라져 갔습니다. 점차 금식은 경건한 공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이들을 논박했습니다(사58:3-7 렘14:12).
예수님 당시의 자신들의 종교에 열심이었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매주 이틀씩의 금식일을 지키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SBⅡ 242이하). 요한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막2:18).
예수님은 외적 금식을 비난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하는 금식을 비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할 때 독특하게 했습니다. 얼굴을 일부러 씻지 않았습니다.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염을 쥐어뜯기도 했습니다. 물론 금식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고도의 전략을 사용한 것입니다. 남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보여주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야! 정말 경건하구나!” “애통하면서 금식하는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연극(drama)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금식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는 표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의 행위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소위 많은 교회들이 보여주기 위한 신앙행위를 강조합니다. “우리교회는 무엇무엇을 잘합니다.”라고 자랑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아닌 것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습니다. 선행이나 자기수양 등이 하나님이 아시면 사람들은 몰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전시효과도 있어야 하지만, 항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신앙행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면 이미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show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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