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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쌓아야 할 성벽
느헤미야8:1-9 / 2023.6.4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1953.7.27). 군사분계선은 휴전선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일본과 군사분계선이 있습니다. 서쪽과 남쪽으로 중국과 군사분계선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입니다. 이때는 군사분계선이 복잡했습니다. 고구려는 북방의 당나라도 지켜야 했습니다. 남쪽으로 신라와 백제도 지켜야 했습니다. 전선이 뒤엉켜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중요했던 요새지가 옛날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radar網으로 감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국 시대에는 군사 요새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산에 군사기지를 만들어 돌로 성을 쌓았습니다. 사람들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성터가 오늘까지 남아 있는 남고산성이나 위봉산성을 봐서 알 수 있습니다. 국가가 성을 쌓는 것은 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에는 국경을 computer와 사람들이 병행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성을 쌓거나 computer로 지키는 것은 같습니다. 우리 역시 국가처럼 성벽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국경을 상시 감시하는 군인들처럼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한순간만 방심하면 우리의 대적 사단이 들어와 신앙에 장애를 발생시켜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 영혼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우리가 제일 먼저 쌓아야 할 벽이 있습니다. 1절에서 5절을 보면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서기관)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I. 우리는 말씀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1-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월1일은 나팔절입니다(레23:23-25). 7월10일은 대속죄일입니다(레23:26-32). 7월15일부터 한 주간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이 끝난 제8일에는 거룩한 大會의 날입니다. 이렇게 절기가 정해져 있었지만, 초막절은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지 900년 만에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일 년 중 여러 절기가 들어있는 칠월을 지키기 위해서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백성들이 유다의 각 성과 마을에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살 집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성벽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에스라를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비통해했습니다. 그들이 포로가 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포로 되었다가 풀려난 서기관이자 제사장인 에스라는 제사장들 가운데 강단에 섰습니다. 서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펴들어 읽었습니다.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가 낭독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성경을 믿지 않았습니다. 법관에게 육법전서가 없이 제멋대로 판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로인해 그들 생활은 뻔해졌습니다. 세상인지 교회인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위기가 닥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등한히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말에 많이 노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일들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에 우리의 귀가 너무나 열려 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심히 둔해졌습니다.
사사기2:10절을 보면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모두 잊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은 수많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중에서 좋은 기회를 놓친 때가 여호수아와 갈렙이 죽고 난 후입니다. 그들은 번성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다른 나라의 정복을 받지 않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성하고 복될 기회를 제공하였음에도,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인 재앙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신문이나 방송의 말들은 100% 믿습니다. 우리가 과거 국민학교 때 기자들을 무관 제왕이라고 배웠습니다. 왕관만 쓰지 않았지, 사실상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옛날에는 기자가 진실만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믿을만한 방송국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희귀합니다. 많은 신문사가 있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신문이 진실만(fact)을 쏟아낼까요? 그런데도 언론사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매우 잘 믿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교회에 자꾸 끌어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불행입니다.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한낱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진은 성경을 일생의 지침서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회개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산에서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살길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복 있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상고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베뢰아 사람처럼 말씀을 읽고, 배우고,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살길을 바르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말씀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II. 우리는 예배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에스라는 하나님을 맘껏 송축했습니다. 위대하신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백성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엘로힘 여호와를 송축했습니다. ‘송축하다’(바라크)의 의미를 보면 무릎을 꿇어서 받는 복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무릎을 꿇는 것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 자신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무릎을 꿇는 것,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함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시편28:6-7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매일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찬송이 없을 때 사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세상의 노래는 하나님을 위한 찬양이 아닙니다. 모두 육신과 인생의 허무함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모두 인간을 찬양하고, 물질을 찬양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단이 기뻐하는 노래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염려하는 노래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 하나님은 두레박 안에 복을 채워 돌려보내십니다. 찬송은 우리 즐거움의 시작이요, 줄거리이며, 완성입니다.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의 찬송은 가치 있는 찬송입니다. 그것을 보고 간증이 되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순서 중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묵상기도, 찬송, 기도, 헌금, 성경봉독, 말씀선포, 찬양, 축도를 하면서 하나님과 우리가 communication을 합니다. 예배로 우리 사정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에게 역시 알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어떤 의식을 치르고 만족하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서 하나하나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제대로 예배를 드린 예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400년 중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대신 우상숭배와 이교의 신들은 사력을 다해 섬겼습니다. 가나안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매우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예배하고, 바알도 섬겼습니다. 복이 두 곳에서 올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온 것은 저주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신들은 사람들이 만든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드리거나 아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레위기10:1-2절을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살라졌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불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라, 다단, 아비람, 온은 제사장 없이 하나님 앞에서 분향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그들을 삼켰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그 첫째가는 의무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의 기도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려 분별과 경외심과 겸손과 열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는 합당한 것들과, 모든 종류의 생존하는 사람들이나, 장차 생존하게 될 자들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흠 없는 설교와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려 분별과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성껏 들어야 합니다. 마음에 은혜로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드리되 경솔하게 행하거나 고의적으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읍시다.
우리는 말씀의 벽과 예배의 벽을 쌓아야 할 뿐만 아니라
III. 우리는 회개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7-9).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토라)을 듣고 울었습니다.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비탄에 잠겼습니다. 제사장이며 서기관인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말씀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엉엉 울었습니다.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비탄에 잠겼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심히 알고 슬퍼했습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신년인 칠월이 되자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나팔을 불어 성회를 공포했습니다. 초막절과 대속죄의 날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 곧 성전 터의 남동쪽에 모였습니다. 수문 앞에서 이스라엘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돌이켜보니 과거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바알을 섬겼던 과거가 원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은 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회개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이전의 삶과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첫걸음입니다. 회개에는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회개와 신앙입니다. 회개란 불신자들이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회개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심은 하나님께로 자유롭게 전향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에 있다가 복된 하나님께로 귀를 기울이며 얼굴을 돌리는 것입니다. 모세나 여호수아, 士師時代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여호와를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한 후에야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유다 왕국에는 히스기야와 요시야 시대에 국가적 회심이 있었습니다. 요나의 전도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욘3:10). 오늘 우리도 가슴을 쳐야 합니다.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시킬 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회개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에 회개를 거부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강퍅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참으로 불행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바로는 모세가 하나님의 재앙을 내려도 그 마음에 전혀 동요가 없었습니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해도 마음이 돌같이 강퍅했습니다. 개구리 해병대가 나일 강으로부터 상륙해도, 메뚜기 공격이 있어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로는 그 자신까지 멸망 당해야 했습니다. 창세기 42장을 보면 요셉에게는 양식이 풍부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예전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요셉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풍부한데 회개하지 않아서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진정한 회개는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 가족이 모두 회개할 때 이미 번영이 우리 문 앞에 도착하였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회개할 때 이미 부흥은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회개할 때 어둠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그리고 빛이 나를 비추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납니다. 바르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살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높게 쌓여 있는 허물어야 할 벽이 많이 있습니다. 내자신의 무능함을 허물어야 합니다. 내 자신의 견고한 자만심을 허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쓸데없는 자존심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쌓아야 할 신앙의 성벽이 많습니다. 허물어야 할 벽들을 허물지 못할 때 신앙이 점점 쇠퇴해 갑니다. 쌓아야 할 벽들을 우리가 쌓지 못할 때 영육이 점점 더 병들어 갑니다.
Closing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여 대적들을 막아낸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벽들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의 성벽을 쌓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의 성벽을 쌓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찬양의 성벽을 쌓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의 성벽을 쌓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성벽 쌓기를 결단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람이 쓰는 것 중에서 전쟁무기가 가장 발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항공모함은 온통 무기로 구성된 배입니다. 미국의 2017년 7월22일부터 취역중인 Gerald R. Ford급 항공모함은 그 이력이 대단합니다. 길이가 333m입니다. 전체높이는 76m이며, 폭이 78m입니다. 흘수가12m인데 떠 있는 물체가 수면에 의해 구분되는 면에서 그 물체의 가장 깊은 점까지의 수심을 말합니다. 갑판은 25층이나 됩니다. 만재배수량은112,000톤입니다. 그러면서도 속력은 시속30노트 이상인데 시속50km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습니다. 승무원은 4,660명이며, 항속거리는 무제한입니다. 그 외에 무장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함재기만 해도 75대 이상이 실려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무기와 같이 작전을 한다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웬만한 국가에서나 소유할 수 있는 무기가 배 하나에 탑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현재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 곁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시간과 공간이 제한하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것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같이 해야 할 이유입니다.
미국은 면적이 983,1519㎢로, 인구 3,3480,5268명, GDP국내총생산량 20조9ㅁ366억달러 세계 1위입니다. 현재 지구에서 미국을 능가할 나라가 없습니다. 러시아나 중국이 땅 크기로 미국과 겨루려고 하지만, 어림없습니다. 국방비가 제1위로 2위에서 10위를 모두 합해도 미국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전 세계가 미국의 활동지역/activity area입니다. 모든 나라가 미국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계기다가는 파멸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예배할 때에는 삼위의 제2위이신 성자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는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Messiah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행하셨던 이적들 외에도, 다른 신적 권세들을 예수님이 행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성자체를 주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하지 못할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마9:6:막2:10:눅5:24), 그리고 죄를 범한 사람들을 말뿐만 아니라(마9:2:막2:5;눅5:20:7:48)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눅15:1-2).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특권입니다. 물론 사람도 사람에게 대하여 지은 죄를 용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만이 그 죄를 용서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요14:13).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심을 밝히셨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자신이 응답하실 것임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신 분만이 기도를 들으실 수 있기 때문에 기도응답을 약속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실례들이 인용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드려진 기도의 실례들은 사도행전1:24절, 7:59절, 9:10-17절, 고린도후서12:8절, 데살로니가전서3:11절, 데살로니가후서2:16절 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그들이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셨습니다. 곧바로 그를 찬양하던 어린아이들을 격노한 대제사장들이 잠잠케 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찬양을 당연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8:2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편 8:2절을 인용한 것에 관하여 D. A. Carson은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찬미하는 것을 원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은 대단하셨다. 1.그의 대답은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찬미할 성경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자. 2.동시에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나중에 (특별히 부활 후에) 그 사건을 음미하고서 예수님의 그 대답에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린아이들의 호산나 찬미는 하나님이 아니라 Messiah이신 다윗의 아들에게 드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Messiah 됨을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의 찬미를 옹호하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도마가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찬미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이 같은 경배와 찬미를 받아들이신 경우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그 자신의 신성을 옹호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십니다.
요한복음 14: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신앙의 합당한 대상으로 자신을 성부와 동일선상에 놓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신성모독입니다. 이 같은 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선하심이 손상되지 않을 유일한 근거는 그의 하나님 되심을 확증하는 것뿐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가르쳐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듯 자기를 신뢰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신적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특권을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속성으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권과 전능성
우리 주님께서 우주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과 권능을 소유하셨습니다. 자신이 택한 자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는 특권과 권능을 가지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생명을 버릴 권세와 다시 생명을 취할 권세도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권세와 특권에 대한 주장들을 어떤 다른 사람이 했다고 하면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배와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우리 주님께서 가지셨습니다.
편재성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신 때, 그는 임마누엘의 호칭을 원용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백성과 항상 인격적으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성령의 권능과 임재를 통해서 뿐 아니라 편재하시는 구주로서 스스로 임재하십니다.
전지성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1:48)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깜짝 놀라게 했을 때, 그는 일반 사람의 지식을 훨씬 뛰어 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식의 수준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들으며 응답해 주는 특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했을 때, 자신에게 전지성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밤낮으로 드려지되 수세기에 걸쳐 시도 때도 없이 드려지는 제자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들을 들어주고, 모든 기도 제목을 하자 없이 간청자와 잘 연결 지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 응답할 수 있는 자는 스스로 전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존재의 깊은 것까지를 아는 지식이 자기에게 있음을 예수님이 주장하신 때(마11:27), 그는 "아들"로서 전지성을 온전히 소유한 것으로 주장하신 것입니다.
유대의 아하스 왕 시대에는 암울했습니다. 시리아와 사마리아가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시리아 북쪽에는 앗수르가 유대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는 더 힘써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유대는 하나님만 믿으면 어떤 위협도 없을 것이며, 戰亂에도 휩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숫제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람의 마지막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들 두 국가는 모압, 암몬, 에돔, 유다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앗수르의 서남진 정책을 저지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동맹하자고 했습니다. 이에 모두 동조했는데, 유다만 거절했습니다. 아하스는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너희들과 같이 해”. 아하스는 앗수르의 힘을 더 의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때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해서 유대를 침범했습니다. 두 나라의 갑작스런 공격에 유다는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버렸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쟤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하스 왕은 강대국인 앗수르를 의지고 하셨습니다. 높은데서든지 낮은데서든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서나 구하면 응답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세상세력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언약입니다. 임마누엘은 일차적으로 유다백성을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훗날에는 Messiah를 보내시겠다는 언약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laeWnM;[i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우리가 통상 Immanuel하면 예수님 출생 때 만을 기억하기 쉽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예언했고, 마태복음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Immanuel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여러 곳에서 나타내셨습니다. Immanuel의 하나님은 이사야 이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의 언약 백성에게 Immanuel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창세기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세기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출애굽기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애굽기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출애굽기23:20,24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여호수아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사무엘하7: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7:7). 하나님께서는 야곱(창28:15)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출3:12)와도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소유로 취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19:5-6).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항상 보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출23:20,24).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수1:5).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삼하7:9).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나타나셨던 것처럼 임재하십니다. 성육하신 아들로 처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19절을 보면 !Iwshvf이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약혼한 Maria가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Maria로서는 이미 가브리엘천사로부터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Maria도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Maria가 임신했는데 !Iwshvf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Iwshvf은 두 가지 방법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Maria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Maria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가만히 끊는 것입니다. !Iwshvf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Maria가 왜 그랬을까? 착한 Maria가 왜 그랬을까? 나는 너무나 사랑하는데 Maria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그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20절에서 23절을 보면 !Iwshvf은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지시를 받습니다. Maria 데려오기를 두려워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Iwshvf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24절에서 25절을 보면 !Iwshvf의 고민이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그랬네! 그러면 그렇지! Maria가 누군데 하면서 !Iwshvf은 고민해서 해방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초자연적으로 이 땅에 들어오셨습니까?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백성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서양 종교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인식입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지만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성이 구심점이 된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태는 Messiah의 거룩한 족보를 다윗에게서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더 멀리 올라갈 수 있도록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였습니다. 누가는 더 합니다.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그 이상은 노아요…그 이상은 아담이요라고 하면서 인류의 조상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복이라는 것을 암시해 놓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복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수록된 네 여인 룻, 다말, 라합, 우리야의 아내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Messiah 의 탄생을 위해서 이방인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동쪽에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온 박사들이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이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저희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2세기경부터 교회를 새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로 부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천사가 !Iwshvf에게 Maria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름을 반드시 예수/!Ihsou'"라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백성/to;n lao;n aujtou'을 위함이라 했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tw'n aJmartiw'n aujtw'n)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거론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과 죄라는 것과 구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류 즉 만인구원이 아닙니다. 자기백성이며(요3:16), 자기 양(요10:11)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전쟁무기를 의지합니다(시20:7). 혹은 육체의 힘을 의지합니다. 얼마나 인간이 상승되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식, 명성, 지위, 훌륭하고 정교한 기계, 영향력 있는 친구, 기개가 뛰어난 사람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단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최대의 적은 죄입니다. 이 죄가 우리들의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죄가 인간을 무참히 파괴시킵니다. 우리나라의 한 해 술 소비량은 소주102병, 맥주164병입니다. 음주행태위험도는 5점 만점에 3점입니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술로 인한 범죄도 엄청납니다. 아마 술 마시는 사람들에게 1년간 술을 못 마시게 한다면 난리일 것입니다. 왜 이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이 죄는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어 파괴시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들이 모두 죄입니다. 우리들의 행위 그 자체가 죄입니다. 죄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표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죄들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의 피와 성령의 거룩하게 성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합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위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참된 행복의 구원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소유하는 구원입니다. 참 자유를 누리는 구원입니다. 영광으로 충만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구원입니다. 기도할 때 응답받는 구원입니다. 영향력 있는 간증을 다른 보일 수 있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영혼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꼭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구원하다/swvzw 는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존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심각한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위험은 전쟁 중 또는 바다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는 위험한 질병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붙여진 명칭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성부에 대한 명칭들로는 태양, 방패, 강한 요새, 피난처, 운명 등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들로는 세상의 빛, 생명의 양식, 길, 진리, 생명 등입니다. 성령에 대한 명칭들로는 진리의 성령, 거룩한 영, 영광의 영, 은혜의 영, 보혜사, 인침의 영, 증거의 영 등입니다. 이 모두의 이름들이 무엇 때문에 나열되어 있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우리에게 미칠 때 Immanuel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보호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은총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분과 연합함으로 임마누엘의 은총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실제적인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존재가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자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했을 때, 어김없이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셔서 도우셨습니다.
Closing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우리 생애전반에 적용되는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의 이름은 예수님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분에게만 적용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대단히 밀접한 이름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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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인간이 만든 허구한 이야기이다. 신화는 당시 저작가들이 꾸민 이야기다. 그 이유는 호메루스 등이 신의 속성을 죄를 지은 인간들의 속성처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범한 범행이 신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 범죄를 범죄로 간주하지 않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절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온갖 상상의 신들을 다 불러모아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면서도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 이것 역시 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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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가 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 제비가 봄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제비가 봄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단지 기다리기 만 하고 날아오지 않는다면 겨울이 멀리 가버렸음을 어찌 알겠는가? 땅도, 풀도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자면 하나님의 때를 먼저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의 비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첫 번째 제비인지, 열 번째 제비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서
지난 6일 현지시각으로 새벽4시17분에 시리아에 인접한 튀르키예 동남부에서 규모 7.8 지진이 발생하여 현재 2,4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NYT, BBC 방송, AP 통신이 전했습니다. 지질조사국은 실제로는 10,0000여명 이상이 훨씬 웃도는 사망자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지진 피해 지역엔 시리아 난민이 다수 거주 중이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지진피해로는 엄청난 피해입니다.
populism이란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슈테펜 헤르초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연구원과 로런수킨 런던 정경대 교수가 윤대통령을 우리나라의 “첫 번째 포퓰리스트 대통령(Yoon-the country’s first populist president)”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습니까? 윤대통령이 우리나라가 핵을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데도 소유할 것처럼 국민을 기만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사람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통치 기간 내내 이들은 기존 정치과정을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혐오와 차별을 확산했고, 대선 이후에는 지지자들이 선거결과에 불복하며 국가가 내전을 걱정할 만큼 분열되었습니다. 두 나라는 민주주의가 무너질 뻔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 이웃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육기관에서 악한 짓들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텐데 악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선과 좋음은 사람들을 좋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쁨과 악은 사람들을 나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선과 좋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선과 좋음은 나에게도 유익을 줍니다. 악과 나쁨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됩니다. 악과 나쁨은 가정을 해치고, 사회를 해치며, 국가 전체를 해치게 됩니다. 이러한 악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사실 각종 교육기관이 악과 나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불법집단이 아니고서는 악과 나쁨을 전수하지 않습니다. 좋음과 선을 가르치는데도 악과 나쁨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쁨과 악이 정의의 탈을 쓰고, 즉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온 국가에 팽배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수사하고, 정의의 탈을 쓰고 재판을 합니다. 선과 좋음은 실종되어가는 것 같고 악과 나쁨은 계속 발전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하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땅의 흙으로부터의 호흡 곧 숨의 효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적인 개성에 존재하거나 사람의 의식적인 자유로운 자아(Ego)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1:6,9,27-28절,2:2-3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27-28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인간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골1:6,9,27-28절,2:2-3). 우리의 이웃에 대한 도덕적 정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내재해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시되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이웃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했을 때 형식상으로는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웃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언약적 신실함을 통해서 반영했어야 하는 실질적 형상은 그와 그의 후손 모두에게서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이 실질적 형상은 하나님 형상의 원형이자 이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을 통해서만 회복됩니다.
창조주이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본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2:1-6을 보면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창조주이십니다. 우주를 관할하시고 그 만든 우주를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동등 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욕심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욕심내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창조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욕망은 피조물의 지위를 절대로 높여주지 못합니다. 욕망은 창세기 3장 이후에서 계속 보지만 욕망은 죽음을 초래합니다. 욕망 있다고 해서 그 욕망대로 살았던 사람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총살당하거니 암살당하거나 독살당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도 죽이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 최고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들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보살피고 보호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개역)가 아니라 “경작하고 지킨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정원지기나 목자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선한 것입니다. 일은 동산을 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은 동산을 특별한 피조물인 사람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16절과 17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살 때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허용된 것과 금지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산의 나무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금지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나무의 정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지된 사실입니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명령하심의 권위만 있습니다. 사람은 조건 없는 순종에 대한 기대만 있습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은 부르심, 허용, 금지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차적인 과제는 하나님의 목적이 갖는 세 가지 차원을 한데 묶는 일입니다. 어느 두 가지도 다른 한 가지가 없이는 삶을 왜곡시킵니다.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ironical 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소명에 담겨 있는 명령이나 허용에 담겨 있는 선물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명과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채로 있습니다. 동산의 하나님은 주로 금지하는 분으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지는 다른 두 가지를 통해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세 가지의 병렬과 그들 사이의 균형은 이 본문에 인간의 운명에 관한 미묘한 통찰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정녕 죽으리라(2:17)/tWmT; t/m WNM,mi/mimhenhū(그것으로부터) môt thâmūt 그것으로부터 죽고 죽으리라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봅니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죽음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죽는 즉시 거기에서 끝나버립니다. 죽음은 해체되는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해체됩니다. 영혼은 천국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육신은 죽는 즉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육신은 애초에 사람이 왔던 곳,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들과 이별입니다. 사랑의 온도가 최고도였던 로미오와 줄리엣 같아도 헤어져야 합니다. 죽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약으로 약간의 생명은 연장하지만, 결국은 죽어야 하고 죽습니다. 왜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이 죽음은 성경 말고 다른 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아담은 말씀대로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 나무의 실과에 유해 한 독소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범죄에 수반되는 죽음은 열매에 있지 않았습니다.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에 있습니다. 죄가 되는 행동에 범죄구성요건이 있습니다(pulpit;창225p).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증적인 법을 어겼습니다.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긴 것입니다(Matthew Henry;창79.80).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를 어긴 것입니다(Calvin). 선악의 지식은 단순한 선악의 경험이 아닙니다. 영적인 발전에 있어서 도덕적 요소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후손들을 죽음에 빠트렸습니다(Keil and Delitzsch;창90,91).
마귀에게 특강을 받은 아담과 하와(3:4)/@WtmuT] t/mAaOl/lō môt thĕmutūn 결코 너희가 죽고 죽지 않는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에서 “아니하리라” 부정어는 완강하게 부정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부정어에서 가장 완강한 부정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희가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고 죽으리라라고 하셨는데, 마귀는 아담에게 아냐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으면 죽지 않았는데, 마귀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하신 대로 죽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Mussolini(1883.7.29.-1945.4.28.)는 전혀 일관성이라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기호학 교수 움베르토 에코는 “Mussolini에게 철학 따위는 없었다. 단지 그럴듯한 말뿐”이라고 말했습니다. Mussolini는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했고, 코스모폴리탄(범세계주의자)이었다가 국가주의자가 되었으며, 왕년의 무신론자로서 집권 중에는 자신을 “신이 이탈리아에 내리신 선물”이라 말했습니다. 왕정을 기필코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가, 국왕의 보호자를 자처했습니다. 다시 왕정반대론자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많은 자가 그를 따랐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사람이 악한 자인가? 선한 자인가를 구별해서 따라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따르면 결과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죄입니다. 아담이 사단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에게 특강을 받은 것입니다.
아담이 시험(probation)과 유혹(temptation) 사이에서 설왕설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가 악용하여 그것에 유혹의 요소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시험의 배후에는 선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혹의 배후에는 악한 계획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뱀”은 사단이 한 소리입니다. 뱀을 통하여 사단이 복화술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단은 일단 하와의 하나님께 대한 認知度에 “참으로”라는 말로 혼란하게 합니다. 참으로#a"'/’āp라는 단어는 앞에 말한 것에 덧붙여진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한, 뿐만 아니라, 실로, 긍정문 뒤에서 ‘얼마나 많이’, 부정문 뒤에서 ‘얼마나 적게’, 반의적 의미로 ‘그러나’” 등입니다. 하와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으실텐데,” “하와 니가 잘못 들었겠지, 하나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셔”. “참으로”라는 말은 사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인용한 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하와로 하여금 고려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하와는 사단이 말하는 이례적인 일을 깨닫지 못한 채 사단과의 대화에 말려들었습니다.
창세기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사실에 반대되는 조건문에 대해 말을 더하고 뺐습니다.
창세기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와는 하나님보다 더한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에 더하고 뺌으로서 뱀보다 더 나은 자신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뱀에 대한 지적 우월감에 빠졌습니다. 뱀에 대하여 느꼈어야 할 두려움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사단은 간교하게도 과장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나무”를 사용함으로써 하와로하여금 하나님께 속박당하고 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뱀은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하와로하여금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마음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에 의하여 엄청나게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했습니다. 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하게 속박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와의 덧붙여진 말, “만지지도 말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의 이 같은 부정적인 말에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 심하게 속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인용했습니다.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와는 “만지는” 권리를 거부당했다고 터무니없이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지나치게 가혹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뱀이 의심을 심어주는 말로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하와는 뱀의 접근을 사전에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뱀하고 계속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금지 명령의 정확한 내용을 비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언된 형벌 “죽고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너희가 죽을까하노라”로 해석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안녕에 관심이 있으시기에 먹지 말라고 권하셨다.” 그렇게 미혹된 하와에게 “뱀은 내가 fact를 말해 줄까?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경고로 해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명령으로 주어졌다. 네가 순종한 대상인 그분은 너에 대하여 별다른 정당한 이유 없이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려 하고 있다. 네가 또 죽음을 단순히 자애로운 관심으로 해석하는 것도 역시 잘못되었다. 그것은 사실상 협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허울뿐이요 형벌도 시시한 위협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진정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인바, 이는 너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그가 너희의 잠재 능력 곧 하나님과의 동등 됨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과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어 선악의 비밀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고 이로써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아는 자가 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동기가 거짓되기에 그의 금지 명령 또한 부당하며 불순종에 대한 그의 위협적인 형벌도 말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뱀이 사악하게도 거짓과 악한 동기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을 때 하와는 침묵했습니다. 사단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이름을 방어하는데 실패했습니다. 하와는 마귀에게 완전히 미혹 당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충성심마저 흔들렸습니다. 이쯤 되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하와의 눈에 그 나무가 먹기도 좋고 눈을 즐겁게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이미 결론이 나 있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이란 말은 “여자가 그 나무에 대하여 결론을 지은즉…”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말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다음에 뒤따라 취해진 그들의 행동들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 같은 행동은 그들의 마음에서 그들이 언약을 지키는 자이기를 이미 포기하고 대신 언약을 파괴하는 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6절에서 “자기와 함께 한”이라는 문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와는 실과를 먹었으되 아담이 그 여자로부터 받아먹기를 거절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그러나, 하와는 죄가 있으나 아담은 죄가 없는 경우가 결코 있지 아니했고, 또 아담이 그 실과를 거절했을 만한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그 같은 질문은 헛된 말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과 대화하고 그 실과를 따먹는 전 과정을 통해서 그 여자와 줄곧 함께 있었습니다. 그도 똑같이 범죄 한 것입니다. 아담은 그 여자에 대한 머리 됨을 포기하고 그 여자가 범죄 하던 때 줄곧 함께 있으면서도 그 여자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허용한 까닭에 그 자신도 사실상 범죄한 것입니다. 하와가 타락하던 때에 아담도 타락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미 먼저 타락해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마찬가지로 뱀이 하나님의 순전함을 공격하던 때에 그의 명예를 방어하는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가르쳐 뱀의 속임수를 저항하도록 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기 아내로 하여금 자기를 가르쳐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무시하게끔 허용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여자가 완전하게 속임을 당하고 있던 때,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의식적으로, 고의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범하였다고 했습니다(딤전2:14).
성도 여러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사단에게 선악과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했습니다. 말씀을 비틀어서 해석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사단의 거짓말을 듣고서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거절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말씀대로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사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假設로 만들었습니다. 거짓말로 깎아내리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에 대한 권위의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 자신에게로 옮겼음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권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참과 거짓을 실험을 통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들이 실험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실과를 먹는 순간에 선악과에 관한 사단의 가설을 참된 것으로 이미 믿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실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진실로 믿었다고 하면 그들은 결코 실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이 말하는 대로, 사람들은 결코 자율적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행하게 되어있습니다(엡2:2).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생각하기를, 자기들의 인생길을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진선미를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자율적 권리를 단지 행사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소위 말해서 인간승리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가 되었고, 그날 이후로 그들의 타락한 후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유사한 자율권을 계속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단순히 사과 한 조각 먹은 정도의 사소한 행동을 한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욱하여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형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 범죄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피조물의 의도적인 거부와 창조주를 대항하는 고의적인 반항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율권과 자유를 요구한 것입니다. 사람이 형이상학적으로 그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경험론적으로 그가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리라” 그리고 윤리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그의 남편도 먹은지라”를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섬기라고 하는 사단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되 자기 좋을대로 결정하였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Closing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이 너희를 위하여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주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은 부르심, 허용, 금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이 세 가지 부르심, 허용, 금지하심은 한데 묶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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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증주의 實證主義 positivism 진정한 지식을 소위 실증 학문(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증거를 기초로 한다고 여겨지는 학문)으로 제한하는 경험론적 철학. 실증주의자들은 직접 관찰될 수 없는 것에 대해 회의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의 실증주의는 Auguste Comte오귀스트 콩트( 1798-1857)와 John Stuart Mill존 스튜어트 밀(1806-1873)과 관련된다. 20세기의 경험론적 사상은 논리 실증주의를 형성한 기호 논리학의 분석 기술과 관련된다. 경험론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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