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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17-3:4 

 

지난 6일 현지시각으로 새벽417분에 시리아에 인접한 튀르키예 동남부에서 규모7.8 지진이 발생하여 현재 2,4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NYT, BBC 방송, AP 통신이 전했습니다.지질조사국은 실제로는 10,0000여명 이상이 훨씬 웃도는 사망자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지진피해지역엔시리아난민이 다수 거주 중이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지진피해로는 엄청난 피해입니다.

populism이란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슈테펜 헤르초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연구원과 로런수킨 런던 정경대 교수가 윤대통령을 우리나라의 첫 번째 포퓰리스트 대통령(Yoon-the country’s first populist president)”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습니까? 윤대통령이 우리나라가 핵을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데도 소유할 것처럼 국민을 기만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사람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통치 기간 내내 이들은 기존 정치과정을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혐오와 차별을 확산했고, 대선 이후에는 지지자들이 선거결과에 불복하며 국가가 내전을 걱정할 만큼 분열되었습니다. 두 나라는 민주주의가 무너질 뻔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 이웃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육기관에서 악한 짓들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을 텐데 악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선과 좋음은 사람들을 좋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쁨과 악은 사람들을 나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선과 좋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선과 좋음은 나에게도 유익을 줍니다. 악과 나쁨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됩니다. 악과 나쁨은 가정을 해치고, 사회를 해치며, 국가 전체를 해치게 됩니다. 이러한 악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사실 각종 교육기관이 악과 나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불법집단이 아니고서는 악과 나쁨을 전수하지 않습니다. 좋음과 선을 가르치는데도 악과 나쁨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쁨과 악이 정의의 탈을 쓰고, 즉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온 국가에 팽배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수사하고, 정의의 탈을 쓰고 재판을 합니다. 선과 좋음은 실종되어가는 것 같고 악과 나쁨은 계속 발전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하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땅의 흙으로부터의 호흡 곧 숨의 효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적인 개성에 존재하거나 사람의 의식적인 자유로운 자아(Ego)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1:6,9,27-28,2:2-3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27-28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인간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1:6,9,27-28,2:2-3). 우리의 이웃에 대한 도덕적 정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내재해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시되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이웃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했을 때 형식상으로는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웃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언약적 신실함을 통해서 반영했어야 하는 실질적 형상은 그와 그의 후손 모두에게서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이 실질적 형상은 하나님 형상의 원형이자 이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을 통해서만 회복됩니다.

창조주이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본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2:1-6을 보면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창조주이십니다. 우주를 관할하시고 그 만든 우주를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동등 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욕심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욕심내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창조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욕망은 피조물의 지위를 절대로 높여주지 못합니다. 욕망은 창세기 3장 이후에서 계속 보지만 욕망은 죽음을 초래합니다. 욕망 있다고 해서 그 욕망대로 살았던 사람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총살당하거니 암살당하거나 독살당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도 죽이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중 최고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들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보살피고 보호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개역)가 아니라 경작하고 지킨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정원지기나 목자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선한 것입니다. 일은 동산을 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은 동산을 특별한 피조물인 사람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16절과 17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살 때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허용된 것과 금지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산의 나무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금지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나무의 정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지된 사실입니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명령하심의 권위만 있습니다. 사람은 조건 없는 순종에 대한 기대만 있습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은 부르심, 허용, 금지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차적인 과제는 하나님의 목적이 갖는 세 가지 차원을 한데 묶는 일입니다. 어느 두 가지도 다른 한 가지가 없이는 삶을 왜곡시킵니다.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ironical 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소명에 담겨 있는 명령이나 허용에 담겨 있는 선물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명과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채로 있습니다. 동산의 하나님은 주로 금지하는 분으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지는 다른 두 가지를 통해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세 가지의 병렬과 그들 사이의 균형은 이 본문에 인간의 운명에 관한 미묘한 통찰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정녕 죽으리라(2:17)/tWmT; t/m WNM,mi/mimhenhū(그것으로부터) môt thâmūt 그것으로부터 죽고 죽으리라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봅니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죽음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죽는 즉시 거기에서 끝나버립니다. 죽음은 해체되는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해체됩니다. 영혼은 천국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육신은 죽는 즉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육신은 애초에 사람이 왔던 곳,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들과 이별입니다. 사랑의 온도가 최고도였던 로미오와 줄리엣 같아도 헤어져야 합니다. 죽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약으로 약간의 생명은 연장하지만, 결국은 죽어야 하고 죽습니다. 왜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이 죽음은 성경 말고 다른 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아담은 말씀대로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 나무의 실과에 유해 한 독소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범죄에 수반되는 죽음은 열매에 있지 않았습니다.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에 있습니다. 죄가 되는 행동에 범죄구성요건이 있습니다(pulpit;225p).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증적인 법을 어겼습니다.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긴 것입니다(Matthew Henry;79.80).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를 어긴 것입니다(Calvin). 선악의 지식은 단순한 선악의 경험이 아닙니다. 영적인 발전에 있어서 도덕적 요소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후손들을 죽음에 빠트렸습니다(Keil and Delitzsch;90,91).

 

마귀에게 특강을 받은 아담과 하와(3:4)/@WtmuT] t/mAaOl/lō môt thĕmutūn 결코 너희가 죽고 죽지 않는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에서 아니하리라 부정어는 완강하게 부정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부정어에서 가장 완강한 부정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희가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고 죽으리라라고 하셨는데, 마귀는 아담에게 아냐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으면 죽지 않았는데, 마귀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하신 대로 죽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Mussolini(1883.7.29.-1945.4.28.)는 전혀 일관성이라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기호학 교수 움베르토 에코는 “Mussolini에게 철학 따위는 없었다. 단지 그럴듯한 말뿐이라고 말했습니다. Mussolini는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했고, 코스모폴리탄(범세계주의자)이었다가 국가주의자가 되었으며, 왕년의 무신론자로서 집권 중에는 자신을 신이 이탈리아에 내리신 선물이라 말했습니다. 왕정을 기필코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가, 국왕의 보호자를 자처했습니다. 다시 왕정반대론자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많은 자가 그를 따랐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사람이 악한 자인가? 선한 자인가를 구별해서 따라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따르면 결과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죄입니다. 아담이 사단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에게 특강을 받은 것입니다.

아담이 시험(probation)과 유혹(temptation) 사이에서 설왕설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가 악용하여 그것에 유혹의 요소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시험의 배후에는 선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혹의 배후에는 악한 계획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뱀은 사단이 한 소리입니다. 뱀을 통하여 사단이 복화술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단은 일단 하와의 하나님께 대한 認知度참으로라는 말로 혼란하게 합니다. 참으로#a"'/’āp라는 단어는 앞에 말한 것에 덧붙여진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한, 뿐만 아니라, 실로, 긍정문 뒤에서 얼마나 많이’, 부정문 뒤에서 얼마나 적게’, 반의적 의미로 그러나’” 등입니다. 하와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으실텐데,” “하와 니가 잘못 들었겠지, 하나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셔”. “참으로라는 말은 사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인용한 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하와로 하여금 고려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하와는 사단이 말하는 이례적인 일을 깨닫지 못한 채 사단과의 대화에 말려들었습니다.

 

창세기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사실에 반대되는 조건문에 대해 말을 더하고 뺐습니다.

 

창세기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와는 하나님보다 더한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에 더하고 뺌으로서 뱀보다 더 나은 자신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뱀에 대한 지적 우월감에 빠졌습니다. 뱀에 대하여 느꼈어야 할 두려움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사단은 간교하게도 과장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나무를 사용함으로써 하와로하여금 하나님께 속박당하고 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뱀은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하와로하여금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마음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에 의하여 엄청나게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했습니다. 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하게 속박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와의 덧붙여진 말, “만지지도 말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의 이 같은 부정적인 말에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 심하게 속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인용했습니다.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와는 만지는권리를 거부당했다고 터무니없이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지나치게 가혹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뱀이 의심을 심어주는 말로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하와는 뱀의 접근을 사전에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뱀하고 계속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금지 명령의 정확한 내용을 비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언된 형벌 죽고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너희가 죽을까하노라로 해석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안녕에 관심이 있으시기에 먹지 말라고 권하셨다.” 그렇게 미혹된 하와에게 뱀은 내가 fact를 말해 줄까?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경고로 해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명령으로 주어졌다. 네가 순종한 대상인 그분은 너에 대하여 별다른 정당한 이유 없이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려 하고 있다. 네가 또 죽음을 단순히 자애로운 관심으로 해석하는 것도 역시 잘못되었다. 그것은 사실상 협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허울뿐이요 형벌도 시시한 위협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진정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인바, 이는 너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그가 너희의 잠재 능력 곧 하나님과의 동등 됨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과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어 선악의 비밀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고 이로써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아는 자가 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동기가 거짓되기에 그의 금지 명령 또한 부당하며 불순종에 대한 그의 위협적인 형벌도 말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뱀이 사악하게도 거짓과 악한 동기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을 때 하와는 침묵했습니다. 사단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이름을 방어하는데 실패했습니다. 하와는 마귀에게 완전히 미혹 당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충성심마저 흔들렸습니다. 이쯤 되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하와의 눈에 그 나무가 먹기도 좋고 눈을 즐겁게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이미 결론이 나 있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이란 말은 여자가 그 나무에 대하여 결론을 지은즉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말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다음에 뒤따라 취해진 그들의 행동들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 같은 행동은 그들의 마음에서 그들이 언약을 지키는 자이기를 이미 포기하고 대신 언약을 파괴하는 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6절에서 자기와 함께 한이라는 문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와는 실과를 먹었으되 아담이 그 여자로부터 받아먹기를 거절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그러나, 하와는 죄가 있으나 아담은 죄가 없는 경우가 결코 있지 아니했고, 또 아담이 그 실과를 거절했을 만한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그 같은 질문은 헛된 말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과 대화하고 그 실과를 따먹는 전 과정을 통해서 그 여자와 줄곧 함께 있었습니다. 그도 똑같이 범죄 한 것입니다. 아담은 그 여자에 대한 머리 됨을 포기하고 그 여자가 범죄 하던 때 줄곧 함께 있으면서도 그 여자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허용한 까닭에 그 자신도 사실상 범죄한 것입니다. 하와가 타락하던 때에 아담도 타락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미 먼저 타락해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마찬가지로 뱀이 하나님의 순전함을 공격하던 때에 그의 명예를 방어하는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가르쳐 뱀의 속임수를 저항하도록 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기 아내로 하여금 자기를 가르쳐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무시하게끔 허용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여자가 완전하게 속임을 당하고 있던 때,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의식적으로, 고의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범하였다고 했습니다(딤전2:14).

 

성도 여러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사단에게 선악과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했습니다. 말씀을 비틀어서 해석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사단의 거짓말을 듣고서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거절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말씀대로 받아들이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사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假設로 만들었습니다. 거짓말로 깎아내리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곧 사람에 대한 권위의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 자신에게로 옮겼음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권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참과 거짓을 실험을 통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들이 실험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실과를 먹는 순간에 선악과에 관한 사단의 가설을 참된 것으로 이미 믿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실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진실로 믿었다고 하면 그들은 결코 실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이 말하는 대로, 사람들은 결코 자율적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행하게 되어있습니다(2:2).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생각하기를, 자기들의 인생길을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진선미를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자율적 권리를 단지 행사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소위 말해서 인간승리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가 되었고, 그날 이후로 그들의 타락한 후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유사한 자율권을 계속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단순히 사과 한 조각 먹은 정도의 사소한 행동을 한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욱하여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형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 범죄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피조물의 의도적인 거부와 창조주를 대항하는 고의적인 반항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율권과 자유를 요구한 것입니다. 사람이 형이상학적으로 그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경험론적으로 그가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리라그리고 윤리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그의 남편도 먹은지라를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섬기라고 하는 사단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되 자기 좋을대로 결정하였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Closing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이 너희를 위하여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주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은 부르심, 허용, 금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이 세 가지 부르심, 허용, 금지하심은 한데 묶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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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증주의 實證主義 positivism 진정한 지식을 소위 실증 학문(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증거를 기초로 한다고 여겨지는 학문)으로 제한하는 경험론적 철학. 실증주의자들은 직접 관찰될 수 없는 것에 대해 회의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의 실증주의는 Auguste Comte오귀스트 콩트( 1798-1857)와 John Stuart Mill존 스튜어트 밀(1806-1873)과 관련된다. 20세기의 경험론적 사상은 논리 실증주의를 형성한 기호 논리학의 분석 기술과 관련된다. 경험론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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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예수상’ 건립에 대해 어떤 반응일까요? 생각하지조차 못해 당황스러워할 겁니다.지금, 이 땅 대한민국에서 ‘예수상’ 건립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천안에 한국기독교기념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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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3-14 

 

 

회당 sunagwghv/sunagwgê은 주전 6세기경에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모세오경을 연구하고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원래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닙니다.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습니다. 회당은 신약 시대 유대인의 집회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 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습니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곳(4:16)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13:5,14)으로 활용했습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습니다. 회당장(5:22)은 예배를 감독했습니다. 시중드는 사람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4:20)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습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습니다(4:16; 13:15).

그러나 예수님 당시 회당의 문은 예수님께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회당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 정통주의를 수호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호숫가에서 가르쳤습니다. 야외가 교회였습니다. 푸른 하늘이 천정이었고, 산기슭과 어선들이 강단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장소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걸으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랍비가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이 이곳저곳으로 길을 걸어갈 때 또는 야외에서 산책할 때 그의 제자들이 몰려와 함께 걸으면서 랍비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랍비들이 하는 것처럼 가르치셨습니다.

 

갈릴리는 고대 교통로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다는 어디든지 통해 있지 않으나 갈릴리에서는 어디든 통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육로입니다. 모든 육상 교통은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해상의 대도로는 다메섹에서 갈릴리를 경유하는 가버나움을 통과해 갈멜로 내려가 샤론의 평원을 따라 가사를 지나 애굽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세계 최대 도로 중 하나였습니다. 또 하나의 도로는 해안의 아크레에서 요단강을 건너 아라비아 제국의 경계에 이르는 군대와 대상들이 통과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유다는 로마의 행정관 관할 하에 있는 로마의 속주였습니다. 갈릴리는 혜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인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지배되었습니다. 고라니티스를 포함한 동방의 영토 테라코니티스와 바타내어는 헤롯의 또 하나의 아들 빌 립에 의하여 지배되었습니다. 헤롯빌립의 영토에서 헤롯 안디바의 영토로 오는 길에 여행자가 들리는 최초의 거리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국경도시였으므로 세관의 중심지 였습니다. 당시에는 수출입세가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이런 세금을 징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레위 마태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삭개오처럼 로마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마태는 헤롯 안디바를 위해 일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세리였습니다. 마태는 왜 미움을 받았습니까? 고대 사회에서 세리들은 매우 미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세리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남는 것은 그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일은 법률적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의 세 복음서 모두에 레위 마태가 제자로서 부름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소명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 사이에 도적이나 창기처럼 가장 나쁘게 평가되었습니다. 세리는 압제자 로마 정부와 그 속국인 헤롯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당시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초과 징수, 뇌물, 강제 징수 등 온갖 협잡과 부정으로 백성의 돈을 착취했었습니다. 때로 레위 같은 세리들은 일정한 지역에 대한 조세 단독권을 얻어 각종 세금으로 폭리를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죄인과 같이 취급하여 교제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회당 출입을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당시 마음속에 아픔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군중의 외곽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충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직업을 미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정통적인 선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마태는 매우 더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따라 걷고 있을 때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즉시 일어나 좇았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마태가 가장 많은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마태는 문자 그대로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다시 어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한 번의 행동으로, 순간적인 결심으로 그는 직업을 영원히 버렸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버린 후에는 다시 그 직업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결심에는 위대한 인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언젠가는 결정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트무어(Dartmoor)로 가는 긴 시골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쉽게 건너기에는 폭이 넓은 개천에 다다랐을 때 그가 언제나 처음 한 일은 건너편으로 저고리를 벗어던지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건너갈 결심을 했고, 견디어 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Matqai'o"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레위는 히브리식입니다. 마태는 헬라식이름입니다.

 

미운 물건이었던 마태

유대인들은 딴 나라 사람들이 굶어 죽는 곳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에 대한 욕심의 DNA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고질적인 죄악으로 지니고 있었던 마태가 얼마나 비열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유대인의 회당과 그들의 사회에서 쫓겨나는 가장 엄한 출교를 당했겠습니까? 레위는 제사장이 아닌 세리가 되었습니다. 세리란 오늘 우리로 말하면 친일파요 왜놈의 앞잡이입니다. 가이사의 세금 징수원은 보통 로마인 귀족으로서 로마제국의 각 식민지에 파견되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가장 비열한 자들은 왜놈들의 앞잡이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밀정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 추악한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모두 가이사가 정한 것보다 더 많이 착취하여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흡혈귀였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자기가 가난한 자의 것을 조금이라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19:8)고 그리스도께 고백하였었는데, 이것으로써 그는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음을 암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족 중 누가 로마 세리의 직책을 맡게 되면 그는 하나님께 불충한 사람이요, 고귀한 유대인 사회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여겨 마땅히 죄인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태는 동료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과중한 세금을 이방에 대한 예속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중한 세금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희망을 꺾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사람은 누구든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사람이요, 그들의 민족적 신앙을 버린 자,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배신한 자로 취급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찾아 그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 자신, 곧 삭개오 같은 고급 세리나 마태 같은 하급 세리를 막론하고 매우 부정직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로마의 세리보다 더 혐오 받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세리를 가장 비천한 사람들과 한 부류로 여겼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울 일이 아닙니다. “세리의 집안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그들 모두가 세리요, 도적이요, 강도요, 사악한 죄인들이니라.”라는 속담까지 있었습니다.

더러운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마태가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가족을 팔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통 유대인 친구들 그리고 친지들과의 사귐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조국을 팔았습니다. 동족들이 로마의 학정과 압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는 로마를 섬기는 직업을 택하여, 천박한 욕심으로써 애국심의 불길을 꺼버렸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양심을 팔았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신앙도 팔아먹었습니다. 그의 본명인 레위는 그가 제사장들의 계열의 선조인 야곱의 아들 레위에까지 이르는 경건한 조상들의 후예였습니다. Emerson돈의 가장 사악한 점은 그것을 얻는데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돈 때문에 마태는 동족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또한 모든 종교적인 저주의 말을 뒤집어쓴 채 회당에서 출교당해야 했습니다.

 

Victor Marie Hugo의 레미제라블에는 엉뚱한 사람이 범인의 누명을 쓰고 노예선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면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는 Jean Valjean입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범인이요, 혐의를 받는 사람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듯한 논리로써 자신의 양심을 호도하고, 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구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자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비록 사람들이 그의 가면만을 본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의 참모습을 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웃들은 그의 겉으로 사는 모습만을 볼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양심을 꿰뚫어 볼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4월이 되면 연인들이 라일락 꽃을 따기 위해 찾아가는 파리 근교의 조그만 숲을 기억합니다. 그는 라일락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찾아갑니다. 거리에는 적막이 흐릅니다. 사람들이 말없이 벽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모든 나무와 문의 뒤, 그리고 길모퉁이에도 사람들이 말없이 서 있습니다. 음침한 땅, 납빛의 하늘! 그는 무거운 회초리를 들고 그 적막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말을 타고 들어오는 벌거벗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Jean Valjean은 공포에 질려 그 도시를 도망치지만, 이번에는 군중들이 침묵에서 벗어나 소리를 지르며 그를 쫓아옵니다. “너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인 것을 모르느냐?”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속였던 Jean Valjean은 자칫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뻔하였습니다. 이것이 Victor Marie Hugo가 말하고자 한 양심의 소리입니다.

 

마태는 명예를 팔아먹어 버리고 양심은 거의 목졸려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오랫동안 죽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Dr. W. Graham Scroggie는 마태가 의 의미로 데나리온대신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 그리고 세겔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에서 그의 前職을 추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17:22~27, 22:19과 막12:15).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희귀한 동전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렙돈’, ‘고드란트’, ‘데나리온등 가치 없는 동전의 이름만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렙돈고드란트그리고 므나가 나옵니다. 하지만 돈을 만지는 직업에 종사했던 마태는 당대의 가장 가치있는 동전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달란트같은 것인데, 이것은 므나에 비해 약 60배의 가치를 가진 동전이었습니다. 마가가 , 누가는 이라고 한 것을 마태는 금이나 은이나 동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세금을 징수할 때 이런 돈을 많이 만져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회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들이 있었던 곳에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걷고 계실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나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소의 사울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대낮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반역적인 행위는 즉시 중지되었습니다.

마태는 다메섹으로부터의 대서(大西) 간선 도로(The Great West Trunk Rood from Damascus), 지중해의 동쪽 맨 끝에 위치한 가버나움의 세관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마태는 당시 일어나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건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습니다. 그런데 얘기로만 듣던 갈릴리의 그 이상한 사람이 돌연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에게 다가와 일어나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는 새 스승께서 자신의 유명한 산상수훈을 설교하고 계실 때, 마태는 아마 거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경청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마태를 세관에서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얼굴에서 그의 속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 마태가 즉시로 응답할 것임을 아셨다는 점입니다. 짧은 권면, 당당한 명령에 마태는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마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직업과 동료들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오랫동안 생각만 했던 자유와 평강의 땅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마태는 그의 억눌렸던 본성이 즉시로 속박에서 풀려나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죄악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머리는 기쁨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믿고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부르심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구원얻는 믿음의 부르심과 구원받은 사람의 mission미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겸손함의 깊이를 체험한 후 가장 고귀한 특권을 지닌 지위에까지 높여졌습니다. 전에는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자신을 팔았었지만 이제 그는 가이사보다 더 위대한 왕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마태는 주님이 주시는 영적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돈이 잘 벌리는 직장을 팽개치고 물질문제의 해결에 대한 가망이나 약속도 없는데 예수를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마태로서는 얼마나 힘든 시험이었겠습니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마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재산을 포기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의 직장이라고 하면 연봉이 2-3억정도가 넘습니다. 요새 같으면 연봉이 1억원이라도 신의 직장입니다. 마태 정도 되면 신의 직장이었습니다. 그런데 180도 달라졌습니다. 신의 직장을 포기한 것입니다. 마태는 신속한 판단력과 강력한 의지, 명확한 견해로써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 없이 따라나섬으로써 그는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주님에 의해 책상에서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Richard Glover는 그의 마태복음주석서에서 주님의 부르심과 세리 마태에 대한 응답에 관련된 몇 가지의 기이한 일을 말했습니다. 부르심의 엄숙함. 그것은 미지의 위험한 미래를 위해 재산과 직업과 옛 습성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부르심의 은혜 사람들은 세리의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의 구주요, 친구가 되셨습니다. 부르심의 약속.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태는 혼자였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구원과 사귐과 인도와 보호의 약속이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여명. 마태는 어제는 죄인들과 한 무리였지만 오늘은 사도요, 내일은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부르심의 영광.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가 어떻게 한 죄인에게 그의 동역자요 사도가 되는 영광을 주셨는지를 증거 합니다. 부르심의 본질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의 핵심이 되는 것은 신조가 아닌 한 인격(a person)에의 복종입니다. 주님의 명령 안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 고백, 그리고 그와의 사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일어나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5:28). 그런데 마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그는 자기의 그같은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9:9).

 

누가복음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복음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사실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부르시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의 결단의 용기와 열심. 용감한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지혜란 이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평강과 영광을 가져 왔습니다. 마태는 후에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복을 안겨 준 복음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만약 마태가 한 부자 관원처럼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 버렸었다면, 교회는 그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순종했습니다.

 

Closing 우리도 부르심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마태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지혜란 하나님 곧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생을 크게 복되게 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일어서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님은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부르셔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부름의 끝은 별로입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영원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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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主義/Neo-Platonism 플라톤에게 영감을 받은 헬레니즘 철학 학파 중 하나. 플로티노스는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자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선의 형상인 일자로부터 일련의 위계를 거쳐 유출된다는 점과 다시 一者일자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질을 경시하고 금욕적 실천을 함양하는 이 철학의 경향성은 수많은 교회 교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참조. 관념론, 존재의 사슬]. 

▪ 플로티노스/신플라톤주의(P'lwti'o" 205년-270년0는 고대 그리스의 후기 철학자이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작품 54편을 보존해서 전한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북아프리카 리코폴리스(Likopolis)에서 태어났고, 비교적 늦은 나이(28살)에 본격적으로 철학에 몰두했다고 전한다. 처음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전해 듣다가 플라톤의 사상에 크게 감동하였고, 이후 ‘플라톤 철학의 해석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플라톤 사상에 몰두해서 가르쳤기에 사람들은 그를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고 평한다. 플로티노스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활동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고, 후에 갈리에누스 황제와 그의 부인 살로니아의 신임을 받아 플라톤 왕국의 건설을 제안받기까지 했다. 몸소 네 번이나 신적 체험을 했다는 그는 만 49세의 나이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병으로 풍을 앓아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언제든 토론을 즐겼던 성격의 소유자라 때로는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고서라도 몰입하는 열정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 공정한 인품 때문에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를 후원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했던 만큼 육체에 비해 영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으니, 그의 가족 및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그의 중심개념 ‘하나(Hen)’가 플라톤의 사상과 차별화된 것이라고도 연구자들이 지적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 개념조차 플라톤이 알고 활용했던 개념이다(특히 《티마이오스》 안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찌 ‘하나’에서 다수가 흘러나왔는지?”하는 당시 새롭게 제기된 물음에 집중하여 사상을 펼쳤다는 사실에 있다. 소위 영원한 것이 그대로 완전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이 세상의 불완전한 다수로(다양한 것들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하는 ‘난해한 물음’에 대해 답변하고자 하였다. 중기 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아직 제기되지 않았던 이 같은 물음이 플로티노스로 하여금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관심사인 “유출(Emanation)” 개념에 몰두하도록 이끈 셈이다.

 

▪ 엔네아데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했던 만큼 육체에 비해 영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으니, 그의 가족 및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포르피리오스의 『플로티노스의 생애』 중에서). 다행히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에 의해 그의 작품 54편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전해져 온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스승의 뜻을 숙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숫자 9(enneas)는 ‘완성’의 의미를 띠었기에, 그렇게 스승의 가르침이 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작품을 가리켜 《엔네아데스(Enneades)》라고 칭한다. 6집으로 배치된 작품들의 내용 및 주제를 보더라도 포르피리오스가 막연하게 편집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제1집은 일상적인 주제, 제2집은 대자연, 제3집은 인간의 삶, 제4집은 영혼, 제5집은 정신, 제6집은 하나(궁극적인 선이자 존재)에 관하여 다룬 작품들로 구성했다.

 

▪포르피리오스(Parfuvrio", 234~305)는 3세기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티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인 자신의 스승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논문집인 《엔네아데스》를 출판하였다.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그가 다룬 주제들은 호메로스 서사시와 같은 서양 고전으로부터 철학, 논리학, 수학의 학문들과 기독교와 미트라교 등의 종교와 채식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고 다양하였다.

그의 저서 《입문서(Εἰσαγωγή Isagoge)》는 논리학과 철학에 관한 입문서로서, 이 책의 라틴어 번역본은 중세 논리학 교과서의 표준이 되었다. 유클리드의 《원론》에 대한 포르피리오스의 주해는 알렉산드리아의 파푸스에 의해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포르피리오스는 자신의 저작들 중 대여섯 저작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탁에서 유래한 철학(Philosophy from Oracles)》과 《기독교에 대한 반론(Against the Christians)》으로 인해,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의 저서 《님프의 동굴에 대하여(De antro nympharum)》에는 로마 제국 시대의 신비 종교였던 미트라 신비 가르침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포로피리오스는 페니키아의 무역도시 티로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선 당시의 풍습대로 아테네에 유학하여 롱기누스에게 배웠다. 그 후 로마로 나가, 플로티노스와의 해후(解逅)로 그에게 쏠려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의 논문을 정리하여 《엔네아데스》를 편집하고 스승의 학설 보급에 진력하였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저작했다고 전하는데, 그 태반은 단편적으로 전해졌다. 그는 채식주의자였다고 전하며, 그 관점에서 《육식의 기피(忌避)에 관하여》를 내놓았다. 또 기독교를 적대시하여(그리스도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만년에 여섯 아이를 가진 미망인 마르셀라와 결혼하였으나 그녀에게 보낸 서간에는 그의 이교(異敎)의 제신(諸神)에 대한 경건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호메로스의 시 해석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계 저서의 주해와 입문서 등이 있다.

 

▪ 이암블리코스

이암블리코스(Iamblichus: 고대 그리스어: Ἰάμβλιχος, c. 245-c. 325) 또는 이암블리코스 칼키덴시스(Iamblichus Chalcidensis)는 아시리아 태생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이다. 시리아파의 창시자.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주의의 기초 위에서 자연학 ·윤리학 ·형이상학의 연구를 통하여 철학과 신비학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이암블리코스는 후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암블리코스는 피타고라스 철학에 관한 개요서를 저술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암블리코스가 저술한 것으로 간주되는 저작으로는 《신성 마법 또는 이집트의 신비 가르침(Theurgia, or De Mysteriis Aegyptiorum》과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주의자의 삶(De Vita Pythagorica)》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이암블리코스는 온갖 종교적 의식, 신화를 포섭할 수 있는 종합적 다신교적 신학을 시도하였다.

▪프로클로스

프로클로스 리카이우스(412.2.8-485.4.17)는 계승자라고도 불린 고대 그리스 신플라톤주의자이고 마지막 주요 고전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아테네 학파의 마지막 영수(領袖)로, 그리스도교가 크게 득세하던 시기에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끝까지 수호하였다. 그의 사상은 일자(一者)의 부동적 성격과 동적 성격의 공존을 통한 상호 모순으로 인한 생성의 원리(일자→정신→영혼→물질)와 이를 관통하는 인식으로서 변증법을 발달시킨 그는 제일 세련되고 발전된 신플라톤주의 체계 중 하나를 세웠다. 그는 철학의 고전 시대의 거의 끝자락에 활약했다. 그의 주석서는 이후 중세사회의 철학 담론 형성에 일정 영향을 주었으나, 그가 가진 철학 사상은 인간의 자력(自力)을 통한 자기 해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졌기에 부분적으로만 허용되었다.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멈춰져 있는 것과, 무한히 운동하는 것 사이의 대립을 다룬다. 그는 이러한 대립 운동이 만유를 산출한다고 보았다. 그는 부단한 실천과 이성적 사고의 통일 노력을 통한. 인간과 일자와의 합일을 말한다. 이는 이론지(理論知)와 실천지(實踐知)의 합일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기에, 이후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프로클로스의 삼분적 부정 변증법은 금기시되었다.

프로클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이 정해진 궤도에 따라 움직인다는 전제, 즉 이심원과 주전원을 상정하여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이론을 비판하였으며, 행성의 움직임은 정신에 의한 영혼의 산출 운동의 복잡한 양상을 운동이라는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 운동이 프롤레마이오스가 정해놓은 궤도에서 이탈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중력 변수의 변화로 인해 행성 운동이 정해진 궤도에서 충분히 이탈할 수 있다는 현대 천문학의 관점과 유사하다.

서구 근세 이후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항하는 성격으로서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일부 과학자와 개혁적 신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파라켈수스, 쿠자누스, 브루노, 헤겔은 프로클로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프로클로스는 대립의 근원을 부동과 운동 사이의 관계로 보았고, 헤겔은 존재와 무 사이의 관계로 보았지만, 절대정신의 타재로서 현실, 변증법적 사유 도정으로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헤겔의 부정철학은 프로클로스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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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sunagwgê의 기원은 주전 6세기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과 분리되었을 때 율법을 이행하려는 노력으로서 모세오경을 연구,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 모임을 가진 것을 그 기원으로 본다. 그러나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니고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다. 회당은 신약 시대 유대인의 집회 장소이다. 어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 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다. 오늘날도 회당은 유대인의 종교 생활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출애굽 광야 시절에는, 회당이 교훈을 받고 기도를 하는 장소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그 기원에 대한 근거는 에스겔20:1에서 찾을 수 있다. 회당의 발전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AD 1세기경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명의 성인 남자들이 필요했 다. 큰 도시에는 수많은 회당이 있었으며, 전해 내려오는 한 이야기에 따르면,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무렵에는 회당이 394개나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곳(눅4:16)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행13:5,14)으로 활용했다. 회당의 건물 형태는 예루살렘 성전을 본땄던 것 같다. 율법서와 선지서 두루마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언약궤가 출구 맞은편 한쪽 끝에 있었다. 언약궤 앞과 출구와 회중 맞은편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앉는 최고의(혹은 주요한) 자리들(막23:6)이 마련되 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구획에 앉도록 되어있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다. 회당장(막5:22)은 예배를 감독했으며, 시중드는 사람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눅4:20)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런 다음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다(눅4:16; 행13:15). 안식일 예배는 다섯 부분으로 행해졌다. 1. 쉐마를 읽었다(신6:4-9; 11:13-21; 민15:37-41); 2. 18개 간구문과 축도문을 포함한 기도문들을 암송하였다; 3. 율법서 중 한 부분을 원래는 3년 주기로 읽었다; 4. 읽는 자가 임의로 선택한(눅4:16이하) 선지서 중 한 부분을 읽었다; 5. 성경을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예배를 마치는 축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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