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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3-14
회당 sunagwghv/sunagwgê은 주전 6세기경에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모세오경을 연구하고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원래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닙니다.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습니다. 회당은 신약 시대 유대인의 집회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 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습니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곳(눅4:16)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행13:5,14)으로 활용했습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습니다. 회당장(막5:22)은 예배를 감독했습니다. 시중드는 사람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눅4:20)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습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습니다(눅4:16; 행13:15).
그러나 예수님 당시 회당의 문은 예수님께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회당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 정통주의를 수호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호숫가에서 가르쳤습니다. 야외가 교회였습니다. 푸른 하늘이 천정이었고, 산기슭과 어선들이 강단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장소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걸으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랍비가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이 이곳저곳으로 길을 걸어갈 때 또는 야외에서 산책할 때 그의 제자들이 몰려와 함께 걸으면서 랍비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랍비들이 하는 것처럼 가르치셨습니다.
갈릴리는 고대 교통로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다는 어디든지 통해 있지 않으나 갈릴리에서는 어디든 통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육로입니다. 모든 육상 교통은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해상의 대도로는 다메섹에서 갈릴리를 경유하는 가버나움을 통과해 갈멜로 내려가 샤론의 평원을 따라 가사를 지나 애굽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세계 최대 도로 중 하나였습니다. 또 하나의 도로는 해안의 아크레에서 요단강을 건너 아라비아 제국의 경계에 이르는 군대와 대상들이 통과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유다는 로마의 행정관 관할 하에 있는 로마의 속주였습니다. 갈릴리는 혜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인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지배되었습니다. 고라니티스를 포함한 동방의 영토 테라코니티스와 바타내어는 헤롯의 또 하나의 아들 빌 립에 의하여 지배되었습니다. 헤롯빌립의 영토에서 헤롯 안디바의 영토로 오는 길에 여행자가 들리는 최초의 거리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국경도시였으므로 세관의 중심지 였습니다. 당시에는 수출입세가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이런 세금을 징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레위 마태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삭개오처럼 로마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마태는 헤롯 안디바를 위해 일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세리였습니다. 마태는 왜 미움을 받았습니까? 고대 사회에서 세리들은 매우 미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세리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남는 것은 그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일은 법률적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의 세 복음서 모두에 레위 마태가 제자로서 부름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소명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 사이에 도적이나 창기처럼 가장 나쁘게 평가되었습니다. 세리는 압제자 로마 정부와 그 속국인 헤롯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당시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초과 징수, 뇌물, 강제 징수 등 온갖 협잡과 부정으로 백성의 돈을 착취했었습니다. 때로 레위 같은 세리들은 일정한 지역에 대한 조세 단독권을 얻어 각종 세금으로 폭리를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죄인과 같이 취급하여 교제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회당 출입을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당시 마음속에 아픔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군중의 외곽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충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직업을 미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정통적인 선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마태는 매우 더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따라 걷고 있을 때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즉시 일어나 좇았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마태가 가장 많은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마태는 문자 그대로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다시 어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한 번의 행동으로, 순간적인 결심으로 그는 직업을 영원히 버렸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버린 후에는 다시 그 직업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결심에는 위대한 인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언젠가는 결정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트무어(Dartmoor)로 가는 긴 시골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쉽게 건너기에는 폭이 넓은 개천에 다다랐을 때 그가 언제나 처음 한 일은 건너편으로 저고리를 벗어던지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건너갈 결심을 했고, 견디어 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Matqai'o" 는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레위는 히브리식입니다. 마태는 헬라식이름입니다.
미운 물건이었던 마태
유대인들은 딴 나라 사람들이 굶어 죽는 곳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에 대한 욕심의 DNA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고질적인 죄악으로 지니고 있었던 마태가 얼마나 비열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유대인의 회당과 그들의 사회에서 쫓겨나는 가장 엄한 출교를 당했겠습니까? 레위는 제사장이 아닌 ‘세리’가 되었습니다. 세리란 오늘 우리로 말하면 친일파요 왜놈의 앞잡이입니다. 가이사의 세금 징수원은 보통 로마인 귀족으로서 로마제국의 각 식민지에 파견되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가장 비열한 자들은 왜놈들의 앞잡이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밀정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 추악한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모두 가이사가 정한 것보다 더 많이 착취하여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흡혈귀’였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자기가 가난한 자의 것을 조금이라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눅19:8)고 그리스도께 고백하였었는데, 이것으로써 그는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음을 암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족 중 누가 로마 세리의 직책을 맡게 되면 그는 하나님께 불충한 사람이요, 고귀한 유대인 사회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여겨 마땅히 죄인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태는 동료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과중한 세금을 이방에 대한 예속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중한 세금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희망을 꺾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사람은 누구든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사람이요, 그들의 민족적 신앙을 버린 자,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배신한 자”로 취급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찾아 그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 자신, 곧 삭개오 같은 고급 세리나 마태 같은 하급 세리를 막론하고 매우 부정직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로마의 세리보다 더 혐오 받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세리를 가장 비천한 사람들과 한 부류로 여겼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울 일이 아닙니다. “세리의 집안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그들 모두가 세리요, 도적이요, 강도요, 사악한 죄인들이니라.”라는 속담까지 있었습니다.
더러운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마태가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가족’을 팔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통 유대인 친구들 그리고 친지들과의 사귐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조국’을 팔았습니다. 동족들이 로마의 학정과 압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는 로마를 섬기는 직업을 택하여, 천박한 욕심으로써 애국심의 불길을 꺼버렸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양심’을 팔았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신앙’도 팔아먹었습니다. 그의 본명인 ‘레위’는 그가 제사장들의 계열의 선조인 야곱의 아들 레위에까지 이르는 경건한 조상들의 후예였습니다. Emerson은 “돈의 가장 사악한 점은 그것을 얻는데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돈 때문에 마태는 동족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또한 모든 종교적인 저주의 말을 뒤집어쓴 채 회당에서 출교당해야 했습니다.
Victor Marie Hugo의 레미제라블에는 엉뚱한 사람이 범인의 누명을 쓰고 노예선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면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는 Jean Valjean입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범인이요, 혐의를 받는 사람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듯한 논리로써 자신의 양심을 호도하고, 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구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자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비록 사람들이 그의 가면만을 본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의 참모습을 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웃들은 그의 겉으로 사는 모습만을 볼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양심을 꿰뚫어 볼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4월이 되면 연인들이 라일락 꽃을 따기 위해 찾아가는 파리 근교의 조그만 숲”을 기억합니다. 그는 라일락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찾아갑니다. 거리에는 적막이 흐릅니다. 사람들이 말없이 벽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모든 나무와 문의 뒤, 그리고 길모퉁이에도 사람들이 말없이 서 있습니다. 음침한 땅, 납빛의 하늘! 그는 무거운 회초리를 들고 그 적막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말을 타고 들어오는 벌거벗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Jean Valjean은 공포에 질려 그 도시를 도망치지만, 이번에는 군중들이 침묵에서 벗어나 소리를 지르며 그를 쫓아옵니다. “너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인 것을 모르느냐?”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속였던 Jean Valjean은 자칫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뻔하였습니다. 이것이 Victor Marie Hugo가 말하고자 한 양심의 소리입니다.
마태는 명예를 팔아먹어 버리고 양심은 거의 목졸려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오랫동안 죽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Dr. W. Graham Scroggie는 마태가 ‘돈’의 의미로 ‘데나리온’ 대신 ‘돈’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 그리고 세겔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에서 그의 前職을 추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17:22~27, 22:19과 막12:15).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희귀한 동전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렙돈’, ‘고드란트’, ‘데나리온’ 등 가치 없는 동전의 이름만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렙돈’과 ‘고드란트’ 그리고 ‘므나’가 나옵니다. 하지만 돈을 만지는 직업에 종사했던 마태는 당대의 가장 가치있는 동전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달란트’같은 것인데, 이것은 ‘므나’에 비해 약 60배의 가치를 가진 동전이었습니다. 마가가 銅, 누가는 銀이라고 한 것을 마태는 ‘금이나 은이나 동’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세금을 징수할 때 이런 돈을 많이 만져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회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들이 있었던 곳에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걷고 계실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나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소의 사울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대낮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반역적인 행위는 즉시 중지되었습니다.
마태는 “다메섹으로부터의 대서(大西) 간선 도로(The Great West Trunk Rood from Damascus)변, 지중해의 동쪽 맨 끝”에 위치한 가버나움의 세관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마태는 당시 일어나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건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습니다. 그런데 얘기로만 듣던 갈릴리의 그 이상한 사람이 돌연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에게 다가와 ‘일어나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는 새 스승께서 자신의 유명한 산상수훈을 설교하고 계실 때, 마태는 아마 거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경청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마태를 세관에서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얼굴에서 그의 속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 마태가 즉시로 응답할 것임을 아셨다는 점입니다. 짧은 권면, 당당한 명령에 마태는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마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직업과 동료들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오랫동안 생각만 했던 자유와 평강의 땅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마태는 그의 억눌렸던 본성이 즉시로 속박에서 풀려나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죄악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머리는 기쁨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믿고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부르심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구원얻는 믿음의 부르심과 구원받은 사람의 mission미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겸손함의 깊이를 체험한 후 가장 고귀한 특권을 지닌 지위에까지 높여졌습니다. 전에는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자신을 팔았었지만 이제 그는 가이사보다 더 위대한 왕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마태는 주님이 주시는 영적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돈이 잘 벌리는 직장을 팽개치고 물질문제의 해결에 대한 가망이나 약속도 없는데 예수를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마태로서는 얼마나 힘든 시험이었겠습니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마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재산을 포기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의 직장이라고 하면 연봉이 2-3억정도가 넘습니다. 요새 같으면 연봉이 1억원이라도 신의 직장입니다. 마태 정도 되면 신의 직장이었습니다. 그런데 180도 달라졌습니다. 신의 직장을 포기한 것입니다. 마태는 신속한 판단력과 강력한 의지, 명확한 견해로써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 없이 따라나섬으로써 그는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주님에 의해 책상에서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Richard Glover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서에서 주님의 부르심과 세리 마태에 대한 응답에 관련된 몇 가지의 기이한 일을 말했습니다. 부르심의 엄숙함. 그것은 미지의 위험한 미래를 위해 재산과 직업과 옛 습성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부르심의 은혜 사람들은 세리의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의 구주요, 친구가 되셨습니다. 부르심의 약속.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태는 혼자였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구원과 사귐과 인도와 보호의 약속이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여명. 마태는 어제는 죄인들과 한 무리였지만 오늘은 사도요, 내일은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부르심의 영광.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가 어떻게 한 죄인에게 그의 동역자요 사도가 되는 영광을 주셨는지를 증거 합니다. 부르심의 본질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의 핵심이 되는 것은 신조가 아닌 한 인격(a person)에의 복종입니다. 주님의 명령 안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 고백, 그리고 그와의 사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눅5:28). 그런데 마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그는 자기의 그같은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마9:9).
누가복음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복음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사실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부르시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의 결단의 용기와 열심. 용감한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지혜란 이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평강과 영광을 가져 왔습니다. 마태는 후에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복을 안겨 준 복음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만약 마태가 한 부자 관원처럼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 버렸었다면, 교회는 그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순종했습니다.
Closing 우리도 부르심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마태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지혜란 하나님 곧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생을 크게 복되게 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일어서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님은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부르셔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부름의 끝은 별로입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영원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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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主義/Neo-Platonism 플라톤에게 영감을 받은 헬레니즘 철학 학파 중 하나. 플로티노스는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자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선의 형상인 일자로부터 일련의 위계를 거쳐 유출된다는 점과 다시 一者일자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질을 경시하고 금욕적 실천을 함양하는 이 철학의 경향성은 수많은 교회 교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참조. 관념론, 존재의 사슬].
▪ 플로티노스/신플라톤주의(P'lwti'o" 205년-270년0는 고대 그리스의 후기 철학자이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작품 54편을 보존해서 전한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북아프리카 리코폴리스(Likopolis)에서 태어났고, 비교적 늦은 나이(28살)에 본격적으로 철학에 몰두했다고 전한다. 처음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전해 듣다가 플라톤의 사상에 크게 감동하였고, 이후 ‘플라톤 철학의 해석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플라톤 사상에 몰두해서 가르쳤기에 사람들은 그를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고 평한다. 플로티노스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활동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고, 후에 갈리에누스 황제와 그의 부인 살로니아의 신임을 받아 플라톤 왕국의 건설을 제안받기까지 했다. 몸소 네 번이나 신적 체험을 했다는 그는 만 49세의 나이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병으로 풍을 앓아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언제든 토론을 즐겼던 성격의 소유자라 때로는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고서라도 몰입하는 열정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 공정한 인품 때문에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를 후원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했던 만큼 육체에 비해 영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으니, 그의 가족 및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그의 중심개념 ‘하나(Hen)’가 플라톤의 사상과 차별화된 것이라고도 연구자들이 지적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 개념조차 플라톤이 알고 활용했던 개념이다(특히 《티마이오스》 안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찌 ‘하나’에서 다수가 흘러나왔는지?”하는 당시 새롭게 제기된 물음에 집중하여 사상을 펼쳤다는 사실에 있다. 소위 영원한 것이 그대로 완전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이 세상의 불완전한 다수로(다양한 것들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하는 ‘난해한 물음’에 대해 답변하고자 하였다. 중기 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아직 제기되지 않았던 이 같은 물음이 플로티노스로 하여금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관심사인 “유출(Emanation)” 개념에 몰두하도록 이끈 셈이다.
▪ 엔네아데스
플라톤의 사상에 심취했던 만큼 육체에 비해 영혼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으니, 그의 가족 및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포르피리오스의 『플로티노스의 생애』 중에서). 다행히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에 의해 그의 작품 54편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전해져 온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스승의 뜻을 숙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숫자 9(enneas)는 ‘완성’의 의미를 띠었기에, 그렇게 스승의 가르침이 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작품을 가리켜 《엔네아데스(Enneades)》라고 칭한다. 6집으로 배치된 작품들의 내용 및 주제를 보더라도 포르피리오스가 막연하게 편집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제1집은 일상적인 주제, 제2집은 대자연, 제3집은 인간의 삶, 제4집은 영혼, 제5집은 정신, 제6집은 하나(궁극적인 선이자 존재)에 관하여 다룬 작품들로 구성했다.
▪포르피리오스(Parfuvrio", 234~305)는 3세기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티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인 자신의 스승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집대성한 논문집인 《엔네아데스》를 출판하였다.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그가 다룬 주제들은 호메로스 서사시와 같은 서양 고전으로부터 철학, 논리학, 수학의 학문들과 기독교와 미트라교 등의 종교와 채식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고 다양하였다.
그의 저서 《입문서(Εἰσαγωγή Isagoge)》는 논리학과 철학에 관한 입문서로서, 이 책의 라틴어 번역본은 중세 논리학 교과서의 표준이 되었다. 유클리드의 《원론》에 대한 포르피리오스의 주해는 알렉산드리아의 파푸스에 의해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포르피리오스는 자신의 저작들 중 대여섯 저작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탁에서 유래한 철학(Philosophy from Oracles)》과 《기독교에 대한 반론(Against the Christians)》으로 인해,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의 저서 《님프의 동굴에 대하여(De antro nympharum)》에는 로마 제국 시대의 신비 종교였던 미트라 신비 가르침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포로피리오스는 페니키아의 무역도시 티로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선 당시의 풍습대로 아테네에 유학하여 롱기누스에게 배웠다. 그 후 로마로 나가, 플로티노스와의 해후(解逅)로 그에게 쏠려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의 논문을 정리하여 《엔네아데스》를 편집하고 스승의 학설 보급에 진력하였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저작했다고 전하는데, 그 태반은 단편적으로 전해졌다. 그는 채식주의자였다고 전하며, 그 관점에서 《육식의 기피(忌避)에 관하여》를 내놓았다. 또 기독교를 적대시하여(그리스도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만년에 여섯 아이를 가진 미망인 마르셀라와 결혼하였으나 그녀에게 보낸 서간에는 그의 이교(異敎)의 제신(諸神)에 대한 경건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호메로스의 시 해석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계 저서의 주해와 입문서 등이 있다.
▪ 이암블리코스
이암블리코스(Iamblichus: 고대 그리스어: Ἰάμβλιχος, c. 245-c. 325) 또는 이암블리코스 칼키덴시스(Iamblichus Chalcidensis)는 아시리아 태생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이다. 시리아파의 창시자.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주의의 기초 위에서 자연학 ·윤리학 ·형이상학의 연구를 통하여 철학과 신비학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이암블리코스는 후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암블리코스는 피타고라스 철학에 관한 개요서를 저술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암블리코스가 저술한 것으로 간주되는 저작으로는 《신성 마법 또는 이집트의 신비 가르침(Theurgia, or De Mysteriis Aegyptiorum》과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주의자의 삶(De Vita Pythagorica)》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이암블리코스는 온갖 종교적 의식, 신화를 포섭할 수 있는 종합적 다신교적 신학을 시도하였다.
▪프로클로스
프로클로스 리카이우스(412.2.8-485.4.17)는 계승자라고도 불린 고대 그리스 신플라톤주의자이고 마지막 주요 고전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아테네 학파의 마지막 영수(領袖)로, 그리스도교가 크게 득세하던 시기에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끝까지 수호하였다. 그의 사상은 일자(一者)의 부동적 성격과 동적 성격의 공존을 통한 상호 모순으로 인한 생성의 원리(일자→정신→영혼→물질)와 이를 관통하는 인식으로서 변증법을 발달시킨 그는 제일 세련되고 발전된 신플라톤주의 체계 중 하나를 세웠다. 그는 철학의 고전 시대의 거의 끝자락에 활약했다. 그의 주석서는 이후 중세사회의 철학 담론 형성에 일정 영향을 주었으나, 그가 가진 철학 사상은 인간의 자력(自力)을 통한 자기 해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졌기에 부분적으로만 허용되었다.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멈춰져 있는 것과, 무한히 운동하는 것 사이의 대립을 다룬다. 그는 이러한 대립 운동이 만유를 산출한다고 보았다. 그는 부단한 실천과 이성적 사고의 통일 노력을 통한. 인간과 일자와의 합일을 말한다. 이는 이론지(理論知)와 실천지(實踐知)의 합일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기에, 이후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프로클로스의 삼분적 부정 변증법은 금기시되었다.
프로클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이 정해진 궤도에 따라 움직인다는 전제, 즉 이심원과 주전원을 상정하여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이론을 비판하였으며, 행성의 움직임은 정신에 의한 영혼의 산출 운동의 복잡한 양상을 운동이라는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 운동이 프롤레마이오스가 정해놓은 궤도에서 이탈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중력 변수의 변화로 인해 행성 운동이 정해진 궤도에서 충분히 이탈할 수 있다는 현대 천문학의 관점과 유사하다.
서구 근세 이후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항하는 성격으로서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일부 과학자와 개혁적 신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파라켈수스, 쿠자누스, 브루노, 헤겔은 프로클로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프로클로스는 대립의 근원을 부동과 운동 사이의 관계로 보았고, 헤겔은 존재와 무 사이의 관계로 보았지만, 절대정신의 타재로서 현실, 변증법적 사유 도정으로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헤겔의 부정철학은 프로클로스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었다.
회당/sunagwgê의 기원은 주전 6세기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과 분리되었을 때 율법을 이행하려는 노력으로서 모세오경을 연구,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 모임을 가진 것을 그 기원으로 본다. 그러나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니고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다. 회당은 신약 시대 유대인의 집회 장소이다. 어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 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다. 오늘날도 회당은 유대인의 종교 생활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출애굽 광야 시절에는, 회당이 교훈을 받고 기도를 하는 장소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그 기원에 대한 근거는 에스겔20:1에서 찾을 수 있다. 회당의 발전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AD 1세기경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명의 성인 남자들이 필요했 다. 큰 도시에는 수많은 회당이 있었으며, 전해 내려오는 한 이야기에 따르면,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무렵에는 회당이 394개나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곳(눅4:16)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행13:5,14)으로 활용했다. 회당의 건물 형태는 예루살렘 성전을 본땄던 것 같다. 율법서와 선지서 두루마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언약궤가 출구 맞은편 한쪽 끝에 있었다. 언약궤 앞과 출구와 회중 맞은편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앉는 최고의(혹은 주요한) 자리들(막23:6)이 마련되 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구획에 앉도록 되어있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다. 회당장(막5:22)은 예배를 감독했으며, 시중드는 사람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눅4:20)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런 다음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다(눅4:16; 행13:15). 안식일 예배는 다섯 부분으로 행해졌다. 1. 쉐마를 읽었다(신6:4-9; 11:13-21; 민15:37-41); 2. 18개 간구문과 축도문을 포함한 기도문들을 암송하였다; 3. 율법서 중 한 부분을 원래는 3년 주기로 읽었다; 4. 읽는 자가 임의로 선택한(눅4:16이하) 선지서 중 한 부분을 읽었다; 5. 성경을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예배를 마치는 축도가 있었다.
자기는 학문이 있고 덕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리석고 썩은 냄새를 풍기는 무지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스스로의 진면목을 알지 못할 뿐이고 오히려 그 무지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반대로 화학이나 천문학 그리고 라디오의 원리조차 모르는 사람들과 그보다 더 무식한 사람들 속에도 유덕한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있으나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학문이 높다고 생각하고 자만에 빠져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한채 세속적인 지식만 절대시하고 있는 앞서 말한 자와 같은 인간을 딱하게 여길 따름이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서
세상 악 중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악이 가장 크다.
톨스토이 인생독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