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1)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8)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6)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23.07.30
    예루살렘교회가 선택한 사람들
  2. 2023.07.09
    여호와를 모르는 자들의 심판
  3. 2023.06.04
    우리가 쌓아야 할 성벽
  4. 2023.05.12
    그 이름은 임마누엘 1
  5. 2023.04.02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6. 2023.03.18
    신화
  7. 2023.03.10
    칸트 선생님, 우리는 왜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까?
  8. 2023.03.05
    자기부인

사도행전6:1-6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서 자꾸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잘될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어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남북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념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분열 현상이 뚜렷합니다. 지도를 그려놓고 색칠하라 하면 망설이지 않고 색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통일이라는 말까지 하지만, 좋은 일들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큰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힘입니다.

 

복음의 전파는 예루살렘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유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님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120명에서 시작되어 한 번에 3000명이 더해졌습니다(2:41). 이어서 5000명이 또 더해졌습니다(4:4). 숫자상으로 812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이스라엘 숫자의 헤아림법입니다. 남자 20세이상 50세 미만의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 성도의 정확한 숫자는 8120명의 두 배 일지, 다섯 배 일지, 더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토록 예루살렘교회가 갑자기 확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폭발적인 확장에는 그 배경이 성령님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성장의 배경에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먼저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루살렘교회가 폭발적으로 확장한 배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복음 전파의 기반 다지기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수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수천 명이 여기저기서 모였습니다. 12 명의 사도들로서는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鼓舞的인 현상과 함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Hellenists or Grecian Jews)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파는 대부분 팔레스타인 태생입니다.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Greece-Roma의 각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Hella어를 사용했습니다. 유대 사회 내에서 이 히브리파와 헬라파 유대인들 간에는 갑자기 어떤 긴장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긴장 관계가 예수님을 Messiah로 인정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문제는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이 헌납한 공동 재산으로 가난한 성도들에게 매일 구제금을 할당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한쪽에만 이익이 많이 돌아간다는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과부중에서, 헬라파 과부들은 히브리파에 비하여 덜 혜택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히브리파 사람들이 구제금 나누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를 불평 없이 돌보는 직책을 만들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서 교회는 앞으로 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도들이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봉사하랴, 말씀을 전하랴, 기도하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제일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말씀을 전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이 소홀해졌습니다. 이 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일들이 자기들의 일평생 전부를 분주하게 만들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제일 중요한 일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전심을 다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고, 연구해야 하며, 이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흔히 설교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왜 목사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하나님입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습니다. 목사로서 제일의 필수조건은 말씀 연구입니다. 설교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에서 소홀해지면 성도들에게 죄송해집니다.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일들을 처리하려고 사도들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사도와 제자라는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사도ajpovstolo"/apôstolos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 Hella어에서 처음에 해양언어였습니다.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것을 교회에서 차용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3:1), 교회가 보낸 사자(고후8:25), 야고보(1:19) 그리고 바나바(14:4)에게도 적용된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도란 열두 사도와 바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사도라는 호칭과 직위는 승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직은 초대교회 당시의 독특한 상황의 요청하여 생겨난 단회적이었습니다.

제자 maqhthv"/mathtês배우는 자, 생도라는 뜻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서신서에서는 형제혹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영적 사업과 물질적 구제사업 모두를 중요시했습니다. 구제 사업상의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사도들은 이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결정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란 어떤 틀(frame) 속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실제적인 필요에 대응하여 성경적인 방향으로 꾸준히 개최되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께 부름받은 성별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다른 것과 달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거룩한 신앙 공동체로서의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교회)입니다. 또한 거룩한 공동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정한 장소를 보이는 교회(유형교회)입니다. 구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 경배하고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경건하게 서 있는 구속된 공동체입니다. 신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Messiah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권위 있는 교리의 교사들로서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열두 사도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교제인 동시에 장로들의 지도 아래에 있는 지역 회중들의 전 세계적인 조직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사도들은 제자들에게 open 했습니다. 공궤 할 사람을 따로 택하자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는 집사를 세울 때 몇 가지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든든한 사람입니다. 이때는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든든한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오면 그만 주춤해 버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사나 교회의 직분을 맡을 사람은 먼저 믿음이 든든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규교육을 교회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세상 교육기관에서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과 지식이 상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지혜가 충만해야 했습니다. 미묘한 상황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했습니다. 구제를 관장할 능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혜로워야 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할 줄을 알아야 했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으려면 반드시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거짓 선지자, 거짓 스승, 사이비 지도자, 못된 장로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서 순진한 교인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혜로웠습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해야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 의도대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로 믿음과 신념을 굳이 구분한다면, 언뜻 들으면 신념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념은 너무 자신을 믿은 맹신입니다. 예를 들면 운전자가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운전 판단과 대처가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대리운전자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맹신하는 신념은 끝끝내 자신을 믿습니다. “나의 신념 괜찮다. 나의 신념 운전경력이 몇 년인데. 나의 신념 이 정도는 문제없어.”라고 음주운전을 하는 것이 신념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합니다.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공략하는데 작전회의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을 돌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기드온이 전쟁 소집 나팔을 불었을 때, 3,2000명이 모였습니다(7: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적군의 숫자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7:12)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 말씀대로 2,20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9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전부 3,1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300명입니다. 전투편제 비교를 해보니 메뚜기의 중다함+약대의 무수함+ 해변의 모래처럼 수다함 대 300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입니까?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 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법도 잘지키고, 남에게 잘하며,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고,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자들입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도들끼리 뭉쳐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전을 형성해 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성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잡음 없이 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과도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하나님하고만 잘할 거야.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하나님하고만 좋으면 되지 뭐.”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충성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것입니까? 사도들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칭찬 듣는(marturoumevnou")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으로 되었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다 잘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선택된 사람들은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봉사직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목회 일선에서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성도들로부터 좋은 평판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잡음 없이 처리해야 했습니다.

사도들은 이와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 일곱을 뽑아 안수했습니다. 사도들은 일곱 사람을 택한 후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일곱 사람을 세운 것은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에게 직무를 맡긴 것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직무를 맡긴 것은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는 손을 얹는 행위가 축복할 때였습니다(48:13).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과 대상물 사이의 동일성을 표현할 때 손을 얹었습니다(1:4;3:2;4:4:6:21). 후계자를 세울 때 손을 얹었습니다(27:23). 미쉬나(Sanhedrin iv. 4)에 의하면 안수를 통하여 산헤드린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열 두 사도가 일곱 집사에게 특수한 임무를 맡겨서 자기들에게 가담시킨다는 의미의 안수였습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일곱 사람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세워진 사람은 Stevfano" 스데반, Fivlippo" 빌립, Provcoro" 브로고로, Nikavnwr 니가노르, Tivmwn 디몬, Parmena'" 바메나, Nikovlao" 니골라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일곱을 집사”(deacons)라고 불렀습니다. 여러 교파에서 집사는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대목에서는 집사라는 말의 어원인 헬라어 명사 diakonos를 쓰지 않았습니다. diakonos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diakonia가 쓰였습니다. 2절의 일삼는diakonei'n ‘섬기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diakoniva는 매일의 구제(1)말씀 전하는 것”(4th'/ diakoniva tou' lovgou)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 명은 기능면에서 볼 때, 집사보다는 헌금 분배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날의 세계는 지도자 부족 현상이 심각합니다. 국가나 교회나 우리 사회에 지도자 부재로 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끔찍한 핵무기공장이 건설되고, 인권은 광범위하게 침해받고 있으며, 환경과 에너지의 위기,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비참한 장기적 실업, 산업 간의 마찰의 지속(노사간), 인종 분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존속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가정의 안정을 위협하는 압력들, 의 전통이나 성에 따른 역할에 도전, 그리고 인구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면으로는 만연하는 물질 지상주의와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상실이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제 세계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것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기술적인 지식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현명한 지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현대인들은 혼란에 빠지고 당혹해하며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유를 빌리자면 우리는 목자 없는 양 떼와 같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자들은 자주 장님을 데리고 다니는 장님 길잡이 같습니다.

소위 leadership에는 많은 종류와 수준이 있습니다. leadership은 세계적인 소수의 정치가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국가의 최고 관리층에 한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leadership은 어떠한 사회든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지역의 교회나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입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가정과 집에서의 지도자들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이 대학에서는 교수가 지도자입니다. 회사나 공장의 중역들, 판사들, 의사들, 정치가들, 사회사업가들, 공무원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갖습니다. 방송국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사람들-작가, 극작가, 저널리스트, 라디오, TV의 방송인들, 예술가와 프로듀서도 모두 지도자입니다. 세상은 이 모든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 더 안목 있고, 더욱 용기 있고 더 헌신적인 지도자들을 바랍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태어나기도 하고 길러지기도 합니다. 미국의 흑인 교육학자 Bennie E. Goodwin소질 있는 지도자들은 탄생하는 것이고, 효율적인 지도자들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Shakespeare의 유명한 시 구절에는 위대한 것을 두려워 말아라.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게 태어나지만, 어떤 이들은 위대함을 성취하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이 그냥 그들을 찾아오기도 한다.”라고 했습니다. 경영학 총서는 천부적인 지도자”(BNLs, bom natural leaders)에 관해 말합니다. 그들은 강한 智性과 개성, 그리고 인격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Oswald Sanders는 기독교적 leadership은 타고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 혹은 타고난 재주와 영적인 재능의 조화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와 잠재적인 leadership 모두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Closing 일반적인 leadership의 표지와 특별한 기독교적 leadership의 표지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시작하자고 부추기기 전에 우리 스스로 시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따를 만한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끈기있게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사도행전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명령  (0) 2020.01.18
And

여호와를 모르는 자들의 심판

이사야5:13-17

베트남 전쟁에서 이길 길을 몰라서 패배했다고 시인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TV 기자회견에서 국민 여러분!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우리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졌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 임할 때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했었습니다. 첫째, 일단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환산하기로 했습니다. 둘째,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은 일단 옆으로 제쳐놓았습니다. 셋째,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넷째, 그것들은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가 베트남에 패배한 이유입니다.”

손자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 , , , 다섯 가지인데 는 군주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같은 뜻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손자병법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습니다. 임금이 정하는 전쟁의 명분, 병사들의 전투의지, 백성들의 애국심이 한마음 한뜻이 될 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이 를 알지 못했기에 패전했습니다. Robert Strange McNamara는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미국은 전쟁해야 하는 명확한 vision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라는 가치가 절대 숫자로 환산될 수 없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13에 이러므로 @kel;/lâkēn라는 副詞를 사용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용서할 수 있을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로잡힐 것이라는 말은 過去時制가 되었습니다. 1:28-31을 보면

 

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따라서 이러므로는 심판의 경고와 위협을 동시에 말합니다. 심판의 경고를 들었다면, 이스라엘은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5:8-12을 보면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찌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1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12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의 경고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할 일들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무지함을 인하여 t['d: AyliB]mi/mibh-lî

dʽat는 문자적으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소멸 됨”,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닳아 떨어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다 없어짐입니다. 여호와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졌습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씨종으로 노예 생활하는 것을 면해주셨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의 은혜를 사그리 다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마음 가운데는 선천적인 본능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무지를 가장하여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그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모든 사람 속에 주입하셨습니다. 그 기억을 잊지 않도록 요모저모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더해 주십니다. 가뭄을 통해서, 또는 장마를 통해서, 천재지변을 당하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그들의 창조임을 깨닫고 있기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거나 그들의 생명을 그의 뜻에 따라 바치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의 증거에 의해 정죄를 받습니다.

야만스런 민족이거나 미개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은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종교의 씨앗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 이후로 종교 없이 산 지역, 도시, 가정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무언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모두 신들을 믿고 있는데, 자기만 아무 신도 믿지 않으면, 두렵기에 뭐라도 믿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깎아 만든 것이나 부어만든 것들에게 예배하여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것입니다.

과거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그들은 때때로 그들이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어렴풋하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G. Caligula/37-41)는 하나님을 심히 대적한 자입니다. 하나님께 아주 모욕적인 말을 한 자입니다. Tiberius Caesar의 증손 조카이며 후계자인 Suetonius의 말에 의하면, Caligula는 천둥만 치면 벌벌 떨면서 침대에서 뛰어나와 그 밑에 숨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라고 하는 자들도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은 있습니다. 사람이 실제적인 무신론은 불가능합니다. 건전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워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불경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지만, 그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내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확신을 입증해주는 것이고, 하나님이 각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능한 한 쫓아 버리려 합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파괴해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이 창조의 법칙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를 만든 분이 누군데, 지옥을 누가 관장하시는데,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시고 관리하시는데 자꾸 이탈하느냐입니다. 지구를 떠나도 내가 관장하고, 땅속 깊이 들어가도 거기도 내 관할인데 나를 떠날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백성입니까? 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을 불가마 같은 애굽에서 빼내신 하나님이십니다. 핏덩이 같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으로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출애굽기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을 잊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지와 악의에 의해 소멸되거나 부패해집니다. 그들이 이방의 각종 미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의 씨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뿌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잘 자라게해서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미신에 빠져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고의로 악의를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으로부터 이탈한 것입니다. 사람이 미신에 빠져든 사람들은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무지는 거의 대부분 교만한 허영과 강퍅함과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마땅히 자신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쓸데없는 사색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미신에 빠지는 것은 교만과 결합된 허영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 지어낸 모습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고, 쓸데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귀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토속신앙인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미신에 깊이 빠져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상상 속의 신을 믿으려는 부패함이 자기 자신을 망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14:1)라는 말은 선천적인 빛을 꺼버리고, 고의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자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하고 습관적인 죄로 인해 강퍅해집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사납게 내쫓습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부여받았음에도 내쫓습니다. 그들의 이 미친 행동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을 단적으로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의 사악한 행위가 눈 뜨고 못 볼 지경일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사악한 앗수르나, 바벨론 등과 같은 나라들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Calvin은 악한 자들의 마음에 지방이 덮여서 그들이 눈을 감아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공정한 처벌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36:1)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해석한 것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확신하기에, 그들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매우 거만하게 찬양합니다.

그들이 비록 자신들의 의식과 다투어 거기에서 하나님을 추방하려고 하지만, 그를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기에 그들은 짐승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이 이러한데 하나님이 계실까? 정의와 공의는 사라지고, 불의와 악의가 판치고 있는데, 하나님은 뭐하고 계실까라고 반문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신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놓아 그것들을 좇았기에 사람들이 극도로 악해졌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신앙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종교가 하나님의 뜻에 반한 행동을 열심히 합니까? 이것이 종교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지만, 전혀 아닌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신적인 신앙은 하나님이 관심조차 없다고 명시한 것들만 고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합니다. 미신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23:10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사람으로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예레미야32:35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케 한 것은 나의 명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에스겔 16:20,21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암몬 자손들이 섬기는 밀곰(Milcom)은 몰렉(Moloch), 몰록(Moloch), 말감(Malcam)으로 불리던 암몬인들의 민족신입니다. 이 신을 섬기는 제의(祭義)의 특징은 인신제사였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가증한 신으로 언급되었습니다(20:1-5). 유아(幼兒) 희생제사였습니다.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이었습니다.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습니다.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우측에 맹렬히 불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고대 이방 족속들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불인 태양을 섬기기위해 이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부모들은 자식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아하스(Ahaz) 시대 때 벤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아이를 죽여 뜨겁게 가열된 몰렉의 팔에 안겨 결국 불태우는 유아제사가 있었습니다(16:20, 21; 20:31; 32:35; 왕하23:10). 이같은 사실은 예루살렘 근처 벤 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행해진 이 제사를 가리켜 선지자 에스겔이 학살이라 불렀고(16:21), 예레미야가 불에 살랐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종교에 열심을 내면 어떻게 됩니까? 가정을 파괴하고, 지역을 파괴하며, 국가를 파괴하게 됩니다. 국가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데, 무당의 혀를 빌어서 정치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엉뚱한 곳으로 국정이 흘러가 파선하게 됩니다. 현재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가 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짓입니까? 무당의 짓거리입니다.

 

사도바울도 갈라디아교회에게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4:8)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모호하고 그릇된 견해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라고 경고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 방황할 때 그들은 하나님 없는(2:12) 자들이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고 있는 나라들 일본, 중국, 러시아, 아프리카를 초토화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하나님을 섬겼습니까? 우상숭배에 미쳐서 날뛰던 국가였습니다. 오늘날 이들 국가는 어떤 나라들이 되었습니까? 괴물들이 되었습니다. 백성을 학대하고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심판대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이것이 무너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심판 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힘을 제거할 수도 없고 그것으로부터 도망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두려워하여 외양이 흡사한 어떤 종교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의 의를 소멸시킬 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전 생애에 걸쳐 하나님께 끊임없이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진리와 정의를 쏟아야 하는데, 헛된 곳에 소비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한 포로 생활, 궁핍한 생활, 죽음의 공포를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13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14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 15 천한 자는 굴복되고 귀한 자는 낮아지고 오만한 자의 눈도 낮아질 것이로되 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17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먹을 것이요 살찐 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은 유리하는 자들이 먹으리라

 

흥청망청 먹고 떠들었던 자들이 전쟁의 패배로 인한 참상을 겪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귀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전쟁에 패하면 노예가 됩니다. 돈이 많고, 학식이 풍부하며, 권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은 그를 매우 하찮게 여깁니다. 사망은 환락을 애곡으로 변하게 합니다. 사망은 희락을 울음으로 변하게 합니다. 천한 자와 귀한 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함께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일지라도 죽음은 그를 낮아지게 합니다. 천한자들은 더 낮아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심판의 결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거룩한 하나님께서 그 심판과 이 섭리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높임을 받으십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을 낮추심으로써 거기서 하나님의 정의가 인정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거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가장 강한 자를 꺾으시고, 가장 교만한 자를 낮추시며, 가장 다루기 힘든 자를 길들일 수 있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흠 없이 택한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거룩하신,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의롭게 심판하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실 것입니다. 교만한 자가 낮아질 때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선한 사람들은 구제되고 구조됩니다. “그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같이 먹을 것이라했습니다. 어린 양(예수)을 따르던 자들, 이 땅의 온유한 자들, 그래서 교만한 압제자들에 의해 학대받아 두려움에 빠져있던 자들이 평안하게 푸른 초장에서 먹을 것입니다. 교회의 원수들이 멸망될 때, 교회는 비로소 휴식을 얻고 그들은 기쁘게 먹을 것입니다.

 

Closing 세속적인 철학자들은 한때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안 계시는지를 네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은 계속되지만, 결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0) 2022.09.02
And

우리가 쌓아야 할 성벽

느헤미야8:1-9 / 2023.6.4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1953.7.27). 군사분계선은 휴전선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일본과 군사분계선이 있습니다. 서쪽과 남쪽으로 중국과 군사분계선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입니다. 이때는 군사분계선이 복잡했습니다. 고구려는 북방의 당나라도 지켜야 했습니다. 남쪽으로 신라와 백제도 지켜야 했습니다. 전선이 뒤엉켜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중요했던 요새지가 옛날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radar으로 감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국 시대에는 군사 요새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산에 군사기지를 만들어 돌로 성을 쌓았습니다. 사람들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성터가 오늘까지 남아 있는 남고산성이나 위봉산성을 봐서 알 수 있습니다. 국가가 성을 쌓는 것은 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에는 국경을 computer와 사람들이 병행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성을 쌓거나 computer로 지키는 것은 같습니다. 우리 역시 국가처럼 성벽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국경을 상시 감시하는 군인들처럼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한순간만 방심하면 우리의 대적 사단이 들어와 신앙에 장애를 발생시켜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 영혼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우리가 제일 먼저 쌓아야 할 벽이 있습니다. 1절에서 5절을 보면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서기관)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I. 우리는 말씀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1-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1일은 나팔절입니다(23:23-25). 710일은 대속죄일입니다(23:26-32). 715일부터 한 주간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이 끝난 제8일에는 거룩한 大會의 날입니다. 이렇게 절기가 정해져 있었지만, 초막절은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지 900년 만에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일 년 중 여러 절기가 들어있는 칠월을 지키기 위해서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백성들이 유다의 각 성과 마을에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살 집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성벽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에스라를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비통해했습니다. 그들이 포로가 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포로 되었다가 풀려난 서기관이자 제사장인 에스라는 제사장들 가운데 강단에 섰습니다. 서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펴들어 읽었습니다.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가 낭독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성경을 믿지 않았습니다. 법관에게 육법전서가 없이 제멋대로 판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로인해 그들 생활은 뻔해졌습니다. 세상인지 교회인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위기가 닥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등한히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말에 많이 노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일들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에 우리의 귀가 너무나 열려 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심히 둔해졌습니다.

 

사사기2:10절을 보면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모두 잊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은 수많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중에서 좋은 기회를 놓친 때가 여호수아와 갈렙이 죽고 난 후입니다. 그들은 번성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다른 나라의 정복을 받지 않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성하고 복될 기회를 제공하였음에도,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인 재앙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신문이나 방송의 말들은 100믿습니다. 우리가 과거 국민학교 때 기자들을 무관 제왕이라고 배웠습니다. 왕관만 쓰지 않았지, 사실상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옛날에는 기자가 진실만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믿을만한 방송국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희귀합니다. 많은 신문사가 있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신문이 진실만(fact)을 쏟아낼까요? 그런데도 언론사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매우 잘 믿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교회에 자꾸 끌어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불행입니다.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한낱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진은 성경을 일생의 지침서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회개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산에서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살길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복 있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상고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베뢰아 사람처럼 말씀을 읽고, 배우고,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살길을 바르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말씀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II. 우리는 예배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에스라는 하나님을 맘껏 송축했습니다. 위대하신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백성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엘로힘 여호와를 송축했습니다.송축하다(바라크)의 의미를 보면 무릎을 꿇어서 받는 복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무릎을 꿇는 것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 자신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무릎을 꿇는 것,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함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시편28:6-7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매일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찬송이 없을 때 사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세상의 노래는 하나님을 위한 찬양이 아닙니다. 모두 육신과 인생의 허무함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모두 인간을 찬양하고, 물질을 찬양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단이 기뻐하는 노래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염려하는 노래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 하나님은 두레박 안에 복을 채워 돌려보내십니다. 찬송은 우리 즐거움의 시작이요, 줄거리이며, 완성입니다.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의 찬송은 가치 있는 찬송입니다. 그것을 보고 간증이 되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순서 중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묵상기도, 찬송, 기도, 헌금, 성경봉독, 말씀선포, 찬양, 축도를 하면서 하나님과 우리가 communication을 합니다. 예배로 우리 사정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에게 역시 알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어떤 의식을 치르고 만족하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서 하나하나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제대로 예배를 드린 예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400년 중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대신 우상숭배와 이교의 신들은 사력을 다해 섬겼습니다. 가나안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매우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예배하고, 바알도 섬겼습니다. 복이 두 곳에서 올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온 것은 저주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신들은 사람들이 만든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드리거나 아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레위기10:1-2절을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살라졌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불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라, 다단, 아비람, 온은 제사장 없이 하나님 앞에서 분향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그들을 삼켰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그 첫째가는 의무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의 기도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려 분별과 경외심과 겸손과 열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는 합당한 것들과, 모든 종류의 생존하는 사람들이나, 장차 생존하게 될 자들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흠 없는 설교와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려 분별과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성껏 들어야 합니다. 마음에 은혜로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드리되 경솔하게 행하거나 고의적으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읍시다.

 

우리는 말씀의 벽과 예배의 벽을 쌓아야 할 뿐만 아니라

 

III. 우리는 회개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7-9).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토라)을 듣고 울었습니다.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비탄에 잠겼습니다. 제사장이며 서기관인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말씀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엉엉 울었습니다.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비탄에 잠겼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심히 알고 슬퍼했습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신년인 칠월이 되자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나팔을 불어 성회를 공포했습니다. 초막절과 대속죄의 날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 곧 성전 터의 남동쪽에 모였습니다. 수문 앞에서 이스라엘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돌이켜보니 과거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바알을 섬겼던 과거가 원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은 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회개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이전의 삶과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첫걸음입니다. 회개에는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회개와 신앙입니다. 회개란 불신자들이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회개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심은 하나님께로 자유롭게 전향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에 있다가 복된 하나님께로 귀를 기울이며 얼굴을 돌리는 것입니다. 모세나 여호수아, 士師時代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여호와를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한 후에야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유다 왕국에는 히스기야와 요시야 시대에 국가적 회심이 있었습니다. 요나의 전도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3:10). 오늘 우리도 가슴을 쳐야 합니다.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시킬 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회개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에 회개를 거부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강퍅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참으로 불행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바로는 모세가 하나님의 재앙을 내려도 그 마음에 전혀 동요가 없었습니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해도 마음이 돌같이 강퍅했습니다. 개구리 해병대가 나일 강으로부터 상륙해도, 메뚜기 공격이 있어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로는 그 자신까지 멸망 당해야 했습니다. 창세기 42장을 보면 요셉에게는 양식이 풍부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예전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요셉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풍부한데 회개하지 않아서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진정한 회개는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 가족이 모두 회개할 때 이미 번영이 우리 문 앞에 도착하였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회개할 때 이미 부흥은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회개할 때 어둠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그리고 빛이 나를 비추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납니다. 바르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살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높게 쌓여 있는 허물어야 할 벽이 많이 있습니다. 내자신의 무능함을 허물어야 합니다. 내 자신의 견고한 자만심을 허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쓸데없는 자존심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쌓아야 할 신앙의 성벽이 많습니다. 허물어야 할 벽들을 허물지 못할 때 신앙이 점점 쇠퇴해 갑니다. 쌓아야 할 벽들을 우리가 쌓지 못할 때 영육이 점점 더 병들어 갑니다.

 

Closing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여 대적들을 막아낸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벽들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의 성벽을 쌓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의 성벽을 쌓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찬양의 성벽을 쌓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의 성벽을 쌓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성벽 쌓기를 결단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 느헤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하는 느헤미야  (0) 2011.09.03
And

마태복음1:18-25

 

사람이 쓰는 것 중에서 전쟁무기가 가장 발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항공모함은 온통 무기로 구성된 배입니다. 미국의 2017722일부터 취역중인 Gerald R. Ford급 항공모함은 그 이력이 대단합니다. 길이가 333m입니다. 전체높이는 76m이며, 폭이 78m입니다. 흘수가12m인데 떠 있는 물체가 수면에 의해 구분되는 면에서 그 물체의 가장 깊은 점까지의 수심을 말합니다. 갑판은 25층이나 됩니다. 만재배수량은112,000톤입니다. 그러면서도 속력은 시속30노트 이상인데 시속50km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습니다. 승무원은 4,660명이며, 항속거리는 무제한입니다. 그 외에 무장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함재기만 해도 75대 이상이 실려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무기와 같이 작전을 한다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웬만한 국가에서나 소유할 수 있는 무기가 배 하나에 탑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현재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 곁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시간과 공간이 제한하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것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같이 해야 할 이유입니다.

미국은 면적이 983,1519, 인구 3,3480,5268, GDP국내총생산량 209366억달러 세계 1위입니다. 현재 지구에서 미국을 능가할 나라가 없습니다. 러시아나 중국이 땅 크기로 미국과 겨루려고 하지만, 어림없습니다. 국방비가 제1위로 2위에서 10위를 모두 합해도 미국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전 세계가 미국의 활동지역/activity area입니다. 모든 나라가 미국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계기다가는 파멸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예배할 때에는 삼위의 제2위이신 성자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는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Messiah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행하셨던 이적들 외에도, 다른 신적 권세들을 예수님이 행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성자체를 주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하지 못할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9:6:2:10:5:24), 그리고 죄를 범한 사람들을 말뿐만 아니라(9:2:2:5;5:20:7:48)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15:1-2).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특권입니다. 물론 사람도 사람에게 대하여 지은 죄를 용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만이 그 죄를 용서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14:13).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심을 밝히셨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자신이 응답하실 것임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신 분만이 기도를 들으실 수 있기 때문에 기도응답을 약속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실례들이 인용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드려진 기도의 실례들은 사도행전1:24, 7:59, 9:10-17, 고린도후서12:8, 데살로니가전서3:11, 데살로니가후서2:16 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그들이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셨습니다. 곧바로 그를 찬양하던 어린아이들을 격노한 대제사장들이 잠잠케 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찬양을 당연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8:2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편 8:2절을 인용한 것에 관하여 D. A. Carson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찬미하는 것을 원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은 대단하셨다. 1.그의 대답은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찬미할 성경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자. 2.동시에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나중에 (특별히 부활 후에) 그 사건을 음미하고서 예수님의 그 대답에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린아이들의 호산나 찬미는 하나님이 아니라 Messiah이신 다윗의 아들에게 드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Messiah 됨을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의 찬미를 옹호하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도마가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찬미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이 같은 경배와 찬미를 받아들이신 경우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그 자신의 신성을 옹호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십니다.

요한복음 14: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신앙의 합당한 대상으로 자신을 성부와 동일선상에 놓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신성모독입니다. 이 같은 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선하심이 손상되지 않을 유일한 근거는 그의 하나님 되심을 확증하는 것뿐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가르쳐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듯 자기를 신뢰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신적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특권을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속성으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권과 전능성

우리 주님께서 우주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과 권능을 소유하셨습니다. 자신이 택한 자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는 특권과 권능을 가지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생명을 버릴 권세와 다시 생명을 취할 권세도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권세와 특권에 대한 주장들을 어떤 다른 사람이 했다고 하면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배와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우리 주님께서 가지셨습니다.

 

편재성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고 약속하신 때, 그는 임마누엘의 호칭을 원용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백성과 항상 인격적으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성령의 권능과 임재를 통해서 뿐 아니라 편재하시는 구주로서 스스로 임재하십니다.

전지성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1:48)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깜짝 놀라게 했을 때, 그는 일반 사람의 지식을 훨씬 뛰어 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식의 수준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들으며 응답해 주는 특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했을 때, 자신에게 전지성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밤낮으로 드려지되 수세기에 걸쳐 시도 때도 없이 드려지는 제자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들을 들어주고, 모든 기도 제목을 하자 없이 간청자와 잘 연결 지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 응답할 수 있는 자는 스스로 전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존재의 깊은 것까지를 아는 지식이 자기에게 있음을 예수님이 주장하신 때(11:27), 그는 "아들"로서 전지성을 온전히 소유한 것으로 주장하신 것입니다.

 

유대의 아하스 왕 시대에는 암울했습니다. 시리아와 사마리아가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시리아 북쪽에는 앗수르가 유대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는 더 힘써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유대는 하나님만 믿으면 어떤 위협도 없을 것이며, 戰亂에도 휩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숫제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람의 마지막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들 두 국가는 모압, 암몬, 에돔, 유다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앗수르의 서남진 정책을 저지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동맹하자고 했습니다. 이에 모두 동조했는데, 유다만 거절했습니다. 아하스는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너희들과 같이 해”. 아하스는 앗수르의 힘을 더 의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때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해서 유대를 침범했습니다. 두 나라의 갑작스런 공격에 유다는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버렸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쟤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하스 왕은 강대국인 앗수르를 의지고 하셨습니다. 높은데서든지 낮은데서든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서나 구하면 응답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세상세력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언약입니다. 임마누엘은 일차적으로 유다백성을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훗날에는 Messiah를 보내시겠다는 언약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laeWnM;[i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우리가 통상 Immanuel하면 예수님 출생 때 만을 기억하기 쉽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예언했고, 마태복음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Immanuel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여러 곳에서 나타내셨습니다. Immanuel의 하나님은 이사야 이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의 언약 백성에게 Immanuel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창세기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세기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출애굽기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애굽기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출애굽기23:20,24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여호수아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사무엘하7: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7). 하나님께서는 야곱(28:15)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3:12)와도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소유로 취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5-6).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항상 보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23:20,24).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5).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삼하7:9).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나타나셨던 것처럼 임재하십니다. 성육하신 아들로 처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19절을 보면 !Iwshvf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약혼한 Maria가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Maria로서는 이미 가브리엘천사로부터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Maria도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Maria가 임신했는데 !Iwshvf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Iwshvf은 두 가지 방법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Maria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Maria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가만히 끊는 것입니다. !Iwshvf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Maria가 왜 그랬을까? 착한 Maria가 왜 그랬을까? 나는 너무나 사랑하는데 Maria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그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20절에서 23절을 보면 !Iwshvf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지시를 받습니다. Maria 데려오기를 두려워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Iwshvf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24절에서 25절을 보면 !Iwshvf의 고민이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그랬네! 그러면 그렇지! Maria가 누군데 하면서 !Iwshvf은 고민해서 해방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초자연적으로 이 땅에 들어오셨습니까?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백성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서양 종교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인식입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지만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성이 구심점이 된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태는 Messiah의 거룩한 족보를 다윗에게서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더 멀리 올라갈 수 있도록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였습니다. 누가는 더 합니다.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그 이상은 노아요그 이상은 아담이요라고 하면서 인류의 조상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복이라는 것을 암시해 놓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복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수록된 네 여인 룻, 다말, 라합, 우리야의 아내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Messiah 의 탄생을 위해서 이방인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동쪽에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온 박사들이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이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저희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2세기경부터 교회를 새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로 부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천사가 !Iwshvf에게 Maria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름을 반드시 예수/!Ihsou'"라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백성/to;n lao;n aujtou'을 위함이라 했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tw'n aJmartiw'n aujtw'n)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으로 거론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과 죄라는 것과 구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류 즉 만인구원이 아닙니다. 자기백성이며(3:16), 자기 양(10:11)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전쟁무기를 의지합니다(20:7). 혹은 육체의 힘을 의지합니다. 얼마나 인간이 상승되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식, 명성, 지위, 훌륭하고 정교한 기계, 영향력 있는 친구, 기개가 뛰어난 사람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단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최대의 적은 죄입니다. 이 죄가 우리들의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죄가 인간을 무참히 파괴시킵니다. 우리나라의 한 해 술 소비량은 소주102, 맥주164병입니다. 음주행태위험도는 5점 만점에 3점입니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술로 인한 범죄도 엄청납니다. 아마 술 마시는 사람들에게 1년간 술을 못 마시게 한다면 난리일 것입니다. 왜 이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이 죄는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어 파괴시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들이 모두 죄입니다. 우리들의 행위 그 자체가 죄입니다. 죄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표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죄들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의 피와 성령의 거룩하게 성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합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위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참된 행복의 구원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소유하는 구원입니다. 참 자유를 누리는 구원입니다. 영광으로 충만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구원입니다. 기도할 때 응답받는 구원입니다. 영향력 있는 간증을 다른 보일 수 있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영혼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꼭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구원하다/swvzw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존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심각한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위험은 전쟁 중 또는 바다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는 위험한 질병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붙여진 명칭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성부에 대한 명칭들로는 태양, 방패, 강한 요새, 피난처, 운명 등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들로는 세상의 빛, 생명의 양식, , 진리, 생명 등입니다. 성령에 대한 명칭들로는 진리의 성령, 거룩한 영, 영광의 영, 은혜의 영, 보혜사, 인침의 영, 증거의 영 등입니다. 이 모두의 이름들이 무엇 때문에 나열되어 있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우리에게 미칠 때 Immanuel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보호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은총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분과 연합함으로 임마누엘의 은총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실제적인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존재가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자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했을 때, 어김없이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셔서 도우셨습니다.

 

Closing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우리 생애전반에 적용되는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의 이름은 예수님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분에게만 적용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대단히 밀접한 이름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이 본 아들의 영광  (1) 2022.09.24
역사의 주인 예수그리스도  (0) 2010.09.21
And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기도는  (0) 2024.01.07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0) 2023.09.17
신화  (0) 2023.03.18
자기부인  (0) 2023.03.05
학문과 교양  (0) 2022.12.25
And

신화는 인간이 만든 허구한 이야기이다. 신화는 당시 저작가들이 꾸민 이야기다. 그 이유는 호메루스 등이 신의 속성을 죄를 지은 인간들의 속성처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범한 범행이 신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 범죄를 범죄로 간주하지 않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절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온갖 상상의 신들을 다 불러모아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면서도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 이것 역시 죄가 된다.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에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0) 2023.09.17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자기부인  (0) 2023.03.05
학문과 교양  (0) 2022.12.25
악한 전쟁  (0) 2022.12.24
And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5156

 

칸트 선생님, 우리는 왜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까?

[칸트와 희망의 신학④] 칸트 윤리학이 추구하는 근본 방향(2): <실천이성비판>을 중심으로

www.newsnjoy.or.kr

 

'철학.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증주의  (0) 2023.02.05
그리스도인과 철학  (0) 2023.01.22
신플라톤주의  (1) 2023.01.14
실존주의  (0) 2022.10.29
실재론  (0) 2022.09.05
And

제비가 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 제비가 봄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제비가 봄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단지 기다리기 만 하고 날아오지 않는다면 겨울이 멀리 가버렸음을 어찌 알겠는가? 땅도, 풀도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자면 하나님의 때를 먼저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의 비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첫 번째 제비인지, 열 번째 제비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서

'좋은글들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표상이신 그리스도  (0) 2023.04.02
신화  (0) 2023.03.18
학문과 교양  (0) 2022.12.25
악한 전쟁  (0) 2022.12.24
필요한 지식  (0) 2022.12.18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