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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우아하고, 얼마나 균형이 잡혔으며, 얼마나 내용이 다양해야 하는지를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신다. 또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진행되고, 얼마나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지도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를 주목하신다.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공인되며 허용되고 기록되고 또 보상을 받는 기도란 없다. 다만 진실하고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가 있을 뿐이다. 진정한 어머니는 두 마음을 가진 자식을 낳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을 사랑하신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분리된 마음을 혐오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머뭇머뭇하거나 둘로 나뉜 마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Thomas Br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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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콘스탄틴 황제가 왜 죽을 때 세례를 받았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구원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는 추측으로 죽을 때에야 세례를 받은 것을 두고 콘스탄틴황제를 많이 비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궁금증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으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세례를 연기했기 때문입니다. 고백록 제1권 유아기와 소년기 제11장을 보면 세례의 연기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11장_ 세례를 연기함

(17)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영생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 영생이란 교만한 우리들에게 친히 내려오신 우리 주 하나님의 겸손을 통해서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당신을 굳게 믿고 있었던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태어난 후 바로 십자가의 표시로 인 침을 받았고, 당신의 소금으로 간이 배어 있었습니다.

오, 주님, 내가 어렸을 때에 갑자기 배가 몹시 아파서 죽게 되었던 일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그때도 당신은 나를 지키시는 자였으니 내 어머니와 우리 모두의 어머니 되신 당신 교회의 경건에 감화되어 내가 얼마나 열렬한 믿음으로 내 주 하나님이신 당신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고 열망했는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내 육신의 어머니는 대단히 당황하며 당신을 믿는 경건의 마음으로 나의 영생을 낳아 주기 위해 또 산고를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여, 그리하여 내가 당신께 참회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의 성례로 깨끗이 씻겨지고, 구원받은 자들의 무리에 들도록 어머니는 열심히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병은 즉시 나았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죄 씻음은 늦어졌으니 그 이유는 내가 만일 더 오래 살면 더 더럽혀질 것이 불가피한 것이었고 또한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는 더 크고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脚註/각주 고대교회는 세례를 받은 이후의 죄를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강경파는 세례 이후의 지은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고 믿었고, 온건파는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는 두 번까지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믿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세례를 의도적으로 죽을 때까지 연기하기도 했다. 그 예로서 기독교 황제였던 콘스탄틴은 337년 임종시에 유세비우스 감독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그때 나는 이미 믿는 자였고 아버지를 제외한 온 집안과 어머니가 다 믿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믿지 않았어도 내 안에 있는 어머니의 경건의 영향을 넘어뜨리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을 방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머니는 온 노력을 기울여 내가 그보다 당신을 나의 아버지로 삼을 것을 원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당신은 어머니로 하여금 그녀의 남편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영적으로는 아버지보다 탁월하셨으나 계속 그에게 잘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것이 실은 어머니가 당신께 순종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을 명하신 분이 당신이었기 때문입니다.

(18) 오,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께 묻사오니 그때 내 세례가 무슨 목적으로 연기되었는지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때 고삐가 늦추어져 죄를 더 짓게 한 것이 참으로 나에게 좋은 것이 되었 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늦춰지지 않았어야만 했습니까? 그렇다면 왜 지금도 사방에서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그를 내버려두어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다’ 라고 합니까? 그러나 육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를 내버려두어라. 더 상처를 받게 내버려두어라. 그는 아직 치료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때 만일 단번에 치료가 되고 계속 나와 내 친구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당신의 보호하에 안전하게 인도되어 왔다면 얼마나 더 좋았겠습니까? 진실로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에게 훨씬 더 좋을뻔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고 큰 유혹의 (바다의 파도가 유년기 후에 나에게 닥쳐왔습니까? 이것을 미리 본 어머니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루어져야 할 무형의 진흙 덩어리와 같은 나를 그 파도에 맡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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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하나님은 택하심을 통해 선택에 관계하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가르침을 통해 소명에 관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침을 통해 칭의에 관계하십니다. 이처럼 구원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사역입니다.

                                                 Thomas Ad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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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

요한복음1:9 2023.

 

 

배가 좌초되었다는 말을 Greece어로 ajporiva(21:25혼란한)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배가 좌초되면 순식간에 침몰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안전한 구원의 손길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 우리가 구원 얻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았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구원이란 말이 우리 피부에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토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그가 스물여덟살 때 사회주의 혁명단체에 가입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세 사람이 기둥에 묶이는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최후의 5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28년간을 살아왔지만 5분이 이처럼 귀하게 여겨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5분을 어떻게 쓸까? 형장에 같이 끌려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한마디씩 하는데 2분이면 됩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해 보는데 2, 나머지 1분은 대지를 그리고 자연을 한번 둘러보는데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곁에 묶여 있는 두 사람에게 최후의 인사를 하고 가족을 잠깐 생각하고 나니 벌써 2분이 지나버렸습니다. 이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데, ‘3분 후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해졌습니다. 28년간이란 세월을 한순간 한순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무척 후회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살 수만 있다면 순간마다 값있게 쓰련만 하고 생각했으나 가슴만 아파올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장탄하는 금속성 소리가 철커덕하고 났고 이와 동시에 견딜수없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 해 왔습니다. 내 생명이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하고 있을 때 드라마 같은 극적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병사가 멀리서부터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에서 풀려나 시베리아에서 긴 유형 생활을 하다가 1859년에야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의 순간에 느꼈던 시간의 고귀함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고 그 후에 영혼의 문제에 심취하여 그의 소설 속에는 언제나 신앙적 최후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시베리아 유배 생활에서 석방된 직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신앙을 한 편지 속에서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구세주와 같이 그렇게도 아름답고 심오하며 동정심에 가득 차고 여성적이면서도 또 남성 다운 면까지 갖춘 완전한 분이라곤 없다. 정말 질투심마저 느끼는 그런 사랑을 품고 나는 말하거니와, 그와 같이 완전한 분은 절대로 없으며 또한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얘기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든 간에 나더러 그리스도는 진리의 실천자가 아니고, 실제에 있어서 진리인 그리스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까지 해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서슴지 않고 그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 편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의 인간을 상상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참 빛 to; fw'" to; ajlhqinovn이라는 말은 거짓 빛과 대조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희미한 빛조차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사람들이 천사나 인간들을 빛이라고 부르고 숭배할까 봐 미리 차단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해달별들과 같은 빚들은 파생된 빛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시로 만든 빛들입니다. 후에는 이런 빛들이 필요 없습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빛이 하나님 나라로부터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말씀이시고 구원이신 이 빛이 진짜 빛입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순수한 빛입니다. 이 빛의 광채에 비하면 기타의 모든 빛은 희미한 빛도 되지 않습니다.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빛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큰 혜택을 주십니다.

그런데 알량한 인간들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이 빛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 빛이 아닌 것들을 빛이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빛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요한복음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사도요한은 예수님 오시기 전 이 세상을 어둠/skotiva/으로 표현했습니. 이 세상이 캄캄한 암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들을 보세요. 심히 오염된 물을 바다에 방류하는 것,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는 것, 자신들의 자식을 위해서 타인은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 그로 인해서 많은 사건 사고가 그치지 않는 것, 온통 어둠뿐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에 있으며, 세상 자체가 어두움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빛에 저항하지도 못합니다. 이 어둠을 위해서 빛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성육신해서 온 세상을 비춥니다.

 

세상이 어둡다는 것은 빛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곧 사람마다 빛이 필요한데, 예수그리스도가 없으면 빛이 없는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배는 이미 모든 기능이 고장 났습니다. 이제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 없는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이와같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비취는 참빛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swthriva/soterîa쏘테리아라고 합니다. swthriva는 고전 헬라어에서 구출이나 보존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집에 없을 때나 여행 후에 자기 가정이나 모국에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soterîa라 했습니다. “안전의 보증soterîa라 했습니다. 위험에 대한 안전swthriva라 했습니다. 파피루스에서 soterîa의 의미는 신체적인 건강이었습니다. 예로 가족의 한 사람이 집에 편지를 쓸 때 여러분의 soterîa에 대하여 편지를 주십시오”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세요라고 할 때 soterîa를 사용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soterîa일반적인 안전과 보장을 의미했습니다. 잠언11:14에서 조언자가 많으면 soterîa/평안가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28:21에서 야곱은 만일 soterîa/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계약을 했습니다. 창세기44:17에서 요셉은 잔이 발견되지 않는 자는soterîa/평안히로 아버지께 올라갈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soterîa일반적인 괴로움에서 구출을 의미했습니다. 시편3:2절을 보면 조롱하는 자가 시편기자에게 말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soterîa/구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42:11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시편기자를 후원하는 soterîa/도우시는이십니다. 고라자손은 하나님께 soterîa/구원를 베푸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망하는 자는 그의 soterîa/구원를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라 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soterîa는 특히 적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사사기15:18에서는 블레셋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사무엘상11:913을 보면 암몬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열왕기하13:5에서는 아람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역대하12:7에서는 애굽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역대하20:17에서는 모압으로부터의 soterîa/구출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그 적으로부터의 하나님의 soterîa/구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Dramaticsoterîa홍해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출애굽기14:13에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soterîa/구원를 보라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모든 구원은 주님의 soterîa/구원였지만, 홍해에서의 soterîa/구원는 특별히 뛰어난 soterîa였습니다. 거기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손이 그의 탁월성과 능력에서 보여졌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종종 soterîa종말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장차 오는 새로운 시대에서만 그 완전한 개화와 영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세상에서도 영원한 구원입니다(45:17,52:10,3:23).

일관적으로 이 soterîa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soterîa/도움은 헛되다고 시편 60: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soterîa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무력할 때, 하나님의 soterîa/능력는 주어집니다. 사람의 한계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soterîa란 말은 감사를 노래하는 승리에 찬 서정적인 귀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노래에서(15:2), 사울의 손에서 구출된 후 다윗의 노래에서(삼 하22:3), 아들을 얻은 것을 알았을 때 한나의 노래에서(삼상2:1)에서 soterîa가 나타납니다. 구원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기쁨으로 찬송하게 합니다.

 

신약성경 기록자들이 soterîa를 사용했을 때는 이 풍성한 기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soterîa 역사나 개인적인 생활의 위기에서 구원과 보존, 섭리하는 능력을 나타내며, 또한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는 배려나 구원으로 감싸진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으로 찬송케 하는 배려를 나타내기 때문이었습니다.

soterîa하나님의 의도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람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화해되어야 하는 진노의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떻게 진노에서 자비로 변해졌는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약성서에서 soterîa/구원의 주도권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가 아닌 soterîa/구원을 얻도록 정하셨습니다(살전 5:9).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사람을 soterîa/구원에로 선택하셨습니다(살후2:1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soterîa/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것은 soterîa를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이와같이 soterîa는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송영에서도 구원은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7:10,19:1).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3:17). soterîa의 원동력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이론이 아닙니다. 구원은 실제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유명을 달리했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약 100년의 인생이란 굉장히 중요한 삶입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최고로 우선해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이 등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에 등록되지 않았다면 빨리 등록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soterîa/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무한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monitor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반드시 받습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상속한 죄는 죽음입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준 것은 죄의 확장이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5:12).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죽음은 죄의 책임을 묻는 행동의 결과입니다. 사망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5:12 5:17). 죽음은 인정이 없습니다. 죽음은 사정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무정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죽음은 무자비한 괴물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음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이 죽음에서 우리가 탈출해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줍니까? 세계는 온통 IAEA 나쁜 놈들, 일본 나쁜 놈들, 일본의 편을 드는 미국도 나쁜 놈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쿄전력이 2011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원자로 1, 2, 3, 4호기의 냉각기능이 상실되어 노심이 용해되면서 방사능이 누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접근을 하지 못합니다. 냉각기능이 상실되어 노심이 용해되었다는 것은 원자로를 식히기 위해 오염된 134t의 오염수를 2100년까지 바다에 방류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수백톤의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데 2100년후까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돈 때문입니다. 오염수를 땅을 파 묻어야 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에 방류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에 적극 협조했는데, 1명이 2주에 한 번 정도 검사하는데 서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이에 중국에서는 일본의 수산물을 전면 수입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일본에서 쓰는 처리수라고 불러야 한다고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씁니다. 미국과 유럽도 처리수라고 씁니다. 혹 어떤 언론은 오염처리수라고 씁니다. 중국은 핵오염수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핵오염수라고 불러야 합니다. 방류후 삼중수소가 검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검증하고 있습니까? 도쿄전력에서 검증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도둑을 잡겠다고 하는데 전 세계가 이에 거의 협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검증을 하면서 안전하다고 하면서 마스크를 쓰고 방독마시크를 씁니까?

 

죄는 이토록 사람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 죄들은 영원히 죽을 죄들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언제? 지금 구원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soterîa를 받아야 합니다. 이에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핑계도 없습니다. 이 결정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이 죽은 후에는 어떤 도옴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구원받아야 하고, 지금 결정 해야합니다. 미적미적하다가는 큰 일을 당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가족이 큰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뻔했으나 못받은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 도운 사람들입니다. 방주를 120년이나 걸쳐서 지었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품삯을 받고 일하러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 보았을지는 모르나 방주에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소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불가항력으로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널리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멸망당했습니다.

 

Closing 구원받는다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은 힘든 사역이었습니다. 또 우리 안에서 은혜로 역사하시고, 우리가 타락과 유혹과 혼란의 길을 가지 않도록 이끄시는 성령님의 사역도 어려운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주라 하셨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결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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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6:1-6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서 자꾸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잘될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어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남북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념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분열 현상이 뚜렷합니다. 지도를 그려놓고 색칠하라 하면 망설이지 않고 색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통일이라는 말까지 하지만, 좋은 일들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큰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힘입니다.

 

복음의 전파는 예루살렘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유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님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120명에서 시작되어 한 번에 3000명이 더해졌습니다(2:41). 이어서 5000명이 또 더해졌습니다(4:4). 숫자상으로 812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이스라엘 숫자의 헤아림법입니다. 남자 20세이상 50세 미만의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 성도의 정확한 숫자는 8120명의 두 배 일지, 다섯 배 일지, 더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토록 예루살렘교회가 갑자기 확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폭발적인 확장에는 그 배경이 성령님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성장의 배경에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먼저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루살렘교회가 폭발적으로 확장한 배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복음 전파의 기반 다지기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수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수천 명이 여기저기서 모였습니다. 12 명의 사도들로서는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鼓舞的인 현상과 함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Hellenists or Grecian Jews)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파는 대부분 팔레스타인 태생입니다.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Greece-Roma의 각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Hella어를 사용했습니다. 유대 사회 내에서 이 히브리파와 헬라파 유대인들 간에는 갑자기 어떤 긴장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긴장 관계가 예수님을 Messiah로 인정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문제는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이 헌납한 공동 재산으로 가난한 성도들에게 매일 구제금을 할당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한쪽에만 이익이 많이 돌아간다는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과부중에서, 헬라파 과부들은 히브리파에 비하여 덜 혜택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히브리파 사람들이 구제금 나누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를 불평 없이 돌보는 직책을 만들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서 교회는 앞으로 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도들이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봉사하랴, 말씀을 전하랴, 기도하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제일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말씀을 전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이 소홀해졌습니다. 이 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일들이 자기들의 일평생 전부를 분주하게 만들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제일 중요한 일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전심을 다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고, 연구해야 하며, 이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흔히 설교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왜 목사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하나님입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습니다. 목사로서 제일의 필수조건은 말씀 연구입니다. 설교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에서 소홀해지면 성도들에게 죄송해집니다.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일들을 처리하려고 사도들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사도와 제자라는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사도ajpovstolo"/apôstolos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 Hella어에서 처음에 해양언어였습니다.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것을 교회에서 차용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3:1), 교회가 보낸 사자(고후8:25), 야고보(1:19) 그리고 바나바(14:4)에게도 적용된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도란 열두 사도와 바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사도라는 호칭과 직위는 승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직은 초대교회 당시의 독특한 상황의 요청하여 생겨난 단회적이었습니다.

제자 maqhthv"/mathtês배우는 자, 생도라는 뜻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서신서에서는 형제혹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영적 사업과 물질적 구제사업 모두를 중요시했습니다. 구제 사업상의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사도들은 이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결정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란 어떤 틀(frame) 속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실제적인 필요에 대응하여 성경적인 방향으로 꾸준히 개최되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께 부름받은 성별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다른 것과 달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거룩한 신앙 공동체로서의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교회)입니다. 또한 거룩한 공동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정한 장소를 보이는 교회(유형교회)입니다. 구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 경배하고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경건하게 서 있는 구속된 공동체입니다. 신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Messiah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권위 있는 교리의 교사들로서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열두 사도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교제인 동시에 장로들의 지도 아래에 있는 지역 회중들의 전 세계적인 조직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사도들은 제자들에게 open 했습니다. 공궤 할 사람을 따로 택하자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는 집사를 세울 때 몇 가지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든든한 사람입니다. 이때는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든든한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오면 그만 주춤해 버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사나 교회의 직분을 맡을 사람은 먼저 믿음이 든든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규교육을 교회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세상 교육기관에서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과 지식이 상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지혜가 충만해야 했습니다. 미묘한 상황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했습니다. 구제를 관장할 능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혜로워야 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할 줄을 알아야 했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으려면 반드시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거짓 선지자, 거짓 스승, 사이비 지도자, 못된 장로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서 순진한 교인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혜로웠습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해야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 의도대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로 믿음과 신념을 굳이 구분한다면, 언뜻 들으면 신념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념은 너무 자신을 믿은 맹신입니다. 예를 들면 운전자가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운전 판단과 대처가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대리운전자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맹신하는 신념은 끝끝내 자신을 믿습니다. “나의 신념 괜찮다. 나의 신념 운전경력이 몇 년인데. 나의 신념 이 정도는 문제없어.”라고 음주운전을 하는 것이 신념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합니다.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공략하는데 작전회의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을 돌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기드온이 전쟁 소집 나팔을 불었을 때, 3,2000명이 모였습니다(7: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적군의 숫자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7:12)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 말씀대로 2,20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9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전부 3,1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300명입니다. 전투편제 비교를 해보니 메뚜기의 중다함+약대의 무수함+ 해변의 모래처럼 수다함 대 300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입니까?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 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법도 잘지키고, 남에게 잘하며,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고,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자들입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도들끼리 뭉쳐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전을 형성해 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성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잡음 없이 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과도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하나님하고만 잘할 거야.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하나님하고만 좋으면 되지 뭐.”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충성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것입니까? 사도들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칭찬 듣는(marturoumevnou")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으로 되었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다 잘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선택된 사람들은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봉사직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목회 일선에서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성도들로부터 좋은 평판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잡음 없이 처리해야 했습니다.

사도들은 이와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 일곱을 뽑아 안수했습니다. 사도들은 일곱 사람을 택한 후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일곱 사람을 세운 것은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에게 직무를 맡긴 것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직무를 맡긴 것은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는 손을 얹는 행위가 축복할 때였습니다(48:13).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과 대상물 사이의 동일성을 표현할 때 손을 얹었습니다(1:4;3:2;4:4:6:21). 후계자를 세울 때 손을 얹었습니다(27:23). 미쉬나(Sanhedrin iv. 4)에 의하면 안수를 통하여 산헤드린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열 두 사도가 일곱 집사에게 특수한 임무를 맡겨서 자기들에게 가담시킨다는 의미의 안수였습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일곱 사람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세워진 사람은 Stevfano" 스데반, Fivlippo" 빌립, Provcoro" 브로고로, Nikavnwr 니가노르, Tivmwn 디몬, Parmena'" 바메나, Nikovlao" 니골라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일곱을 집사”(deacons)라고 불렀습니다. 여러 교파에서 집사는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대목에서는 집사라는 말의 어원인 헬라어 명사 diakonos를 쓰지 않았습니다. diakonos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diakonia가 쓰였습니다. 2절의 일삼는diakonei'n ‘섬기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diakoniva는 매일의 구제(1)말씀 전하는 것”(4th'/ diakoniva tou' lovgou)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 명은 기능면에서 볼 때, 집사보다는 헌금 분배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날의 세계는 지도자 부족 현상이 심각합니다. 국가나 교회나 우리 사회에 지도자 부재로 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끔찍한 핵무기공장이 건설되고, 인권은 광범위하게 침해받고 있으며, 환경과 에너지의 위기,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비참한 장기적 실업, 산업 간의 마찰의 지속(노사간), 인종 분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존속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가정의 안정을 위협하는 압력들, 의 전통이나 성에 따른 역할에 도전, 그리고 인구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면으로는 만연하는 물질 지상주의와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상실이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제 세계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것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기술적인 지식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현명한 지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현대인들은 혼란에 빠지고 당혹해하며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유를 빌리자면 우리는 목자 없는 양 떼와 같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자들은 자주 장님을 데리고 다니는 장님 길잡이 같습니다.

소위 leadership에는 많은 종류와 수준이 있습니다. leadership은 세계적인 소수의 정치가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국가의 최고 관리층에 한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leadership은 어떠한 사회든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지역의 교회나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입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가정과 집에서의 지도자들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이 대학에서는 교수가 지도자입니다. 회사나 공장의 중역들, 판사들, 의사들, 정치가들, 사회사업가들, 공무원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갖습니다. 방송국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사람들-작가, 극작가, 저널리스트, 라디오, TV의 방송인들, 예술가와 프로듀서도 모두 지도자입니다. 세상은 이 모든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 더 안목 있고, 더욱 용기 있고 더 헌신적인 지도자들을 바랍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태어나기도 하고 길러지기도 합니다. 미국의 흑인 교육학자 Bennie E. Goodwin소질 있는 지도자들은 탄생하는 것이고, 효율적인 지도자들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Shakespeare의 유명한 시 구절에는 위대한 것을 두려워 말아라.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게 태어나지만, 어떤 이들은 위대함을 성취하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이 그냥 그들을 찾아오기도 한다.”라고 했습니다. 경영학 총서는 천부적인 지도자”(BNLs, bom natural leaders)에 관해 말합니다. 그들은 강한 智性과 개성, 그리고 인격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Oswald Sanders는 기독교적 leadership은 타고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 혹은 타고난 재주와 영적인 재능의 조화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와 잠재적인 leadership 모두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Closing 일반적인 leadership의 표지와 특별한 기독교적 leadership의 표지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시작하자고 부추기기 전에 우리 스스로 시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따를 만한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끈기있게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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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  (0) 2020.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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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모르는 자들의 심판

이사야5:13-17

베트남 전쟁에서 이길 길을 몰라서 패배했다고 시인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TV 기자회견에서 국민 여러분!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우리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졌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 임할 때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했었습니다. 첫째, 일단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환산하기로 했습니다. 둘째,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은 일단 옆으로 제쳐놓았습니다. 셋째,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넷째, 그것들은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가 베트남에 패배한 이유입니다.”

손자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 , , , 다섯 가지인데 는 군주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같은 뜻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손자병법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습니다. 임금이 정하는 전쟁의 명분, 병사들의 전투의지, 백성들의 애국심이 한마음 한뜻이 될 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이 를 알지 못했기에 패전했습니다. Robert Strange McNamara는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미국은 전쟁해야 하는 명확한 vision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라는 가치가 절대 숫자로 환산될 수 없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13에 이러므로 @kel;/lâkēn라는 副詞를 사용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용서할 수 있을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로잡힐 것이라는 말은 過去時制가 되었습니다. 1:28-31을 보면

 

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따라서 이러므로는 심판의 경고와 위협을 동시에 말합니다. 심판의 경고를 들었다면, 이스라엘은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5:8-12을 보면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찌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1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12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의 경고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할 일들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무지함을 인하여 t['d: AyliB]mi/mibh-lî

dʽat는 문자적으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소멸 됨”,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닳아 떨어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다 없어짐입니다. 여호와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졌습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씨종으로 노예 생활하는 것을 면해주셨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의 은혜를 사그리 다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마음 가운데는 선천적인 본능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무지를 가장하여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그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모든 사람 속에 주입하셨습니다. 그 기억을 잊지 않도록 요모저모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더해 주십니다. 가뭄을 통해서, 또는 장마를 통해서, 천재지변을 당하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그들의 창조임을 깨닫고 있기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거나 그들의 생명을 그의 뜻에 따라 바치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의 증거에 의해 정죄를 받습니다.

야만스런 민족이거나 미개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은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종교의 씨앗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 이후로 종교 없이 산 지역, 도시, 가정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무언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모두 신들을 믿고 있는데, 자기만 아무 신도 믿지 않으면, 두렵기에 뭐라도 믿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깎아 만든 것이나 부어만든 것들에게 예배하여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것입니다.

과거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그들은 때때로 그들이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어렴풋하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G. Caligula/37-41)는 하나님을 심히 대적한 자입니다. 하나님께 아주 모욕적인 말을 한 자입니다. Tiberius Caesar의 증손 조카이며 후계자인 Suetonius의 말에 의하면, Caligula는 천둥만 치면 벌벌 떨면서 침대에서 뛰어나와 그 밑에 숨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라고 하는 자들도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은 있습니다. 사람이 실제적인 무신론은 불가능합니다. 건전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워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불경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지만, 그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내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확신을 입증해주는 것이고, 하나님이 각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능한 한 쫓아 버리려 합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파괴해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이 창조의 법칙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를 만든 분이 누군데, 지옥을 누가 관장하시는데,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시고 관리하시는데 자꾸 이탈하느냐입니다. 지구를 떠나도 내가 관장하고, 땅속 깊이 들어가도 거기도 내 관할인데 나를 떠날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백성입니까? 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을 불가마 같은 애굽에서 빼내신 하나님이십니다. 핏덩이 같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으로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출애굽기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을 잊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지와 악의에 의해 소멸되거나 부패해집니다. 그들이 이방의 각종 미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의 씨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뿌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잘 자라게해서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미신에 빠져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고의로 악의를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으로부터 이탈한 것입니다. 사람이 미신에 빠져든 사람들은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무지는 거의 대부분 교만한 허영과 강퍅함과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마땅히 자신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쓸데없는 사색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미신에 빠지는 것은 교만과 결합된 허영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 지어낸 모습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고, 쓸데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귀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토속신앙인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미신에 깊이 빠져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상상 속의 신을 믿으려는 부패함이 자기 자신을 망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14:1)라는 말은 선천적인 빛을 꺼버리고, 고의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자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하고 습관적인 죄로 인해 강퍅해집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사납게 내쫓습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부여받았음에도 내쫓습니다. 그들의 이 미친 행동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을 단적으로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의 사악한 행위가 눈 뜨고 못 볼 지경일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사악한 앗수르나, 바벨론 등과 같은 나라들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Calvin은 악한 자들의 마음에 지방이 덮여서 그들이 눈을 감아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공정한 처벌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36:1)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해석한 것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확신하기에, 그들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매우 거만하게 찬양합니다.

그들이 비록 자신들의 의식과 다투어 거기에서 하나님을 추방하려고 하지만, 그를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기에 그들은 짐승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이 이러한데 하나님이 계실까? 정의와 공의는 사라지고, 불의와 악의가 판치고 있는데, 하나님은 뭐하고 계실까라고 반문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신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놓아 그것들을 좇았기에 사람들이 극도로 악해졌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신앙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종교가 하나님의 뜻에 반한 행동을 열심히 합니까? 이것이 종교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지만, 전혀 아닌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신적인 신앙은 하나님이 관심조차 없다고 명시한 것들만 고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합니다. 미신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23:10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사람으로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예레미야32:35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케 한 것은 나의 명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에스겔 16:20,21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암몬 자손들이 섬기는 밀곰(Milcom)은 몰렉(Moloch), 몰록(Moloch), 말감(Malcam)으로 불리던 암몬인들의 민족신입니다. 이 신을 섬기는 제의(祭義)의 특징은 인신제사였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가증한 신으로 언급되었습니다(20:1-5). 유아(幼兒) 희생제사였습니다.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이었습니다.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습니다.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우측에 맹렬히 불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고대 이방 족속들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불인 태양을 섬기기위해 이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부모들은 자식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아하스(Ahaz) 시대 때 벤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아이를 죽여 뜨겁게 가열된 몰렉의 팔에 안겨 결국 불태우는 유아제사가 있었습니다(16:20, 21; 20:31; 32:35; 왕하23:10). 이같은 사실은 예루살렘 근처 벤 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행해진 이 제사를 가리켜 선지자 에스겔이 학살이라 불렀고(16:21), 예레미야가 불에 살랐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종교에 열심을 내면 어떻게 됩니까? 가정을 파괴하고, 지역을 파괴하며, 국가를 파괴하게 됩니다. 국가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데, 무당의 혀를 빌어서 정치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엉뚱한 곳으로 국정이 흘러가 파선하게 됩니다. 현재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가 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짓입니까? 무당의 짓거리입니다.

 

사도바울도 갈라디아교회에게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4:8)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모호하고 그릇된 견해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라고 경고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 방황할 때 그들은 하나님 없는(2:12) 자들이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고 있는 나라들 일본, 중국, 러시아, 아프리카를 초토화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하나님을 섬겼습니까? 우상숭배에 미쳐서 날뛰던 국가였습니다. 오늘날 이들 국가는 어떤 나라들이 되었습니까? 괴물들이 되었습니다. 백성을 학대하고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심판대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이것이 무너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심판 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힘을 제거할 수도 없고 그것으로부터 도망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두려워하여 외양이 흡사한 어떤 종교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의 의를 소멸시킬 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전 생애에 걸쳐 하나님께 끊임없이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진리와 정의를 쏟아야 하는데, 헛된 곳에 소비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한 포로 생활, 궁핍한 생활, 죽음의 공포를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13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14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 15 천한 자는 굴복되고 귀한 자는 낮아지고 오만한 자의 눈도 낮아질 것이로되 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17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먹을 것이요 살찐 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은 유리하는 자들이 먹으리라

 

흥청망청 먹고 떠들었던 자들이 전쟁의 패배로 인한 참상을 겪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귀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전쟁에 패하면 노예가 됩니다. 돈이 많고, 학식이 풍부하며, 권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은 그를 매우 하찮게 여깁니다. 사망은 환락을 애곡으로 변하게 합니다. 사망은 희락을 울음으로 변하게 합니다. 천한 자와 귀한 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함께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일지라도 죽음은 그를 낮아지게 합니다. 천한자들은 더 낮아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심판의 결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거룩한 하나님께서 그 심판과 이 섭리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높임을 받으십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을 낮추심으로써 거기서 하나님의 정의가 인정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거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가장 강한 자를 꺾으시고, 가장 교만한 자를 낮추시며, 가장 다루기 힘든 자를 길들일 수 있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흠 없이 택한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거룩하신,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의롭게 심판하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실 것입니다. 교만한 자가 낮아질 때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선한 사람들은 구제되고 구조됩니다. “그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같이 먹을 것이라했습니다. 어린 양(예수)을 따르던 자들, 이 땅의 온유한 자들, 그래서 교만한 압제자들에 의해 학대받아 두려움에 빠져있던 자들이 평안하게 푸른 초장에서 먹을 것입니다. 교회의 원수들이 멸망될 때, 교회는 비로소 휴식을 얻고 그들은 기쁘게 먹을 것입니다.

 

Closing 세속적인 철학자들은 한때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안 계시는지를 네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은 계속되지만, 결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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