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igula와 유대인(사도행전25:6-12)
Caligula는 Roma의 제3대 황제입니다(재위37-41). 칼리굴라의 본명은 Gaius Caesar Germanicus입니다. 즉위 초에는 민심수습책으로 원로원, 군대, 민중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낭비와 증여로 재정을 파탄시켰습니다. 잔혹한 독재정치를 강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인간세계에 나온 神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광포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근위병의 한 장교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Orient에서 우수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Greece인들이었습니다. 우수하기 때문에 두 민족들은 모든 면에서 이해가 서로 대립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대립, 학문적인 대립으로서 그 도가 지나칠 만큼 심했습니다. Alexandros대제 시절에 시작된 300년의 Hellenism 시대에는 두 민족의 처지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Cleopatra의 죽음으로 그리스인의 마지막 보루가 Roma의 손에 들어간 주전30년부터 두 민족은 지배자인 Roma인 밑에서 피지배자로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Caesar와 Augustus, Tiberius로 이어진 한 세기가 유대인에게는 그래도 살기 좋은 시대였습니다. 과거의 Greece인 지배시대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에게 권력이 주어지고 힘이 생기면 인간은 타락한 존재라 자신을 다르게 생각합니다. 자천이든 타천이든 Caligula는 Roma황제가 신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이라고 여기던 Caligula가 병이 들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제물까지 바치며 그의 쾌유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유대인들은 난처했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Greece인은 다신교였습니다. 다신교인들은 신이 하나쯤 늘어난다고 해도 문제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로 Greece인과 유대인들이 마찰하기 시작했습니다. Egypt의 Alexandria는 Greece인과 유대인들의 도시였습니다. 100만 명의 도시로서 Greece인과 유대인들의 비율을 6:4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마찰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Caligula가 즉위한지 1년 뒤인 주후38년 Alexandria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Greece인들이 Caligula의 이름을 빌어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Greece인들은 항구에 정박해있는 유대인 소유의 배를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유대인 거주지역의 집들도 불에 타고 약탈당했습니다. 유대인이 집단 거주 지역으로 나오면 그 이유만으로 살해했습니다. Greece계 주민은 유대회당 안에 Caligula의 상(像)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이럴 때 싸움을 공명정대하게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황제대리로 수습하러 온 사람은 Egypt에 온 Flaccus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중재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 Greece편에 서버렸습니다. Flaccus는 황제의 눈치를 본 것입니다. 신을 자처하는 Caligula가 젊기에 황제로 오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Caligula를 신이라고 부추긴 그리스인들을 강경하게 진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Alexandria폭동은 유대인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이었습니다. 항상 최고자리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명색이 수사관이나 수습관이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수사나 수습할 수 없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권력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하지 못합니다. 잘못하면 자신의 밥줄과 생명이기에 공명정대하게 하고는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권력입니다. Flaccus는 토요일의 안식일을 폐지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Alexandria의 5개 지구 가운데 2개 지구에 거주했습니다. 하지만, Alexandria에서도 경치가 아름다운 구역에 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1개 지구에 몰아넣었습니다. 유대인의 구역이었던 곳은 400채의 저택이 불탔습니다. 회당도 불에 타고, 36명의 제사장들은 경기장으로 끌려가 Greece계 주민들의 조롱을 받으며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유대인의 공장은 폐쇄되고 무역도 정지되었습니다. Alexandria의 경제는 거의 절반이 마비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유대인들은 Caligula에게 호소했습니다. 이때 사절단의 단장은 Philo였습니다. Philo는 석학이었습니다. 학식이 풍부하고 유대인이면서 Greco-Roman의 문화에 정통했습니다. 재산도 있어서 사절단의 비용도 자부담이었습니다. 또한 Philo의 친동생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유복한 금융업자였습니다. Roma의 시민으로서 Caligula의 할머니의 재산을 맡아서 운용했습니다. Philo의 아들들 중에는 Roma군단의 대대장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Philo는 주후38년에 Roma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만나줄 것 같은 Caligula는 여러 이유를 들어서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결국Caligula는 유대인의 불리한 환경을 개선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Greece인들이 Alexandria에서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는 같은 세대에 있지만,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에서는 정의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세속화된 교회도 정의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교회의 line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교만하기 쉽고, 변하기 쉽기에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참고: 로마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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