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두 사도/빌립(사도행전28:30-31)
빌립/Fivlippo"/Phîlippos는 ‘말(horse)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인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사역할 초기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요1:28). 예수님께서 빌립을 선택하여 제자로 부르셨습니다(요1:43). 빌립의 고향은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벳세다입니다(요1:44). 안드레와 베드로도 벳세다 사람입니다(요12:21).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소개하였습니다(요1:45).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요1:49). 종려주일(Palm Sunday)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몇몇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여 빌립에게 간청하였습니다(요 12:20-23). 빌립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디게 깨달았습니다(요14:8-21).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신실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행1:12-14).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 전에 그를 시험하셨습니다(요6:5-7).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요14:8-11).
사람들은 모두 같을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 여태까지 같은 얼굴을 가진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하긴 해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얼굴뿐만 아닙니다. 심성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착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성이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질이 급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느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해도 이해를 빨리 하는 사람이 있고, 이해를 늦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빌립이 이해사 느린 사도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빌립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의 명단에서만 빌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제자들의 명단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인간성과 개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합니다.
요한복음6:5-7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2:20-23,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오늘날에 목사청빙요건을 보면 참으로 세상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4년제 대학교졸업, 이름 있는 신학교3년을 마치고 석사를 끝내고 박사학위를 소지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봐야할 자격인 인간성은 안두에도 없습니다. 사람이 되지 않은 사람을 인간적인 자격에 맞추다보니 교회가 시끄럽고, 기독교계가 야단이며, 전도의 문을 아예 이 사람들이 막아버립니다. 빌립은 다소 우둔했던 사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빌립은 냉철한 합리적 생각과 물질주의적인 사고경향을 가졌습니다. 그 예를 우리들은 갈릴리해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장소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먹을 때가 이미 지나서 사람들은 배고플 때였습니다. 당장에 먹을 것을 제공해줘야 했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여기서 5000명이란 20세 이상 60세미만의 남자들입니다. 즉 전쟁에 나갈만한 나이입니다. 따라서 남자도 20세미만이 빠졌습니다. 60세 이상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거기에 모인 사람의 숫자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사람들을 먹이기 전에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복음6:5-6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도 어디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음을 알면서도 빌립에게 물으신 이유를 ‘시험코자’peiravzw/peirâzo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어떤 해결책을 듣고자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심은 빌립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계산을 했습니다. 떡을 살수만 있다면 200데나리온의 떡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은 떡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200데나리온은 회중들의 숫자를 계산해서 200데나리온의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공금의 전부였습니다. 그 돈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에스겔37:1-3을 보면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사람의 마른 뼈가 심히 많은 곳으로 데려가신 후에 이 뼈들이 살아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에스겔은 주께서 아신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에스겔과 빌립의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세상에 속아서 믿음으로 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늘 성경을 대하면서 갈등합니다. 항상 말씀이 나를 주관하게 한다고 하지만, 망설이고 갈등하다가 세상에 늘 끌려 다닙니다. 통상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시다고 하면서도 부분적인 것만 믿을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통찰력도 부족하고 믿음도 없고, 천상 우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 삼아주심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Rufinus는 390년경에 옛 로마신경에서 거룩한 교회를 언급했습니다. 700년경에 채택된 사도신경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라고 했습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첫 번째 공의회에서 작성된 신조는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했습니다. 381년도에 작성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에서는 ‘우리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 주님은 그 중에 어떤 한명이나 특정인에게 교회를 맡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나 바울에게만 맡긴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성격상 활달하거나 차분하거나 많이 알거나 적게 알거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을 때 거의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모두 순교당합니다. 사도 빌립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뭐가 잘났다고 마천루 같은 교회를 세우고 마치 한국교회의 대표인양 행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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