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창1:26-31)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Wnmel]x'B];베찰메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Wnte=Wmd]Ki; 키드무테누)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이 다른 생물과 다른 점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다”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라는 말이 이미 삼위일체 되심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의 신학자들 즉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은 앞 단어 형상(첼렘)은 신체적 특징을 이야기하고 모양은 사람의 영적인 본성이라 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그러한 견해를 거부하였습니다. 모양이 사람의 사람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련되거나 상실될 수 있는 자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암부로스, 어거스틴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중세의 스콜라학자들은 형상은 이성과 자유의 지성적 능력들을 함축하고 있고, 모양은 원시적 거룩과 의로움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두 단어를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고 의로움이 인간의 참된 본성에 본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Luther는 원시적 의로움의 관점에서 형상을 이해하여 아담이 타락하던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Cavin은 하나님의 형상이 주로 마음 곧 영혼과 그것의 능력들에 있는 것으로 보면서도 사람의 어떤 부분도 심지어는 신체까지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 재능뿐만 아니라 원시적 의로움의 영적 자질들 곧 지식, 의로움과 거룩을 포함하였습니다.
개혁주의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이 형식적으로는 인격의 관점(이성, 감정, 도적적책임성)에서 정의되고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존 머레이는 창세기 5:3의 형상이 창세기 1:26을 반추하고 있으며, 창세기 9:6에서의 형상은 타락한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고 했고, 고전11:7의 형상 역시 남자의 형상이나 여자의 형상이 같다고 전제했습니다. 또한 약 3:9의 형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상으로 살펴볼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들에 국한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자의식적이며, 이성적이며, 자유로우며,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행위주체가 있습니다. 사람은 타락에 의해 왜곡되긴 했어도 없어지지 않은 본래적인 유사성을 따라 그의 삶과 행위를 영위해 나가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책임의 근거가 되는 것인데 책임의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유사성이다. 그리고 책임의 완수는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사람임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우리 영혼의 갈망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24과 골로새서 3:10은 진리의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규정하는 것은 참다운 하나님의 형상이려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