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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인 신앙이 아닌 실제적인 신앙(로마서6:12-14)

 

11절을 보면 ‘성도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구원받은 이후에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이루어야 할 구원이 있습니다. 즉 성도들은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 사이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미 받은 구원이지만, 이루어야 할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거룩함을 받았지만(確定的 聖化), 계속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漸進的 聖化). 그래서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신을 같이 끼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확정적 성화 우리가 믿는 신앙은 감정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놀라운 경험을 했을지라도 그것을 즐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앞으로 더 나아가 이 세상의 공격을 막아내야 합니다.

보통 성화라고 하면 신자가 마음, 뜻, 의지, 행위가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됨으로써 죽어서 육체 없는 영혼이 거룩함 속에서 완전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부활에서 그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으로 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변화와 일치화의 과정에 ‘성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성화를 가리키는 가장 특징적인 용어들이 과정이 아니라 단번의 확정적이라는(definitive)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중생, 칭의, 양자됨을 반복할 필요가 없는 단번에 성취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본질상 확정적입니다. 이것을 확정적인 성화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이 성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선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고전1:2)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6:11에서 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바울이 그들의 성화를 효과적 부르심, 성도라는 그들의 정체성, 중생, 칭의와 等値(등치)시키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21에서는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에서, ‘거룩하고’라는 용어가 ‘확정적인 성화’입니다. 에베소서5:25-26에서는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을 때, 여기서 성화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함’이라는 의미로 설명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구절에서 말하고자 한 요지는 신자들은 ‘거룩하게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화’라는 명사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4:7),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sanctification)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살후2:13,14).라는 용어들이 이미 신자들은 거룩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에 관한 용어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초에 일어나는 어떤 결정적인 행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유효하게 부름 받은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의 특징을 이루는 어떤 결정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화를 점진적인 역사(投事)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성화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6:1-7:6에서 이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사도바울은 성도의 변화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간격을 부각시켰습니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입니다(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합니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집니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주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고 맙니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아래 있습니다(14절). 죄에 대해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것입니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7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입니다(10,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12,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릅니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합니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22절). 이러한 대비는 결정적인 변화를 증거합니다. 그것은 삶과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을 평가하는 모든 척도에 절대적인 차별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규정들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능력과 죄에의 종사(從事)와의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점진적 성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오는 죄와의 확정적인 단절과 성령 안에서의 새 생명에 대한 강조는 죄가 점점 더 멸해지고 거룩함에의 일치가 점진적으로 획득되는 금욕과 성화 과정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서 6장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죄의 권능과 더러움으로부터의 결정적인 옮김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內住(내주)하는 죄로 인해 계속 일어나는 갈등을 말했습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14)라고 스스로를 고발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7:23, 24), “내 자신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로마서 6장에서도 우리는 죄의 잠식에 끊임없이 깨어 있을 필요함을 권면합니다. 사도요한은 신자의 성화의 확정적 성격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요한의 용어들은 너무 강렬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가르침 또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명백한 사실들과 조화시키기에 이주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 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 그런데 또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그는 신자가 죄 없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자 안에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 신자가 아직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세에서의 신자의 상태는 정적인 현상(status quo)유지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보의 상태 즉 성격상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진보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금욕과 성화 양자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 두 구절들은 죄에 대한 단번의 죽음과 그로 인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의 영역으로의 이전이 강조되고 있는 문맥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6장은 확정적 성화를 강조하는 장입니다.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8:13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향해 말하면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데 신자들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죄의 몸이 멸하여졌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더욱더 주목되는 말입니다(롬6:6). 이 활동은 성령의 힘과 은혜 안에서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참여해야 하는 활동입니다.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격렬한 활동입니다. 금욕과 淨火(정화)의 과정은 신자에게 여전히 붙어 있는 죄 및 더러움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표는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의 제거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야 할 구원이 하나님나라에 갈 때까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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