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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로마서6:12-14)

 

성도들은 신학이라는 말을 하면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더러 좋지 않은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신학이라고 하면 학문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신학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학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반응입니다. 넓은 의미로서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행위, 내용 및 그 함축하는 바에 대한 知的省察(지적성찰)입니다. 신학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신앙에 관하여 서술합니다. 따라서 신학은 상황적 학문입니다. 신학의 이러한 상황적 성질 때문에 신학은 지속적인 과업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삼위의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고백과 헌신은 불변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고백의 현장인 이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각 세대의, 각양의 문화적 배경 속에 있는 교회를 섬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교회의 신조를 성찰하도록 도우는 것이 신학입니다.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에 임하는 현장인 이 세상에 그 신앙고백을 적용하도록 도움으로써 교회를 섬기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신학 따로, 신앙 따로는 없습니다. 신학은 성경적인 복음, 교회의 유산 그리고 현대 세계의 사상 형태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곧 신학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불변하는 고백을 적절히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성경의 이중적 진리를 균형 있게 표현하기를 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초월자로서 관계를 맺으십니다. 초월해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분리되어 스스로 자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위에 계시며 우주 저 너머로부터 이 세상에 오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내재자로서 관계를 맺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존재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주 안에 활동적으로 존재하십니다. 세계와 인간사 양자의 운영 과정에 관여하십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이 세상 너머에 계신 초월자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내재자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각 시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묘사할 때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이중적 진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는 창조적 긴장과 균형의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두 가지 진리 모두를 균형 있게 수용해야 신학과 이성 혹은 문화의 관계가 적절히 수립됩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상실되면 심각한 신학적 문제들이 튀어나와 혼란스럽데 합니다.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화적 상황과의 관련성을 잃게 됩니다.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어떤 특정의 문화에만 얽매이는 신학이 되고 맙니다.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삶을 사는 것은 죄의 삶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삶의 과정에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선한 싸움의 1차적인 장소는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은 죄부터 해방된 피조물의 의무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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