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mma of the Paulos(로마서 9:27-29)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은 난해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도저히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이 더러 있습니다. 창세기14:18의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등장하여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줍니다. 이 멜기세덱이 시편110:4에 또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여호와의 변치않는 맹세를 말하면서 멜기세덱의 반차/hr;b]DI/서열를 좇았다고 합니다. 또한 히브리서5:11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소돔사람을 구출한 후에 소돔에서 만난 멜기세덱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멜기세덱을 추정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신비의 인물로 묘사하며 제사장과 변치 않음에 대한 인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사실상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비판을 하며, 비난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변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증이 그리 쉽지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런 논쟁과 반론을 항변합니다.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그들 전체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全 역사가 선별과 선택과정이 계속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형제중에서 아브라함을,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서 이삭을,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을…. 이런 선택의 과정이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 선택된 사람들이 어떤 공로가 있는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어떤 쓸모가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 외에는 어떤 것에도 달려 있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공평하고 정당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dilemma이고 우리들의 dilemma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인간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독단적인 선택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그러한 정책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인가? 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의 대답은 한 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시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합니다. 첫 번째로 출애굽기33:19을 예로 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어떤 증거를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자신이 택하는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민족의 선택과 그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태도도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즉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힘 있는 애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강대국에 자국의 안전을 맡기려고 안달입니다. 누구도 Donald Trump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 당선이 되니까 세계각국에서 난리법석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국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무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편에 서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애굽과 바로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전쟁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전쟁하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바로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바로에게 가서 놓아달라고 요구했을 때 바로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또 그 능력을 거역하는 자에게 그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바로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하는 한 예로써 역사 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출9-16장/William Barclay). 우리 생각은 여기에서 dilemma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해서 아무 일이나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사실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본 성격에 위배되는 일을 아무것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로 오늘은 지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시키다가 한 달 후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자전시키지 못하십니다. 굳이 하시려고 하시면 능히 하실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불공정한데 대해서 또 사실상 자신의 법을 어기게 되는 여하한 행위에도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책임하게 한 사람에게는 자비로 베풀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풀지 않으시며, 어떤 왕을 그저 꼭두각시가 되거나 어떤 인물을 그를 통해 하나님의 보복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하나님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논리의 基底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공의라는 조건하에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아무 권리도 주장 못합니다. 언제든지 공의가 들어오면 그 대답은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고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논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주장이 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자비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과 선별이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난하는 사람들은 바로 비난의 칼을 빼듭니다. 만약에 전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배척한 사람을 나무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잘못은 전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잘못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야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경건치 않은 후손)과 셋의 후손(경건한 후손)들의 연합으로 인하여 세상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상을 쓸어버리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즉시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120년 후에 물로 세상을 쓸어버린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을 바로 앞에 두고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24:38을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멸망된다고 하는데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먹고, 마시고 혼인식을 계속했다는 말씀입니다. 즉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경고했는데,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말이 그렇지 120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은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시지 못하다고 비방합니다. 유치한 반론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의 대답은 퉁명스럽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누구도 하나님과 논쟁할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그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대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꽃병이 되고 싶은데, 왜 물그릇을 만드느냐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그것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덩어리의 진흙에서 한·그릇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한 목적을 위해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흙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반항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말을 예레미야에서 인용했습니다(렘18:1-6).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에 대하여서 William Barclay는 바울사도가 이 말했을 때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이 귀절을 기록한 것은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백성이, 바울 자신의 골육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왜 못 박았냐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난처한 사실입니다. 로마인들 즉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든지 배척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것도 골육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도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의 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백성의 눈을 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바울은 그 논쟁을 거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이 유대인의 배척은 이 방인에게 문호가 개방되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사도는 dilemma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환경을 사용하여 거기서 선한 것을 끄집어냈다고 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악한 환경을 칭-조하여 거기서 선한 것을 끄집어냈다고 말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선한 것이 나오게 하기 위해 악을 행했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의식적으로 이방인이 들어올 길이 열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생각을 어둡게 하고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굳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의 논리는 dilemma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대한 어떤 타당성 있는 이유를 찾기에 그 마음이 절망하고 있는 사람의 변론입니다. 결국에 가서 바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답은 그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것은 바울은 유대인들과 논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논증을 방어하려면 그들 자신의 성경의 인용문으로 보강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유대인의 배척과 이방인 측의 받아들임이 이미 선지자들에게서 예언되었다는 본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호2:23).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호1:10). 그는 어떻게 이사야가 이스라엘이 남아있는 자들이 없었더라면 전멸되었을 환경을 미리 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사10:22-23, 13:10). 이스라엘은 그 백성이 이해만 했더라면 그들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조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은 자기 백성에 대한 절망적인 번뇌 속에서 어찌해서인지는 모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이라는 사실에 매어 달렸다는 것입니다.
신명기10:17을 보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윤리적 거룩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 영원 불변하신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의롭다”qyDIx'/‘차디크’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힘입니다. 사람을 일단 외모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이란 사람을 지지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과거에 CEO였으니까, 잘할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또 속였습니다. 그리하여 4대강을 死大江으로 파괴해버렸습니다. 해놓고보니 빠른 시기에 파괴해야만 할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아주 나쁜 대통령이었습니다. 외모라는 것은 이만큼 사람들을 심히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성적 피조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들의 행위와 관련해 항상 같으시되, 의로운 자들은 항상 용서해 주시고 죄 있는 자들은 항상 정죄하십니다(출23:7). 모든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길과 판단에 있어서 항상 의로우십니다(창18:25). 모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여호와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행하심)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그릇 행함이 없이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신32:2).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재판관은 그들 위에 있는 법에 충실하면 의로운 재판관인데 반하여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경우는 그의 사법적 결정을 내리는 표준이 되는 자기 위에 있는 율법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의 표준은 그 자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진리입니다. 따라서 피조물 된 자들은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판단하실까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의 무한한 지혜와 지식, 그리고 진리 및 윤리적 거룩하심에 근거하고 있어서 공평할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그 자신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본성의 표준에 따라서 되어집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공의는 성경에 보복적일 뿐 아니라 보상적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복적으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시편7:11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편9:7-8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시편96:10-13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찌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이사야5:16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다니엘9:14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니’
로마서2:5-6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도다
로마서2:5-6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데살로니가후서1:5-7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하나님의 공의를 보복적인 것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지만, Herman Bavinck가 지적한 대로,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원리로 일반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와 함께, 즉 “하나님이 의로운 자들을 의롭다 하시어 그들을 높여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는 속성으로서” 그 의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를 대망하되,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는 의로운 가지요(렘23:5), 의로우시며(슥9:9),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고 공의로 하시며(사11:3-5), 따라서 그의 심판은 이러할 것이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시72:12-14). 그런 까닭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는 특별히 궁핍한 자들을 건지시는 가운데 나타납니다. 궁핍한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긍휼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는 그가 그들을 세우신 까닭입니다(시7:9). 또한 도우시고(시31:1), 응답하시며(시 65:5;143:1), 건지시고(시143:11), 소성케 하시며(시119:40), 죄를 용서하시고(시34:22), 그들에게 합당하게 공의대로 행하십니다(시 35:23).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진노와는 달리 그의 인자하심과 대립되지 않습니다(시69:24).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나타내실 때 동시에 그의 은혜를 보이십니다. 죄 용서마저도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그 의의 계시는 구속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입니다. 어떻게 온 세계의 의로운 재판장이 죄인들에 대하여 공의로 용서하고 공의를 베푸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의함으로 정죄를 당하지만, 그들은 의로운 대의를 얻으며 여호와를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공의를 베푸실 것과, 그들의 싸움을 싸워 주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승리를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특별히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죄 용서를 허락하시고, 그들의 심령에 성령을 부어주시며,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그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 판에 새기시며, 이로써 하나님 면전에서 온전하게 행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죄인일지라도 오직 여호와만이 그들을 이 죄에서 건져주실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는 대로는 여호와는 자기의 언약에 충실하심으로 의로우시고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사45:25),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를 그들에게 가깝게 함으로 구원이 지체되지 않게 하십니다. 구약에 나타나 있는 이 의의 원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신약의 계시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허락하실 수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택된 자들의) 전에 범한 죄들을 간과하신(용서하신)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구속사역이 현세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될 수 있게 합니다.
통상 다음의 성경구절(구약/3, 신약/1)을 하나님께서 엄정한 공의로 사람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개념을 반대하여 흔히 인용되었습니다.
이사야40:2 너희는 정다이(부드럽게)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힘든)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yIl'p]K/i키플라임)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예레미야16: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hnEv]mi/미쉬네) 갚을 것은
예레미야17:18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hnEv]mi/미쉬네)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요한계시록18:6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dipla'디/플라) 갚아 주고 그의 섞는 잔에도 갑절이나(diplou'n/디플룬) 섞어 그에게 주라
고 했습니다. 위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이 죄인에 대하여 갑절의 위험을 행할 수 있고 또 행하신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달란트 무게의 죄에 대하여 두 달란트 무게의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에 불균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분명한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성경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 Kline은 이 구절들에서 “배”(또는 “갑절”)로 번역된 히브라어와 헬라어 단어들은 여기에서는 사실 “대응하는” 또는 “맞먹는”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를 부인하는 대신에,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심에 있어서 엄정한 공의를 따라 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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